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도 잘 걸으면 더 많은 걸 볼 수 있다 - 2
부른 배를 소화시키겠다며 무작정 버스터미널 반대로 걸었던 나.
지도에서 눈에 띄는 장소 하나를 대충 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안내해주는 길을 그대로 따르지도 않았다. 눈에 보이는 골목이 좋아보이면 들어가보고, 또다시 나오고. 방향만 잘 잡으면 세상 모든 길은 연결되어 있어 잘못된 곳으로 갈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신념처럼 여행이 흘러갔다.
계속 등장하는 하얀 벽에 아기자기한 꽃이 걸려있는, 여느 스페인 남부 고지대의 흔한 마을. 그렇지만 특별한 날이어서 그런지 이 마을 자체가 나에게 주는 감정은 어딘가 달랐다. 불안감, 설렘, 호기심 등 복합적으로 섞인 감정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끼리 모여 노는 일이 많은 때인 만큼 스스로가 낯선 이방인처럼 느껴져서였을까.
한 걸음 한 걸음. 오래 걷기엔 조금은 따스하다 못해 더운 날씨. 계속 비슷한 풍경이 이어지는데도 그런 날씨 속에서 이상하게 지치지도 않았다. 호기심에 한 걸음씩 더 깊숙이 들어갔다.
어느 지점에서 불쑥 모여 있는 무리들이 보이고, 또 사라지고. 아르코스라는 이 마을이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자꾸 생기게 만들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외곽으로 나온 시점, 좁은 골목임에도 빵빵 클락션을 울리며 빠르게 달리는 차들에 놀라 목적지를 확실하게 잡았다.
구글맵에서 버스터미널 기준으로 반대편 어딘가에 있는 핀을 골랐다. 사진을 얼핏 보니 파란 하늘 아래 절벽이 놓인 것이, 꽤나 아름다웠다. 여기에서 놓친 맹점 하나. 구글맵은 소요시간을 알려줄 뿐, 고도차까지 알려주진 않는다. 그렇게 나는 처음 의도와는 달리 머나먼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그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존하며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 아르코스 마을 가장 밑이었다.
절벽 위를 바라보며 돌아가는 길이 막막해 다시 숙소 있는 마을로 가는 방법을 찾아보려 했으나, 온 길을 되돌아 올라가는 것뿐이란 걸 알곤 그 현실에 조금 암담하긴 했지만, 흔히 뚜벅이가 볼 만한 풍경은 아니었던지라 전혀 후회되지 않았다.
고지대 마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빠져나와 그 마을의 전경까지 모두 챙겨봤다는 것이 이 마을 여행기를 완벽하게 끝맺어주는 듯해서. 지나가는 현지인조차 드문 조용한 마을을 유유히 걸어가는 그 길과 그 시간이 유독 나를 외롭게 만들었지만, 그래서인지 주변의 기억이 더 선명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친 나에게 잠깐의 도파민도 있었다.
다른 골목도 둘러보려 가장 큰 골목 옆의 길로 들어섰는데, 부활절 행사를 준비하는지 동네 주민들이 모여 행사 복장을 입고 줄을 서 있었다. 근처 사는 주민들이 나와 구경하고 있길래 함께 서서 보고 있다가, 헤레스로 돌아가는 버스가 끊길까 봐 조심스레 지나가려 했는데, 갑자기 그들이 "Correr!!!" 이러면서 쫓아왔다.
Correr는 달리란 말이다. 잔뜩 소심하게 웅크려든 채 지나가니 오히려 그들이 유쾌하게 분위기를 풀었다. 온몸을 감싸던 고요함이 갑작스레 깨진 순간이었다.
인포메이션조차도 없어 버스 기사가 다른 버스 정보를 알려주고, 오는 버스마다 직접 물어서 타야하는 아날로그 시스템이 깊이 묻어있는 작디작은 버스터미널이 있는 시골 마을. 부활절 주간 성 목요일이었던 탓에 걱정으로 시작한 당일치기 여행이었지만, 덕분에 마을에서의 여행이 보다 더 특별해졌다. 평일에 방문하면 또 다른 관광객 또는 현지인으로 붐비는 시끌벅적한 곳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나에게 아르코스란 곳은 고요함, 평온함이 깊게 물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