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비롯한 평화 운동을 하며 살고 있다. 해군기지 반대 운동의 중심에는 10년을 이어오는 의례와도 같은 활동이 있다. 바로 아침 7시 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하는 평화백배, 11시 강정 천막 미사, 그리고 12시 인간 띠 잇기이다. (이에 대해 더 궁금하신 분들은 검색을 추천드린다!)
2016년 제주해군기지가 완공되고, 평화 활동가들과 강정 마을 주민들은 해군기지로부터 강정 마을과 바다를 빼앗기고 절대 다시는 그 땅을 밟을 수 없다. 우리가 매일 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백배를 하고 인간 띠 잇기를 해도 마주치는 것은 군인들의 감시와 뾰족뾰족한 철조망과 굳게 닫힌 철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어떤 존재가 나타나 그 철문을 아주 손쉽게 넘나든 엄청난 일이 생겼다! 그 존재는 바로 ‘공지’라는 어린이 강아지다. 공지는 10월 초, 누군가 천막 미사를 하는 곳 의자에 유기하고 간 아기 강아지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채 버려진 것으로 보였다. 강정에서 집을 찾은 공지는 이후 매일이 다르게 쑥쑥 크며 놀라움을 주지만 아직은 비교적 쪼끄맣고 아기 강아지 티가 난다.
공지는 매일 아침 해군기지 정문 앞 평화백배를 하는 시간에 산책을 하러 간다. 사람들이 백배를 하는 동안 공지는 혼자 여기도 갔다가, 저기도 갔다가 하며 자유로이 정문 앞을 누빈다. 그러던 순간! 공지는 철조망과 철장 사이를 건너 굳건히 닫혀있는 기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쫄래쫄래 돌아다니고 잠깐 앉아있기도 했다. 항상 눈에 쌍심지를 키고 활동가들을 바라보고 철저히 정문을 지키던 군인들조차도 이 작은 강아지를 어찌하지?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허둥지둥 당황했다. 그러는 새 공지는 다시 룰루랄라 활동가들 곁으로 돌아왔다. 누군가는 그저 아기 강아지가 벌인 놀랍고 웃긴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나는 공지를 보면서 새삼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공지는 동물의 몸으로 해군기지의 철조망과 철문, 다시 말해 ‘안보’라는 경계를 넘나듦으로써 ‘안보’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질문하게 만들었다.
공지는 동물의 몸으로 본디 우리 땅이었던 해군기지를 밟을 수 있었다. 출입을 막는 장애물을 거뜬히 넘고, 기지 안을 어슬렁거리며 구경도 하고 햇볕도 쐬었다. 마치 소풍을 즐기고 온 것 같다. 나는 자유로운 공지를 보며 생각했다. ‘안보’란 무엇일까. 분명 ‘안보’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래서 군 기지가 지어진 것인데, 왜 그 군 기지를 건설하느라 그곳에 살던 이들은 터전과 생계를 잃고 쫓겨나야 했을까? 공동체는 파괴되고 아름다운 환경은 몽땅 파헤쳐져야 할까? 심지어 우리는 다시 그 땅을 밟지도 못하게 된다. 그것이 정녕 안보일까? ‘인간’의 몸으로 나는 해군기지 정문의 틈 사이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공지는 작은 동물의 몸으로 쑥 해군기지의 경계를 발랄하게 넘나들었다. 그 몸짓은 나에게 중요한 진실을 알려주는 듯했다. 저곳은 우리 땅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억압이나 위협 없이 밟을 수 있는 땅이어야 한다고. 나는 지금 동물의 몸으로 그 진실을 확인하고 왔다고. 그렇게 공지는 동물의 몸으로 ‘안보’라는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흔들어버림으로써 ‘안보’가 가지고 있었던 의미를 다시 고찰하게 만들었다. 날카로운 철조망과 굳건한 바리케이드로 재현되는 ‘안보’라는 경계의 의미없음과 군 기지는 역시 ‘안보’가 아니라 ‘전쟁’을 위한 곳임을 일깨웠다.
이번 사건을 통해 나는 동물의 몸이 우리 사회에서 정해둔 많은 경계를 넘나드는 사례들을 떠올려보았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에 앞서 우리가 가진 굳은 고정관념을 상기시키고 싶다. 바로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는 생각. 이는 동물을 향한 많은 부조리를 정당화시킨다. 이 기원은 서양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가 주장한 동물 기계론에 있다. 그에 따르면 동물은 기계와도 같으며 감정이 없고, 사고를 전혀 할 수 없다. 동물이 내는 고통스러운 신음조차 그저 기계가 내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이 낡고 낡은 사고방식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개는 개니까”, “개가 무슨 가족이야”, “개와 무슨 감정 교류를 해, 개를 저렇게까지 사랑해?”, “개가 묶여 있거나 방치되어 있는 게 왜 문제야” 등등... 예시로 나온 개뿐만이 아니라 고양이 그리고 지금도 공장식 축산이나 실험관, 수족관, 동물원에 갇혀있는 무수히 많은 동물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나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본 이는 알 것이다. 동물은 기계가 아니라는 것을. 동물 또한 똑똑하고 감정 교류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들 또한 건강하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는 것을. 더 나아가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계’가 아닌 ‘동물’의 몸과 함께 살면서 그 사실을 명징하게 느낄 수 있다. 나도 동물로서 함께 사는 동물과 끈끈한 가족이라는 감각을 배웠고, 우리가 사랑과 애정과 기쁨을 주고받는 사이이며, 고통과 슬픔도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배움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 곁에 비인간 동물 덕에 우리는 그동안 인간의 것이라고만,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개념의 지평을 확장하게 된다. 동물도 가족이 될 수 있다. 동물과도 애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동물도 고통을 느끼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다. 동물의 몸이 되어 이 사실들을 깨닫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논리도 없이 타당하고 믿었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거나,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살고 싶다’는 당연한 진실을 새삼스럽게, 경이롭게 알아차린다. 동물의 몸은 특정 개념이나 행동 양식의 경계를 넘나든다. 휘젓는다. 때로는 그 경계를 견고하게 만든 개념의 의미나 사회적 구조를 다시 고민하게 만들면서 경계 자체를 희미하게 만든다.
나는 동물의 몸을 가진 공지의 움직임에서 ‘안보’라는 개념을 비판적으로 성찰해보았다. 우리 집 반려견 뽀리와 함께 살면서 ‘가족’이라는 개념을 확장시켰다. 도살장으로 가는 차에 실려 고통스러워하는 소, 돼지, 닭을 보며 ‘이(異)종’이라는 개념을 아프게 느꼈다. 공장식 축산, 동물원 등에 갇혀 사는 동물을 보며 고통과 슬픔, 기쁨을 느끼는 대상이 인간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깨달으며 ‘감정’이라는 개념을 데카르트와 반대의 방식으로 재정의했다. 동물의 몸을 목격하며, 동물의 몸을 경유하여, 혹은 동물의 몸으로 나는 무수히 많은 경계를 재설정하거나 파기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읽는 이들도 동물의 몸이 우리 일상에서 혹은 사회에서 어떤 경계를 넘나드는지 떠올려보면 좋겠다. 쉽게는 일상 속에서 동물의 몸이 나의 사고와 행동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돌아보면 될 것이다. 동물과 만나고 소통하고, 동물의 몸을 경유하는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개념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가. 어떤 경계를 넘고, 확장하고, 허물게 만드는가.
동물의 몸으로 00라는 경계 넘나들기
00안에 어떤 단어가 들어갈 수 있을까? 사랑, 가족, 고통, 기쁨, 종차별, 안보... 그 어떤 단어도 가능할 수 있다. 빈칸에 또 무엇이 들어갈 수 있을지 상상해보길 바란다. 더불어 이와 같이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은 우리의 삶, 공동체와 사회, 더 나아가 지구 생태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고 싶다. 종을 둘러싼 오래된, 차별적인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인간에만 한정되었던 개념을 확장시키는 데서 오는 긍정적인 잠재력을 기대해 본다.
글쓴이: 토란
책에 파묻혀 사는 비건 퀴어 에코 페미니스트.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비건맛집을 탐방하고 사람들과 떠드는 것을 사랑합니다. 2년 전 가족이 되어준 뽀리와 동네에 묶여 사는 개 쫄랑이, 똘이와 매일 산책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 행복하고 존중 받는 지구를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