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재 Dec 20. 2023

그대의 '원'은 행복한가요?

< 시각적 환상, 시간적 환각 >

어느 쪽 원이 더 큰가?


앞의 글에서 물었던 질문을 기억해 보면, 아래 두 그림의 중심에 있는 원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가?





'카·페·인 우울증'을 아시나요?


'커피를 많이 마신다면 우울증이 올 수 있다'로 오인한 커피 애호가나 커피숍 운영자들이 긴장할만한 소제목이다. 긴장을 푸시라. 여기서 '카페인'이란 바로 SNS(카오톡, 이스북, 스타)로 겪는 우울증을 뜻한다. 카카오톡은 한국에 편중되어 있는 서비스이니 '카·페·인 우울증'은 분명 한국적 신조어일 것으로 짐작된다.


고스톱으로 밤을 새다


우리 집에는 화투가 없었다. 선친께서 도박을 단속하던 입장에 있었던 이유였는지, 아니면, 그쪽으로 취미가 없으셨는지 모르지만, 당시 가정의 필수품에 해당하던 흔하디 흔한 화투가 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겨울방학 때 시골 외가에 가면 담요에 돌돌 말려 방구석에 있었던 화투를 펼쳐 놓고 사촌들로부터 4장씩 짝을 지우고 1부터 12까지 순서를 매기는 특별 훈련을 받곤 했다.


성인이 된 뒤에도, 겨우 화투의 짝을 지우고 순서를 헷갈려하는 수준으로는 억지로 끌려 들어간 친목 밥내기 고스톱 판에서 늘 호구였고, 어느 정도 재정적인 기여를 한 뒤에서야 열외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런 내가 고스톱으로 밤을 새웠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른다고, 도박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자식 대학 입학금이라고 장롱 아래에 숨겨둔 돈을 훔쳐서 도박판으로 달려가는 가정폭력을 일삼는 드라마 속 몹쓸 남자를 상상하셨다면 미안하다.


이제 성원이 되었으니 시작하겠습니다


억지로 할 수는 있어도 고스톱은 최소 3명 이상이 되어야 한다. 의결 정족수를 지켜야 하는 회의가 많았던 당시 직장에서 유행했던 말이 "자, 이제 성원이 되었으므로 시작하겠습니다"였다. 다시 말해서, 드디어 3명이 채워졌으니 고스톱 판을 돌리겠다는 뜻이다. 고스톱 판을 돌리고 싶어도 3명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3명이 채워질 때까지 사람을 모으고 빨리 오라고 채근을 한다.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 같이 존재하여야 하는 3명'이 고스톱 판을 돌리는 가장 기본 요소 셈이다.


컴퓨터 고스톱


'컴퓨터로 여는 새로운 세상'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90년대 후반에 온라인 고스톱이 출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의례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물아일체가 되는 평소의 행실과 달리 저녁을 먹자마자 바로 컴퓨터로 달려갔다.


이전에도 고스톱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컴퓨터가 생성한 가상의 2인과 함께 하는 고스톱이었기 때문에 재미가 없었다. 처음에는 컴퓨터가 만든 가상 인간들 둘이서 편을 먹고 나를 물 먹이는가 싶어서 짜증이 났다. 왜냐하면, 3점으로 내가 나기 직전에 서로 싸고 싼 것을 서로 가져가고 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분명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프로그래밍을 하는 입장에서 알고리즘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떻게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대응을 하는지 대충 패턴을 파악했다. 그래서, 뻔히 먹을 수 있는 패도 안 먹고 전혀 엉뚱한 패를 던져서 반응을 살펴보며 프로그램을 놀리는 상황이 되니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컴퓨터 고스톱 판을 떠났다.


온라인 고스톱의 신세계


온라인 고스톱은 새로운 세상이다. 그곳에는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가상 인간이 아니고 진짜 사람이 있다. 고스톱 판이 프로그램 알고리즘에 따라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의 대응에 따라서 고스톱 판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대부분 다른 공간에 있어서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안될 것이고, 더욱이 밑장 빼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이제부터 진검승부다.


온라인상에서 고스톱 방이 만들어지고, 어딘가에서 들어온 3명이 채워지면 고스톱은 시작된다. 요즘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가입하면 얼마간의 돈과 '하수'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돈을 조금씩 따면서 '하수'를 면하고 '중수'만 되면 마쳐야지 하면서 한판을 더하고 한판을 더한 것이 피곤하여 기지개를 켜다가 뒤를 돌아보니 창밖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초저녁부터 앉아서 꼬박 밤을 새운 것이다. 도박판은 이렇게 무섭다. 다음 날 출근하여 하루종일 무척 힘들었고, 그래서 다시는 도박판에 기웃거리지 않았다.


'중수'라는 타이틀에 집착한 어리석은 몰입도 있었지만, 그날 밤이 무척이나 행복했던 이유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스톱을 치기 위해서는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 같이 존재하여야 하는 3명'이라는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의 현장에 있다는 강렬한 느낌 때문이었다. 고스톱을 치기 위해서 이제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는 '공간 초월'을 경험한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공간 초월의 시작


작은 공간에서 제한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던 고립된 우리의 삶에 족쇄가 풀린 것은 소셜미디어(SNS) 덕분이다. 이제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세상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다. 게다가, 저장된 디지털 자료를 통해서 과거에 대한 기억과 시간마저도 우리 손아귀에 넣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폭이 과거에 대해 엄청나게 넓어졌다. 소셜미디어는 우리의 삶을 바꾸었고, 완전히 새로운 인류 문명의 진화 방식이라 생각된다. 가히 혁명적이다.


시공간의 극복이 가져온 행복


페이스북이 처음 열렸을 때 온 세상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신기한 경험에 또 한 번 전율했다. 같은 나이 또래의 가까운 사람을 뜻하는 한국적 친구의 개념에 조금은 주저하기는 해도, 성별 연령 국적 인종을 구별하지 않고 친구가 되는 인식의 변화를 경험했다. 평생 만날 꿈도 꾸지 못했던 여러 나라에 있는 사람들과 언제든 편리하게 연결해 주고 교류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곳에 가면, 멋진 것을 보면, 맛있는 것을 먹으면 '나는 행복해요'라며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사연을 정리해서 올렸다. 세상 사람들과 나의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으로. 세상으로부터 쏟아지는 '좋아요'와 답글에 자극받아 더욱 열심히 올렸다. 다만, 멋지고 좋고 폼나는 것만 골라서. 나의 멋짐을 뽐내고 좋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 행복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의 인간들이 관종의 성향이 있으니까.


시공간의 극복이 가져온 불행


동시에, 나도 새롭고 멋지고 맛있는 사진과 사연을 올리는 세상 모든 친구들에게 좋아요로 응답했다. 인터넷에서 만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멋지고 행복해 보였다. 현실이 어떠하든 나도 늘 행복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멋진 곳을 찾아가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는 사진을 올렸다.


사극에서 나오듯이 옛날 같으면 어느 한 동네를 고립시켜 통제가 가능했을지도 모를 전염병도, 전 세계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교통편과 끊을 수 없는 인적 교류와 단절할 수 없는 네트워크 때문에 코로나(Covid-19)가 무방비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우리는 똑똑하게 목격했다.


행복의 무한경쟁


생명체인 바이러스가 퍼져 나가는 것이 그 정도의 파급력을 보였으니,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들이 전 세계에 퍼져 나가고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제는 아주 쉬운 일이 되었다. 출처와 국적을 따지지 않는 수많은 이미지와 스토리들이 다른 세상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날아다니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행복은 내가 보는 눈앞에 있는 작은 마을이나 국가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게 되었다. 행복의 무한경쟁 시대가 열린 것이다.


카·페·인 우울증


'카·페·인 우울증'은 행복의 무한경쟁이 가져온 새로운 질병이다. 사람들이 대부분 소셜미디어에서 모두 너무나 잘 살고 너무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부족하고 모자란 듯이 느껴진다. "나 이외의 사람은 모두 행복해 보이는데 나는 왜 이럴까?" 싶다. 내 인생만 보잘것없어 보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소셜미디어를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과 우울감을 느끼는 지경이 된 것이다.


소셜 미디어와 우울증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회적 비교가 자신과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높일 수 있고, SNS 사용 시간과 우울증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관찰되었다"라고 한다.


엄마 친구 아들


우리를 항상 열등감에 빠지게 한 존재다. '엄마 친구의 아들/딸'. 그 탁월한 존재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얼굴도 잘 생기고 착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직업도 좋고 돈도 잘 벌어 급기야 엄마를 해외여행까지 보내 주기도 한다. 우리 엄마의 바람과 희망을 모두 갖춘 완벽함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존재다. 그런 비교를 당할 때마다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열등감으로 자학을 하게 된다. 나는 왜 하나도 못하나. 나는 참 못났다.


무한 비교의 시대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나와 노는 물이 달라서 그런지, 몹시 궁금했지만 엄마 친구의 아들을 만나지는 못하였다. '그런 완벽한 아들을 둔 엄마 친구가 있을 리가 없다'라고 의심을 하였거나, 엄마의 잔소리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듣는 생존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엄친아'와의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도 다행히 정신승리를 하며 살아남았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 속에서 만날 수가 없었던 몇 명의 엄마 친구 아들/딸이 아니라,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현란하게 펼쳐지는 세상의 모든 엄마 친구 아들/딸이 비교 대상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유명인들 뿐만 아니라, 학교 다닐 때 별 볼 일 없었던 친구가 명품에 외제차를 굴리며 잘 나가는 사진을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보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비교하자면, 겨우 엄마 친구 아들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비교 대상이 되는 가혹한 무한 비교의 시대가 되었다.


당신은 하나의 원이다


우리는 각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원이다. 그냥 하나의 원이 아니고 이 세상에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하나의 독립적인 원이다. 온 우주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아주 귀한 존재인 하나의 원이다.

당신은 제일 작다


하지만, 비교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참으로 초라하고 부족하다.



당신은 대단하다


하지만, 이렇게 보면 당신도 대단하지 않은가?

시각적 환상, 비교의 환상


가운데 있는 두 원이 어떻게 보이는가? 왼쪽이 오른쪽 보다 훨씬 작고 외소하고 심지어 불쌍해 보이지 않는가?



모두 똑같은 원이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가운데에 있는 두 원의 크기는 동일하다.




동일한 크기의 원임에도 비교하기에 따라 작아 보이기도 하고 커 보이기도 한다. 지금 당신은 당신이라는 '원'을 어디에 어떻게 비교하면서 살고 있는가? 혹시, 카·페·인 우울증으로 무한한 비교 속에서 우울하지는 않은가?


당신은 온 우주에서 하나뿐인 소중한 하나의 원이다


당신은 우주에서 하나뿐인 소중한 하나의 원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는, 있는 그대로 소중한 단 하나의 원이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그대의 '원'은 '행복'한가요?


절대적인 행복을 이루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하지 않는다면 상대적인 열등감이나 박탈감에서 오는 불행한 느낌은 없을 것이다. 비교하지 말자. 비교하지 않으면 동그라미의 크기가 큰지 작은지 구분하기 힘들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충분하다. 그대는 충분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