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YEON Mar 08. 2023

38화 안녕, 그해 여름

미처 깨닫지 못했을 때에도 소중했고, 너를 마음에 담게 된 지금도 소중해

“마실 만한 게 인스턴트커피뿐이라.”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잔을 조심스럽게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괜찮아. 앉아.”


멀뚱히 서있는 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나는 바닥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추웠는데 달콤한 걸 마시니까 좋네.”라며 웃는다.


“우리, 정말 오랜만이지?”


차마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지혜 언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야, 다아씨?”


하지만 언니는 애써 혼란스러움을 감추고 차분하고 다정하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도 어른이구나, 이 사람은.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니, 현이가 떠났어요.”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언니에게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두서없는 내 말을 한 번도 자르지 않고 조용히, 그리고 끝까지 들어주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라는 말로 이윽고 내가 횡설수설을 끝냈을 때 언니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영호씨한테 물어볼게, 그 사람은 뭔가 알고 있을 거야.”

“김영호 팀장님요?”

“친척이니까, 미리 뭐라도 말을 해놓았을 거야. 전화해 볼게.”


친척?


나는 대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뭐였을까? 아무것도 몰랐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냥 이렇게 카페가 사라지고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면 나는 그를 만날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다. 애초에 그란 사람이 존재하긴 했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사소했다.


“이쪽으로 오겠대.”


전화를 끊으며 언니가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이런 일로 다시 통화를 하게 될 줄이야, 기분이 참 묘하네.”


언니는 그렇게 말하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김영호 팀장님은 금방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왔다. 빵빵, 소리에 돌아보니 차 안에서 팀장님이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나와 지혜 언니는 좀비처럼 어기적거리며 그 차로 다가갔다.


“타.”


팀장님의 말에 지혜 언니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내가 먼저 타고 지혜 언니가 탔다. 우리는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있었다. 팀장님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듯했다. 팀장님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나와 처음 만났을 때조차 팀장님은 거침없이 말을 건네던 사람이었다.


“음, 다아씨, 많이 놀랐죠?”


이윽고 한참의 침묵 끝에 팀장님이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나도 갑작스러운 일이라.”하고 팀장님은 말끝을 흐렸다. 나는 차분히 팀장님의 이야기가 이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유학 이야기는 전부터 나온 이야기였어요. 고모 내외는 건축이라면 질색을 했지만, 현이를 그대로 두는 것보단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게 하도록 두는 게 차라리 나을 거란 판단을 내렸어요.”


작고 동그란 테이블을 앞에 두고 우리는 마주 앉았다. 긴 한숨과 긴 침묵이 우리 사이에 머물렀고 팀장님은 결국 입을 열었다.


“유정이가 그렇게 죽고 나서 그 녀석은 엉망진창이었으니까요. 그 족쇄 같은 카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예전부터 하고 싶다던 건축 공부를 하게 되면 그나마 제대로 살아볼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이 선생님도 나도 모처럼 한뜻을 모았어요. 우리 모두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를 품고.”


그는 딱히 좋고 싫다는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고 그의 부모님은 유학 준비를 했다. 처음, 그를 보내려던 곳은 미국이었다고 했다. 일단 당분간은 어학연수부터, 그 후에 입학을 하자고. 그렇게 이야기가 되어가던 중이었다.


“그래도 그 녀석, 파리로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땐 솔직히 충격이었어요. 파리, 그 녀석에겐 너무 힘든 곳일 텐데. 인상을 쓰면서도, 웃으면서 대답하더군요.”


이제는 그곳을 조금 견딜 수 있을 것도 같아요. 내가 사랑했던 아이가 마지막으로 생활했던 그곳에서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풍경들을 바라보고 싶어요. 아마 두 배로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두 배로 쉬울지도 몰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형.


어느 여름, 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한 소년이 빗속을 우산도 없이 걷고 있었다. 부모님과 크게 싸우고 무작정 뛰쳐나온 터라 휴대폰도 지갑도 없었다. 주머니에 든 지폐 몇 장과 며칠 전 친척 형이 쥐어준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문득, 그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메모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 버스를 타고 빗속을 걸어 그곳에 다다랐다.


그리고 빗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훌쩍이는 한 소녀를 발견했다. 그가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움찔거리자 그녀가 일어나서 소리쳤다. “뭐야?”라고. 초면에 반말로 소리를 지르며 노려보는 여자아이, 교복을 입고 있어 또래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소리를 치고도 그녀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가지고 있으면서 쓰지도 않던 우산을 불쑥 건넸다. 쓰고 가, 이거.


그는 몇 번이나, 사실은 몇 번이나 내게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정신이 팔려 그의 신호를 모른 척했다. 나는 결국 그 사람에게 달려가 고백을 했다. 윤현에게 나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이 진짜 사랑이든 아니든, 그에게 나는 아마 잃어버린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그곳을 찾아와 누군가의 인생에 첨벙 빠져든 또 다른 아이.


“다아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녀석은 오랜만에 들뜬 표정이었어요.”


소중했을까, 내가? 그 여자만큼이나 내가 너에게 소중한 존재일 수 있었을까? 결국엔 너무 늦게 마음을 깨달아버린 나라도 소중하게 생각했었던 거야?


“그래도 왜 아무 말도 없이, 이건 너무하잖아.”


팀장님이 온 후로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지혜 언니가 울상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나도 솔직히 다아씨가 아무 사실도 모르고 있을 줄은 몰랐어.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들, 나는 모르니까. 무언가 정리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도 없이 떠나다니.”


그 소년은 오늘 아침 비행기로 떠났다. 그는 지금쯤 어디를 날고 있을까? 저 멀리 중국의 끝 쯤? 아니면 더 멀리, 중동의 사막 위? 그는 어젯밤 내게 달콤한 목소리로 이별의 말을 속삭이고 새벽에 우리 집 앞에 마지막 선물을 남기고 아무도 모르게 파리로 떠났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낯선 이국의 땅으로.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두 분 다.”

“다아씨, 괜찮아?”

“네, 괜찮아요. 알고 나니까 후련하네요. 아까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나는 밝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팀장님, 저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어요. 그냥 모른 채로 떠났고 모른 채로 남았으니, 그냥 앞으로도 몰랐던 것처럼 살고 싶어요. 아마 윤현씨도 그걸 바랐으니 제게 아무 말도 없이 떠난 게 아닐까요?”


정말로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던 것처럼. 나는 태어나 그토록 완벽한 거짓 연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누가 봐도 나는 태연했고 담담했다. 그것이 내가 생애 첫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이 선생님과 통화를 했어요. 다아씨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만나보겠어요?”

“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없어요. 그저 그동안 일한 것에 비해 후한 돈을 쳐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만 꼭 전해주세요. 정말로 감사하다고, 꼭.”


그것이 그에 대한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나는 그렇게 그 이상한 나라를 빠져나왔다. 그해 여름, 돌연히 불시착한 이상한 나라. 그곳은 내가 사는 나라와는 달라서 신기하고 달콤하면서도 한편으론 항상 불안했다. 그곳의 사람들은 아름다웠고 외로웠고 슬펐다. 그래서 나는 발을 딛고 서지 못하고 둥실둥실 떠다니는 기분이었지만 이제는 괜찮아, 나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왔으니. 이곳은 평범하면서도 지루하고 그러면서도 따뜻한 곳.


안녕, 그해 여름.

안녕, 윤현.




“잠깐 나가서 걸을래? 공기가 참 좋더라.”


그는 달디 단 커피 한 잔을 비웠고 나는 긴 침묵을 지켰다. 그의 말에 나는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디건을 걸쳐 입고 그를 따라나섰다. 차갑지만, 그래서 신선한 공기가 훅 밀려들었다.


“바람이 계절마다 다른 냄새를 가지고 있는 거 알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흥얼거리듯 말한다.


“겨울은 볏짚 타는 냄새 같은 게 나. 그래서 이렇게 공기를 들이마시면 아, 겨울이 오려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돼.”


나는 그를 따라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정말로 볏짚 타는 냄새가 코끝에 아련하게 맴돈다. 아, 겨울이 오려구는구나.


“벌써 이만큼의 시간이 흐른 거야. 여름에서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나는 정말로 그해 여름에서 착실히 멀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새도, 나무도, 꽃들도, 모두가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어. 그런데 너는 지금 어느 계절을 살고 있니? 아직 그 여름에 머물러 있니? 너는 아직도 유난히 무덥고, 유난히 비가 많이 오던 그 여름을 살고 있어?”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멀어지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도망친 것인지 나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


“선배.”

“응?”


이곳에서 줄곧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이 있었다.


“선배에게 전 무엇이었나요?”


그는 잠시 황량한 들판을 눈으로 살폈다. 그리곤 예의 미소를 짓는다.


“소중한 사람.”


나는 한때 아주 오랫동안 사랑해 온 그 사람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겨울의 투명한 햇살이 그 사람의 반듯한 이마에, 깊은 눈에, 긴 속눈썹에, 오똑한 콧날에, 늘 미소 짓는 입가에, 투명한 피부에서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 간단한 분류법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사람이야. 미처 깨닫지 못했을 때에도 소중했고, 너를 마음에 담게 된 지금도 소중해.”


내게도 그랬다. 사랑하지 않는 지금도 너무나 소중한 사람. 오랫동안 많은 시간을 공유했고, 많은 추억을 나누었고, 또 많은 힘이 되어준 사람. 사랑하지 않는다고 소중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러니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게. 이번엔 내 차례야. 지금 이 계절, 그 도시에서.”


그 사람이 싱긋, 웃으며 저 멀리를 바라본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옮긴다. 논두렁에 낯익은 차 한 대가 서있었고, 그 옆에 재인 선배가 차에 기댄 채 서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재인 선배가 손을 들어 보인다. 너무 멀어서 선배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선배에게 달려가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그럼 선배는 “이 꼬맹이가!”하면서 잔소리를 하겠지? 불과 몇 달이 흘렀을 뿐인데도 그리움이 밀려왔다.


“재인이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 알지, 재인이 성격? 당장 와서 널 끌고 가겠다는 걸 말리느라 정말 힘들었어.”


나는 여름을 사랑했다. 그 뜨거운 열기도, 후텁지근한 공기도, 작열하는 태양도,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도. 하지만 그해 여름만큼 특별한 여름은 없었다.


“재인 선배도 참.”


나는 눈에 선하다는 듯 웃었다. 그 사람도 싱긋, 미소를 짓는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오랜 전, 그날처럼.

그 사람의 손은 따뜻했다, 그날처럼.




ⓒ Unsplash, Clay Banks


이전 07화 37화 "어제와 오늘 사이에 만나게 되어서 미안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