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기. 소도시에서 할 게 무엇이 있다고 오래 머물까?
나는 여행체력이 좋지만, 쉼이 중요한 사람이다.
몰랐다. 여행을 몇 차례 할 때까진.
'여행 며칠 만에 지쳤다.', '여행도 힘들던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다. 그럴만하지. 힐링인지 훈련인지 의문이 들 만큼 일정이 가득 찬 여행을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단기 여행이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다수가 장기간 여행에선 심신이 지쳐버린 나를 발견할 것이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걷고, 늦게까지 놀다 자고. 짧은 기간에 봐야 할 건 많은 빡빡한 여행. 나 역시도 이런 사람 중 하나였다. 무려 장기여행을 그렇게 했을 만큼 욕심이 많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엄마가 대단하다. 49일을 그 큰 캐리어를 끌고 무려 서른 살이나 어린 나를 쫓아 약 2-3일에 한 번씩 장소를 옮기는 여행을 했으니까. 몇 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그 일정을 다시 소화하라면 혀를 내두를 거다. 비슷한 기간 동안 머물더라도, 하루의 일정을 보다 더 여유롭게 할애하지 않을까 싶다.
왜 숙박을 길게 하게 되었는가?
혼자 여행을 하면서부터 숙박을 길게 하기 시작했다. 남들은 당일치기하는 소도시에서 3박 정도 머무는 건 기본. 이 여행에서 나는 깨우쳤다. 한 곳에 오래 짐을 두고 주변을 둘러보는 게 더 체력적으로 효율적이고 그게 나에게 맞는 여행이라고.
#헤레스
가장 영향을 줬던 것은 바로 이 결정이었다. 원래는 아르코스 데라 프론테라 2박, 카디스 2박을 잡았다가, 방향을 틀어 중간 지점인 헤레스에 5박으로 새로 잡고, 두 개의 지역을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여행 기간 중 가장 잘 내린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은근히 짐을 풀고 싸는 게 익숙해졌다고 해도 여행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큰 일이더라. 당일치기로도 충분하게 둘러볼 수 있는 소도시가 주변에 많다면, 그 중심을 찾아 숙소를 잡는 것도 방법이었다.
#말라가
한 곳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에 확신을 준 건, 두 번째 방문이었던 여행지들. 특히 말라가의 경우, 숙소 주변부터 낯설었다. 이전에 여행했을 땐 2박을 머물며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극히 일부만 보았던 것. 장기 여행에서 2박 3일이라 함은 사실 시간이 정말 없는 것이더라. 첫째 날과 마지막날 이동하는 것을 고려하면, 실질적 기간은 약 이틀인데, 그마저도 나는 하루를 근교에 썼다. 잘못된 시간 할애를 하고 일명 '찍먹' 여행을 했던 것이다.
두 번째지만 나는 말라가에 4박을 있었다. 할 일이 없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잡았던 기간이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추억을 남겼고, '별 거 없지만 숙소만 좋았던 곳'이란 인상에서 '바다가 아름답고 다채로운 매력이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벤치에 앉아서, 바다에 앉아서, 하물며 숙소에 앉아서, 세상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라는 게 참 중요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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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시에서 3박, 길지 않냐고?
#론다
대표적인 당일치기 장소에 3박을 머물렀다니. 왜 그랬을까?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할 건 없다. 특히, 누에보 다리가 전부인 론다에선 매일 그것만 보고 있었으니까. 첫째 날은 처음이니까, 둘째 날은 좋았으니까, 셋째 날은 지나가는 김에. 그렇게 매일 봐도 그곳에서의 기억은 좋았다. 어찌 보면 질릴 때쯤 잘 떠나지 않았나 싶다.
덕분에 무엇보다 특별한 경험 몇 가지 했다. 이게 그 가치다. 나는 여기서 진정한 장기여행의 의미를 느꼈다. 무작정 1시간을 걷다가 현지인들만 가득한 거주구역에서 여행 중 어디서도 볼 수 없던 진정한 론다식 식사를 하고, 메뉴판도 없는 추로스 가게에서 출근하는 현지인들 사이에서 먹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에보 다리의 밤을 보고. 그 지역을 누구보다도 제대로 탐험하고 더 잘 알게 된 기분을 강하게 받았다.
숙소 조식이 매일 복사-붙여 넣기 한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게 나왔던 점만 제외하면, 론다에서의 3박은 후회는 없고 엄청난 여행의 의미만 안겨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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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레스
앞서 언급했던 5박을 머문 헤레스에서도 다양한 근교 여행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도 특별한 일이 있었다. 새벽에 진행되는 부활절 기간 성금요일의 행사. 낮에 내내 하던 행사를 성금요일에는 새벽까지 이어 크게 진행한다. 부활절 행사가 가장 큰 스페인 전역 곳곳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진풍경 (특히 안달루시아 지방이 큰 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그날을 기리는 사람들의 경건한 행렬을 보며 조금이나마 기독 국가에 대해 알아갔다. 이곳에 머무는 5박 내내 관련 행사들을 보며 현지인들만큼 일종의 축제를 깊게 즐길 수 있었다.
#알리칸테
이러한 부분 외에도 알리칸테에서도 여유로운 일정의 덕을 보기도 했다. 도시의 규모는 조금 있는 편이지만, 바닷가 구경 외에는 할 일이 많지 않은 곳. 평범한 여행 일상이었다면 숙소에서 시간을 종일 보내도 되었을 만큼의 여유로운 일정이었다. 한국 장마철처럼 매일같이 비가 오는 덕에 마트에서 장만 보고 숙소에서 종일 뒹굴거리기도 해 봤다. 코로나에 걸린 탓에 휴식을 가진 것도 있었지만, 여행 중 숙소에만 갇혀 어디에도 가지 않고 종일 유튜브 세상에 빠져 있어 본 게 처음이었다.
호캉스가 아닌 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건, 나에겐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장기여행에선 필수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욕심을 잠시 내려놓고 현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고 하나의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이때 처음 배우지 않았을까.
이제는 단기든 장기든 일정을 하루의 여유라도 고려하면서 잡는다. 많이 둘러보는 것이 예전만큼 중요치 않다. 한 곳을 둘러보아도 그곳의 문화, 역사 등 더 깊이 알아가는 게 나의 여행의 가치다. 여행지에 따라 지루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도 기억 깊은 곳에 남아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