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삶이 나의 삶과 겹치게 되는 확률이, 이 넓은 우주에서 얼마나 희박한 가능성으로 일어나는지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지금도 팽창하고 있는 우주. 지금도 셀수없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생명들. 늘어나고 있는 시공간 속 어느 한 시점. 한 공간. 한 존재로서의 우리가 서로를 알아차리고 관계맺었다는 것이. 그렇게 서로의 삶이라는 궤도에 도착해 조금씩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도 지독한 확률에 의한 것이었는지. 유독 밤하늘 별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이 거대한 감각에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오늘 할 이야기는, 그렇게 서로의 삶이 겹치는 확률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 볼 수 있는 금실같은 기회를 주었던. 반려 동물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억들을 풀어보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제대로 애도되지 못했던 반려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해씨별로 날아가는 미사일 , 배수로에 떠내려간 금붕어
반려동물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모두 제대로 된 애도와 그리움으로 완성되어 아름답게 추억될만한 것이었다면 정말로 좋았으리라. 처음 조심스럽지만 과감한 이 주제를 선정하고자 마음먹게 된 계기는, 일반쓰레기봉투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가 문득 스친 기억이 정전기처럼 마음에서 좀처럼 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쓰레기 대신 봉투에 가득 채워진 해바라기씨와 각종 견과류, 톱밥. 예쁜 보석 스티커와 형형색색 싸인펜으로 빼곡한 편지가 쓰여져 한눈에 보기에 범상치 않아진 일반쓰레기봉투는 전봇대 옆에 고이 놓여졌다. 그 속에는 손바닥만한 보석상자가 있고, 그 상자 안에는 절친한 언니가 사랑하는 반려 햄스터가 잠들어있었다.
햄스터의 경우에도 장례절차를 밟을 수 있지만 한명을 위한 화장은 좀처럼 해주지 않아 여러명을 모아 합동 화장을 기다려야 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합동 화장의 경우 뼛가루가 섞여 화장을 하는 의미가 퇴색되었기에 좀처럼 함께하는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 그래서 땅에 묻어주는 방법을 택하려 했으나, 그야말로 서울 도시 한복판.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는 모두 아스팔트로 뒤덮인 곳에서는 조그만 햄스터를 묻을 마땅한 화단 한구석조차 찾기 어려웠다. 그렇게 한참을 서치한 끝에 우리는 법적으로 햄스터 사체는 일반쓰레기라는. 너무나 차가워 마음을 데어버릴 것 같은 현실 앞에 옴짝달싹 못하게 놓여버렸고. 한참을 침묵했지만 할 수 있는 선택이 없었다.
언니는 많이 울었지만 결심을 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마치 햄스터가 우주여행을 하는 것처럼 그 형형색색의 스티커와 편지가 달라붙어 화려해진 쓰레기봉투 미사일이 사랑하는 햄스터를 안전히 해씨별로 보내줬을 거라고 믿어야 했다. 그때의 기억이 일반쓰레기 봉투와 함께 둥실 떠올랐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는 길. 그때 그 햄스터는 무사히 해씨별에 도착했을까- 짐작하는 동안, 그 생각의 꼬리를 물고 멀리서 물살이 한명이 헤엄쳐왔다.
그것은 미처 애도해주지 못한 나의 반려 존재. 내가 아주 어릴적 데려온 검은 툭눈금붕어였다.
나는 어릴적에는 물살이를 정말정말 좋아했다. 물속에 들어가면 겁이나서 눈을 뜰수조차 없는 나에 비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니. 뻐끔뻐끔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하고, 흩날리는 지느러미가 아름다워 하루종일 보고있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잘’ 돌보는 법은 영 몰랐기에, 그들이 먹이를 너무 많이 먹어 배가 터져 죽거나 서로 잡아먹어 죽어버리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일이 잦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죽은 이들을 마주할때면 좀처럼 물살이도 엄연히 살아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하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겁먹은 얼굴로 어항을 가리켰다. 그러면 아버지는 손쉽게 숨을 거둔 이들을 내 눈앞에서 치워주곤 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툭눈금붕어가 기억나는 이유는, 아버지가 그를 변기에 버리던 순간이 충격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때 아버지는 ‘앞으로는 이런건 네가 알아서 하라’ 며 그를 무심하게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리셨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죽은 물살이를 어떻게 ‘처리’해왔는지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헛것인지 몰라도 다시 솟아올라오던 변깃물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파닥거리던 모습을 본 것도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처절하고, 안타깝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해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눈을 감아도 자꾸 보이는 툭눈금붕어의 마지막 모습 때문에 그 이후로는 어항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어항은 물론이고, 내가 변기에 앉을 때마다 다시 그 툭눈금붕어가 솟아 올라올 것만 같아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 아버지께는 혼이 났다. 이럴거면 왜 금붕어를 사다달라고 했냐고.
이후로도 쭉, 나는 툭눈금붕어를 생각하면 이런 스스로의 공포감과 죄책감에 뒤덮여버릴 뿐이었다. 그날 배수로를 타고 떠내려간 금붕어는 내내 애도의 대상으로서는 한번도 기억되지 못한 채 마음 한켠에서 축축하게 남아있었다.
어떤 죽음들을 쓰레기통에 쳐박아두고 살아갈 수 있는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죄책감과 공포스러움에 사진조차 제대로 검색해보지 못하는 툭눈금붕어가 햄스터와 함께 생각이 난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세상이 규정해둔 ‘애도’의 테두리에서 튕겨난 존재들이었기 때문일테다. ‘관상용’ 으로 팔리고, ‘애완용’ 으로 팔리는 존재였던 소동물들의 목숨은 그들 몸의 크기가 인간의 것보다 월등하게 작다는 이유로 그 죽음의 무게까지 가볍게 취급되어야 했다. 변기물에 내려지고, 쓰레기 소각장에서 태워지는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에 오래 머물러 생각한다. 당신 삶의 마지막이, ‘오물’이자 ‘쓰레기’로 분류되어야 했던 억울함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비인간동물의 죽음이 애도의 대상이 되지 않고 늘 그저 ‘민원’의 대상. ‘처리’ 의 대상으로만 실현되고 있는 것은 꼭 소동물의 예 뿐만이 아니었다. 로드킬당한 동물들이 쓰레기봉투에 담겨져 청소노동자들에 의해 처리되는 풍경, 축산동물들의 사체는 판매되어 먹히는 풍경이 뇌리에 스쳐간다.
10만원에서 20만원가량의 돈을 주고,쉼터에서 생을 마감한 고양이의 장례를 치러 준 적이 있다. 로드킬 당한 고양이를 발견해 숲에서 애도의 노래를 부르며 정성스레 무덤을 만들어준 적이 있다. 그들의 죽음이 다른 애도받지 못한 동물들의 죽음에 비해 귀해서 그랬느냐고 하면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모든 죽음에 대해 애도의 절차를 밟아 줄 수 없는 시스템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순간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한 것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죽음을 애도해줄 수 없다고 해서 손놓고 무기력에 빠질 수는 없다. 그것은 더 많은 죽음들을 변깃물과 쓰레기 소각로에, 곧 망각의 회로에 몰아넣어 버리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쓰레기’가 되어야 했던 햄스터와 금붕어의 수만큼, 질문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계속해서 느낀다. 그 죽음들이, 그 삶들이 정말 쓰레기 통에, 변기 통에 버려져야 할만한 것이라고 느끼는지. 삶의 일부분이 되고자 ‘반려’의 이름을 붙이고 ‘판매’되는 존재들이 왜 생명을 잃자마자 일반쓰레기에 버려져여만 하는 것인지.
존재로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너무 쉽게 우스워져버리고, 이익을 위하여 무자비하게 착취되고 희생되는 사회다. 누구에게나 자신으로서 살아가고 죽임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기에, 진정한 애도를 위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
(해씨별 : 해바라기씨 별이라는 뜻. 햄스터 반려인들이 상상하는 햄스터가 숨을 거두면 가는 곳.)
글쓴이: 달연
이것저것 해방운동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삶에 확신이 없어 자기소개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밴드 낯선무화과와 타투 작업을 겸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