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지 않기를 선택했다
그녀는 말했다.
“저는요…
화가 나지 않아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아니요.
정확히 말하면
화가 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투는 담담했다.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사실을 보고하듯 조용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말한다.
차분하다, 어른스럽다, 강하다.
그 말들은 늘 긍정의 언어였고,
그녀는 그 언어 안에서 오래 살아왔다.
그녀에게 감정은
느끼는 순간마다
무언가를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배웠다.
느끼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그 선택은 의식적이지 않았다.
어릴 때 몸이 먼저 익힌 방식이었다.
슬픔이 올라오기 직전,
분노가 스치기 직전,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멈춰.'
이 방식은 놀랍도록 잘 작동했다.
그녀는 문제를 만들지 않았고,
누군가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이해하는 쪽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살아남았고,
어른이 되었고,
사회 안에서 잘 기능했다.
그래서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녀 자신이 있느냐고.
그런데 요즘 그녀는
우울하다.
이 우울은
울음으로 오지 않는다.
분명한 슬픔의 이유도 없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조금 더 무겁고,
하루를 시작할 이유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는 말했다.
“회사도, 관계도, 생활도
문제없어요.
정말 아무 일도 없는데요...”
그러다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근데…
사는 게 재미가 없어요.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잘 안 느껴져요.”
그녀의 우울은
상실을 애도하는 우울도 아니고,
자기를 비난하는 우울도 아니다.
그 우울은
텅 빈 느낌에 가깝다.
해야 할 일을 해도 채워지지 않고,
바쁘게 움직여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녀는 말했다.
“제가 뭘 좋아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좋아했던 게…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감정을 끊어냈던 그 능력은
위기를 넘기기에는 탁월했지만,
그 대가로
의미와 욕망,
살아 있음의 감각까지
함께 희미해졌다.
그녀는 자신을 미워하지도,
학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조용한 자기 공격이다.
자기를 죽이지는 않되,
자기 안에서
살아 움직이던 부분을
하나씩 꺼버리는 방식의 공격.
어쩌면,
그녀의 우울과 공허는
무너짐이 아니라
신호일지 모른다.
이제는
느끼지 않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신호.
나는
아주 오래전,
느끼는 것이 위험했던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당신이 감정을 잃어버린 것은
차갑기 때문도,
약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시간이
당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