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재 Jun 01. 2020

딱 1년만 더 살다 갈게

아내에게 준 올해 생일 선물


약속 선물


매년 아내의 생일 선물로 작은 '약속'들을 해 왔다. 어떤 한 해는 '평생 커피 타 주기', 어떤 한 해는 '평생 설거지'를 선물했다. 약속을 선물한 뒤부터는 매일 아내에게 선물을 하듯이 기쁘게 커피를 내려주고,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 올 해도 생일이 왔고, 또 다른 약속을 선물했다.


"올해의 약속은 '그대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꼭 옆에 있어 주겠다'는 약속. '떠나는 그대가 외롭지 않게 손잡고 옆에 꼭 있어 주겠다'는 약속. 나는 그대가 떠난 뒤에 반려견 한 마리와 1년만 더 살다가 가겠다는 약속을 선물합니다.


다소 슬픈 약속이기는 해도, 그대에게 약속을 꼭 지킬 수 있게 나의 건강을 챙기고, 앞으로의 삶이 어려워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그대 곁에 꼭 붙어 있다가 그대가 떠난 이 세상 뒷정리를 하고 갈게요. 그러니 그대는 걱정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요. 그대보다 1년이 더 긴 내 목숨도 그대에게 달렸으니 그대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 달라는 부탁도 함께."


나보다 먼저 죽지 마. 내가 먼저 죽을 거야.


서로에게 장난처럼 던졌던 이야기이긴 해도, 죽음의 순서를 정하는 것은 홀로 남아서 떠나간 사람의 뒷정리와 슬픔을 감당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는 속마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먼저 죽어버리겠다는 말은 때로는 서로에게 위협이었고, 때로는 힘든 현실의 도피이기도 하였다. 지극히 이기적이기는 해도 먼저 죽는 것이 훨씬 편할 수도 있고, 또 죽고 사는 일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장하거나 약속할 수도 없는 실없는 농담에 불과함에도.


그대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꼭 옆에서 손잡고 있어 줄게.


아내에게 준 올해 생일 선물이다. 당장에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재정적으로 지출해야 할 것이 없는 편리한 공수표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결심하고 마음으로 전한 선물이다.


사람의 생명은 하늘에 달린 것이라 감히 누가 장담할 수 있으리오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지키겠다는 다짐이고 약속이다. 앞으로 살면서 포기하고 싶은 상황이 있어도 견디고 살아낼 것이며, 별일 있겠는가 생각하고 안일하게 방치해온 나의 건강도 챙겨야 하며, 행복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아내를 잘 보살피고 안색을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이 말을 믿고 빙그레 웃으면서 정말 걱정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다. 그 슬픈 책임을 기쁘게 감당하기로 하였다.


반려견 한 마리와 1년만 더 살다가


외국 생활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신 분들이 있었다. 레이몬드 할아버지께서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병원을 오가며 매년 올 겨울은 넘기실런지 걱정을 하곤 했었는데 갑자기 진 할머니께서 폐암 선고를 받고 짧은 기간 투병을 하시다 회복하지 못하고 먼저 떠나셨다. 그런데, 외동아들 마이클도 오십 중반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는 충격적인 상황 속에서도 '사는 의미가 없다'라고 한탄하시며 레이몬드 할아버지는 홀로 제법 긴 세월을 쓸쓸하게 살다 가셨다. 나의 소망대로 내가 뒤에 남겨질 수 있을지라도 그 이후에 주어질 시간의 양이 얼마일지 짐작하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 삶의 뒷정리를 아이들에게 넘겨서 부담을 주지 않도록 정리하려면 1년 정도는 필요할 것 같고, 1년보다 더 길어지면 혼자서 너무 쓸쓸할 것 같아서 1년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반려견이라도 없으면 매일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폐인처럼 살 것 같아서, 반려견에게 먹이를 줄 때 나도 몸을 일으켜 끼니를 때울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반려견 한 마리와 1년 더'를 소망하게 되었다.


죽음 또는 영원한 이별을 예상하는 것은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생의 끝까지 챙겨야 할 책임이 있다는 약속은 삶에 대한 나의 태도를 다시 한번 견고하게 해 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