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게으르게
약속도 없고 계획도 없어서 느지막이 일어났다. 12시가 다 되어 아침겸 점심을 먹었다. 요즘 부쩍 살이 붙어서 식단관리를 하기로 했다. 엊그제 주문한 몸에좋은 곡물과 약간의 소스를 곁들인 샐러드를 먹었다. 그러곤 하릴없이 방과 주방을 오갔다. 침대 위치를 바꿀까 책상을 저 쪽으로 놓을까. 크지도 않은 집에서 바꾸고 싶은 건 뭐 그리도 많은지 머릿속에 여러 버전의 구조도가 그려졌다. 그러다 막대걸레를 들고 바닥을 한 번 닦곤 침대위에 풀썩 앉았다. 오늘은 하지 말자. 창밖의 하늘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었다. 가만히 앉아 나갈까 말까 나가면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씻고 나왔는데 좀 더웠다. 선풍기 앞에 앉아 머리를 말리며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한올 씩 주웠다. 그렇게 또 한 시간이 지났다. 시간을 마구 낭비하는 중이었다. 네 시가 넘어서야 조정경기장에 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하늘이 저렇게 예쁜데 콧바람이라도 쐬야지. 치킨을 사 갈까. 마침 어제 네고왕에서 치킨 네고를 했다. 구운치킨 브랜드가 반값 내고를 했다. 이럴거면 아침에 샐러드는 왜 먹은거지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구운거잖아. 구운치킨은 살 안쪄... 배달앱에서 주문하고 방문픽업하면 되는데. 하. 집 근처에 매장이 없었다. 집주소를 매장이 있는 동네로 설정을하고 주문하려는데 화면에 '품절되었습니다'란 문구만 동동 떴다. 의지의 한국인답게 동네 타 브랜드 치킨집에 주문을했다.
30분 후에 치킨을 픽업해 조정경기장에 갔다. 다들 외곽으로 떠난건지 휴일치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잔디에 깔린 돗자리 간격이 멀찍해서 거리두기가 잘 되어있었다. 잔디밭 한 구석에 나도 돗자리를 깔았다. 미니 테이블을 펴고 치킨 박스를 올렸다. 다리를 테이블 밑으로 쭉 뻗고 앉았다. 오른쪽 전방 45도 앞쪽에선 열살정도의 딸아이와 아빠가 공놀이를 했다. 왼쪽 200m거리에선 아빠와 아들이 연을 날렸다. 그 뒤 나와 대각선방향에선 남남여여 커플이 캠핑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웃고 떠드는중이었다. 나는 홀로 치킨을 뜯었다. 하늘이 아름다워서 한 입,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행복해 보여서 한 입, 외로워서 또 한 입. 지금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면 1열에서 나홀로 먹방 관찰을 할 수 있는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났다.
치킨을 세 조각 남겼다. 평소 일인 일닭 주창자로써 자존심이 조금 상했지만 욕심만큼 사이즈가 크지않은 위사이즈를 인정하기로 했다. 치킨 박스를 고이접어 두곤 돗자리 위에 누웠다. 부쩍 서늘해진 바람이 콧등을 간질였다. 하늘은 파랗고 배는 부르고. 잠깐 멍하니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출입통제 시간이 15분 남았다.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열어 노래를 틀었다. 영화 라라랜드의 OST 'Another day of sun'과 태연의 Weekend. 최대한 게으르게 보낸 하루의 완벽한 마무리였다.
집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