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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EON Mar 07. 2023

37화 "어제와 오늘 사이에 만나게 되어서 미안해."

그해 여름의 추억들이 모래알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다.

바닥과 닿은 발바닥이 서걱거린다. 쩍쩍 묻어나는 것 같던 여름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발을 디딜 때마다 서걱서걱, 그해 여름의 추억들이 모래알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다. 낡은 미닫이문을 양쪽으로 열어젖히자, 차가운 공기가 확 밀려든다. 겨울 냄새가 묻어나는 바람.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꾸준히 그해 여름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슬프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나는 회색빛 초겨울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그해 여름의 마지막 날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십 년도 넘게 학교란 곳을 다녔지만, 개학날 아침은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아, 엄마도 나도 아침부터 무척이나 부산했다. 마음이 급해진 내가 도망치듯 현관으로 쫓아나가 문을 열어젖혔을 때 이미 그것들은 그곳에 있었다.


“무슨 소리니?”


둔탁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에 놀란 엄마가 현관으로 다가왔고 나는 고개를 내밀어 그것들을 발견했다. 나는 단번에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차렸지만, 그게 뭐냐고 묻는 엄마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다.


“누가 이런 걸 여기다 둔 거지?”


내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엄마는 그것들이 누군가의 실수라고 완전히 판단 내린 모양이었다. 나는 차분한 눈길로 그것들을 훑어보았다. 커다란 종이봉투 안에는 작은 화분 하나와 낡은 DVD가 살며시 들어앉아있었다.


“내 거야.”


그것들은 낯익은 것들이었고 그것들의 주인 또한 알고 있다. 다만 나는 그것들이 왜 우리 집 앞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슴속에서 불길한 파도가 일었지만, 나는 애써 무덤덤한 척 외면했다.


“그러니?”


엄마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는 걸 느꼈다. 더 이상 지체하다간, 엄마의 문책과 지각을 동시에 경험하게 될 터였다. 나는 서둘러 종이봉투를 엄마에게 건넸다.


“친구가 잠깐 맡긴다고 했어. 건드리지 말아요.”

“친구? 누구?”

“엄마, 나 지각해. 나중에 이야기해.”


도망치듯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가다 나는 돌아섰다.


“잠시만.”


나는 엄마의 눈을 피해 얼른 ‘윤후’라고 적힌 이름표를 화분에서 뽑은 후 DVD와 함께 봉투에서 꺼냈다.


“잘 다녀와, 딸.”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웃 아주머니를 만났다. 몇 층에 사는 아주머니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곧잘 마주치곤 했던 터라 꾸벅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연신 덥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혼잣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는 우리를 지상에 토해냈고 나는 이럴 때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하는지 몰라 또 머뭇거렸다.


“잘 다녀오렴.”


아주머니는 총총걸음으로 나를 앞섰다. 8월의 마지막 날, 그리고 그날은 그해 여름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햇살 속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을 때 이미 여름은 마지막 온 힘을 다해 대지를 달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기다려 탄 버스는 만원에 가까웠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내 몸은 튕겨나갈 듯 요동쳤고 마음은 이미 튕겨나간 지 오래였다.


학교에 가면 그 아이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다행히 함께 듣는 수업은 없었지만, 어차피 학교 안은 그리 넓은 세상인 못된다. 좋든 싫든 나는 수진이와 마주치게 될 것이고, 연주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상대방을 대해야 하는 걸까? 아마 재인 선배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안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고 나를 나무랐을 테지만.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버스는 점점 더 가득 찼다. 남자는 어째서 그걸 우리 집 앞에 두고 간 걸까? 마치 남의 집 앞에 갓난아기를 버리듯. 나는 초조했다. 그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수업이 마치고 카페에 들러야지. 초조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버스는 더욱 느리게 움직였다. 아니,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떠밀리듯 버스에서 내렸을 때 신선한 아침 공기가 폐 속 깊숙이 빨려 들었다. 아, 좋다.


강의실로 가는 길에서 나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답장이 없었다.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보다 나는 당장 눈앞에 한 고비를 앞두고 있었다. 강의실 문은 활짝 열려있었는데 그 틈으로 시끌벅적한 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모두가 밝고 명랑한 공간, 이제부터 줄곧 혼자일 내가 그 공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 그래, 당당하게 들어가자. 나는 용기를 내, 강의실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하지만 내 각오가 무색하게, 강의실 안의 누구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돌아보긴 했지만, 누구 하나 아는 체를 해오지는 않았다. 나는 창가 쪽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로 혼자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나처럼 창가나 복도 쪽에 앉아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있거나 책을 읽거나 또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외딴섬들. 그리고 강단 쪽에 옹기종기 무리를 지어 앉은 아이들은 시끄럽게 수다를 생산해내고 있었다.


“그게 정말이야? 어머, 세상에.”

“그렇게 안 봤는데, 역시 사람은 모를 일이야.”


방학 동안 서로가 겪은, 혹은 알게 된 이야기들을 신나게 풀어놓는 아이들 중 몇몇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연주를 잘 따라서 몇 번인가 함께 밥을 사주기도 했던 적이 있는 후배들이었다. 나도 지난 학기까지는 개강하는 날은 한때 친구였던 아이들과 그간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때 친구였던 아이들과.


“그래서 연주 선배가-”


낯익은 이름이 귓가에 날아와 박힌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내 귀는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럼 왕자님은 이제 솔로인 건가?”

“꿈 깨, 전 여자 친구가 무려 연주 선배거든?”

“얘는, 꿈도 못 꾸니?”


그리곤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웃었지만,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전 여자 친구가 무려 연주. 그 말이 여러 가지 의미로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나는 얼굴을 푹, 숙였다. 저 아이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연주와 함께 있지 않으면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선배들 중 하나였다. 휴대폰을 보았다. 수업 시작 3분 전. 그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다.


“자, 여러분, 여름 방학은 잘 보냈나요?”


어느새 강의실에 들어선 교수님의 한 마디에 소란스러움은 사그라졌다. 나도 고개를 들고 당당한 미소를 머금은 젊은 여교수님을 바라보았다.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교수님은 잠시 우리를 훑어보더니 대뜸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읊기 시작하셨다. 우아한 발음, 그리고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 나는 책상 위에 올려둔 DVD 케이스를 힐끗 보았다. Sunflower. 낡은 글자. 소피아 로렌의 얼굴에 손끝을 가져다 대자 희미한 온기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찰칵, 케이스를 열자 툭, 하고 종이 한 장이 떨어진다.


“여러분들의 여름이 이토록 아름답고 청명했길 바랍니다. 이번 학기 강의를 통해 여러분은 영미문학사의 저명한 시인들의 시와 그들의 삶에 대해서 배우게 될 겁니다.”


떨리는 손끝으로 그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카페 카운터에 있는 메모지였다. 그리고 한쪽에는 단정한 필체로 짧은 글이 적혀있었다.


“자, 여름을 노래했으니 이번에는 가을을 노래할 차례죠?”


어제와 오늘 사이에 만나게 되어서 미안해. 안녕.


“저는 가을 하면 이 시인이 생각납니다.”


안녕. 그 두 글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바로 존 키츠입니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존 키츠의 시를 읊으려던 교수님은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셨고 그 시선을 따라 사람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아뿔싸.


“죄, 죄송합니다. 가, 강의실을 잘못 찾은 거 같아요.”


나는 더듬더듬, 있는 힘을 다해 변명을 했다. 교수님은 놀란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그럼 어서 가요.”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사람들도 다시 앞을 보았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중엔 아까 그 후배들도 있었다. 나는 재빨리 짐을 챙겨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창피함과 불안함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젯밤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조금은 후련한 얼굴로 그는 “잘 자.”하고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안녕이라고 말하는 거야? 언젠가 그는 안녕이라는 말이 영원한 이별의 순간에나 하는 말 같아서 싫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흘러가듯 한 말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고, 또 그 당시에는 그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탓에 나는 방금 전까지 그 말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안녕.

어제와 오늘 사이에 만나게 되어서 미안해. 안녕.


그 메모는 모든 것의 답을 가리키고 있었다. 안녕, 그가 남긴 종이봉투, 나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들. 하지만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 거지? 이제야 겨우 서로 좋아하게 되었는데!


나는 한산한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가자마자 곧장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카페로 향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은 계속해서 상냥한 여자의 음성으로 연결될 뿐이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안녕.”


그날의 일을 떠올려서일까, 방금 안녕이라는 말이 들린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안녕.”


멍하니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나는 다시 한번 들려온 안녕이란 말에 꿈을 꾸듯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싱긋, 웃는 두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 여긴 어떻게?”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로 나는 그를 향해 물었다. 나는 눈앞에 서있는 사람이 꿈이 아닌지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잠시 들어가도 돼?”


그가 물었다.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렸을 때 내가 처음 본 것은 뜯겨 나가고 있는 O‘nuel이란 글자였다. 이미 다른 글자들은 흔적만 남아있고 한 아저씨가 투박한 손으로 하얀 벽에서 와인색 O를 떼어내고 있었다.


“그건 이쪽으로 옮겨주세요.”


카페로 가까이 다가서자 분주하게 아저씨들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한 중년의 여자가 내가 좋아하는 통유리 뒤편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얼마 전 잠시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왔었던 중년의 여자.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이상한 질문을 해 내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그때 그 여자였다. 여자는 귀찮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뭐죠?”

“왜,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여자는 나를 훑어보더니 나를 알아본 듯 누그러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야기 못 들었어요?”

“무, 무슨 이야기를?”

“참 이상하네. 일은 참 깔끔하게 처리해 주더니.”


여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전에 있던 카페에서 일했던 사람 맞죠? 왜 일하는 사람한테 말을 안 했는지 모르겠지만, 급하게 내놓는 거라고 했어요. 외국에 오랫동안 나가 있을 거라고 하던가? 처음에는 아직 앳된 학생이라 미심쩍긴 했었지만, 아무 문제 없이 잘 넘겨주고 떠났어요.”


떠났다고, 그가?


“아무튼 그렇게 된 거예요. 어머, 아저씨, 그건 여기에 두시면 안 되죠.”


여자는 이제 해줄 수 있는 말은 모두 해줬다는 듯 내 곁을 떠났다. 그 분주한 공간 한복판에 나는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곳은 낯익은 곳이면서도 낯선 곳이었다. 책이 빼곡하게 꽂혀있던 책장은 사라지고 넓은 사각형 테이블 대신 작고 동그란 테이블들이 생겨났으며 푹신한 의자 대신 딱딱한 나무의자들이 옮겨졌다. 유리 앞에 햇살을 받으며 쑥쑥 자라나던 화분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고 벽에는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의 로고가 박혔다.


“사장님, 말씀하신 색상이 이거 맞습니까?”


사장님. 덥수룩한 수염에 살갗이 까맣게 그을린 산적 두목 같은 사장님은 이제 더 이상 사장님이 아니었다. 이곳의 사장님은 저 중년의 여성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와인색 O는 이제 완전히 제거된 후였다.


“잠깐만요.”


내가 마음에 걸렸는지 여자가 나를 쫓아 나왔다. 멍한 표정으로 눈앞의 사태를 보고 있는 내 손에 여자는 종이 쿠폰 여러 장을 쥐어주었다.


“오픈하면 와요. 그땐 내가 커피 대접할게요.”


나는 여자의 호의에 고맙다는 대꾸를 할 수 있는 정신이 아니었다. 여자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 서둘러 카페 안으로 사라졌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카페는, 그와 내가 있었고, 그와 그녀가 있었던 ‘오늘’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다아씨!”


나를 다시 현실로 끄집어낸 것은 낯익은 목소리였다. 눈을 뜨고 돌아보자 지혜 언니가 서있었다. 지혜 언니의 얼굴을 보자 나는 왈칵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다아씨, 왜 울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지혜 언니는 일단 나를 근처의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로 끌고 가 앉혔다. 그리곤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을 사서 내게 건넸다.


"일단 이거라도 좀 마셔 봐."




ⓒ Unsplash, Simon Takato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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