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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라의앨 Jan 14. 2021

프러포즈는 결혼 준비의 출발점이다

결혼 승낙받기 프로젝트


축하해!!! 날 언제로 잡은 거야??


남자 친구가 자리를 떠나고 동기들이 축하해주며 벌써 날을 잡은 거냐며 물어봤다. 사실 한국에서는 모든 결혼 준비를 마치고 프러포즈를 결혼식 직전에 하는 분위기라 충분히 그렇게 비쳤을 법하다. 하지만 나에게 프러포즈는 결혼 준비의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아직 부모님 허락이 떨어진 것도 날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프러포즈에 대한 환상은 좀 있었다. 장소 빌려서 초와 장미 깔아놓는 이벤트도 시내 한복판에서 풍선 들고 하는 공개 프러포즈도 싫었다. 그리고 꼭 남자가 프러포즈해야 한다는 법 있나? 내가 하고 싶으면 여자인 내가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프러포즈(propose)는 일종의 제안이다. 결정이 내려진 후에 취하는 행동이 아니라 먼저 행동으로 보여주며 상대의 의사를 묻는 것이다. 결혼 당사자인 두 사람이 먼저 합의를 하고 그 이후에 서로의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구체적인 결혼 준비를 해 나가는 게 순리에 맞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결혼에 대한 이야기, 결혼 준비를 시작하기 전에 서로가 결혼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 직접적으로 결혼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연애하면서 대화를 통해 서로가 그리는 미래 가정의 모습이나 가치관 등을 알 수 있고 많은 대화를 통해, 그리고 우리의 경우 둘 다 크리스천이었기에 각자 또 함께 기도를 하며 우리가 함께할 미래를 그려보곤 했다.


프러포즈에 대한 나의 생각도 나는 남자 친구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었고 그는 내 짝꿍답게 정말 나의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사실 노래로 청혼한 건 두 번째 프러포즈였다. 첫 번째 프러포즈는 졸업시험 직후, 오로지 둘만 있는 바닷가에서 석양을 보며 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비틀스의 I Will이라는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틀어두고 청혼하는데 생각보다 노래가 너무 금방 끝나버려서 남자 친구가 많이 당황해했다. 지는 노을을 보며 아름답게 물든 하늘 아래 청혼하고 싶어 했는데 먹구름이 끼어서 하늘이 보이지도 않았고 파도가 거세게 쳐서 바닷물이 얼굴에 튀기까지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반지가 나한테 너무 컸다. 손에 반지를 끼워줬는데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난 그 모든 과정이 너무 좋았다. 남자 친구는 평소에 긴장 같은 건 전혀 안 하는 사람인데 그 순간 정말 긴장하고 있는 게 눈에 보여서 그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능숙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해냈다면 오히려 감동적이지 않았을 수도... 어쨌든 반지가 너무 커서 끼고 있을 수가 없어서 반지를 내 손에 맞게 줄이기로 하고 몇 주를 기다렸다. 반지를 맡긴 지 몇 주가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길래 언제 다 되냐고 물어보니 연말이라 좀 오래 걸리는 것 같다며 좀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반지는 진작에 찾아왔는데 반지만 그냥 다시 주기 싫어서 고민하다가 두 번째 프러포즈를 한 거라고... 이렇게 또 감동을 주는구나. 프러포즈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내가 하려고 했는데 남자 친구 덕분에 나는 프러포즈를 두 번이나 받은 여자가 되었다^^;




난 올해... 프리랜서로 일 열심히 하고
결혼을 하고 싶어요.


새해를 맞아 올해 하고 싶은 것을 나누는 시간에 나는 가족 앞에서 선포했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두 눈에 동그레 졌고 부모님은 동공 지진이... 남자 친구는 이미 나이가 차서 당장이라도 결혼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남자 친구의 부모님도 몇 번 뵈었고 나를 이미 너무 예뻐해 주고 계셨다. 하지만 우리 집은 상황이 좀 달랐다. 우리 부모님도 내가 이 사람과 교제하고 있다는 건 알고 계셨고 딱 한 번 밥을 같이 먹기는 했지만 결혼은 아직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 내가 큰 딸이라 개혼이기도 했고 이제 막 공부를 마쳤는데 결혼 이야기부터 하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그렇게 반갑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터.


우리 부모님께 허락을 받는 게 가장 큰 난관이 되었다. 그렇다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 준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부모님께서 반대를 하신 건 아니다. 늘 그러셨지만 지금까지 내가 뭔가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NO라고 하신 적은 거의 없었다. (딱 한 번 았었다. 대학생 때 아프리카로 가는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했었는데 아프리카는 아무래도 여자들끼리 가기엔 너무 위험하다며 허락 안 하셨던 게 유일한 반대였다.) 이번에도 NO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일도 좀 자리 잡히고 안정되면 그때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아무래도 여자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제약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딸의 커리어가 결혼과 육아로 막힐까 봐 많이 걱정을 하셨던 것 같다. 물론, 남자 친구를 사위로 받아들이기에 부족하다고 느끼셨을 수도 있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난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는 확신이 있었고 어차피 할 거면 빨리 하고 싶었다. 굳이 미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를 조르고 졸라 서울로 출장 오셨을 때 남자 친구와 나와 같이 저녁 먹는 자리를 마련했다. 당장 결혼을 허락해달라기보다는 지속적으로 만나고 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봄기운이 돌던 5월 어느 날, 아빠와 나와 남자 친구 이렇게 셋이서 이태원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밤 11시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조금 놀랐던 건... 첫째, 아빠가 생각보다 남자 친구를 마음에 들어하셨다는 것. 그리고 둘째,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시며 눈물을 보이신 것. 나이 드시면서 TV를 보고 감동받아 눈물 흘리시는 모습은 종종 봤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룬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야.
남남이 만나 서로가 서로의 가족이 되고
두 가정이 새로운 식구를 들인다는 건
정말 큰 일이야.
처음에는 많이 다르겠지만 함께하면서
점점 공통분모를 넓혀가는 게 중요할 거야.


그 날 아빠가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셨지만 그중 가장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 아빠에게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텐데 아빠는 딸의 남자 친구와 여섯 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내고 막차를 타고 집에 가셨다. 그리고 이후 5개월의 정체기가 이어졌다. 딱히 반대를 하시는 것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결혼을 추진하는 것도 아닌, 그냥 그런 상태. 나도 대학원 졸업 후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면서 나름 바쁘게 지냈고 남자 친구도 사업 준비하느라 많이 바빠서 시간은 더 빠르게 지나가는 듯했다.




어느덧 10월 하고도 중순이 훌쩍 지났고 우리는 부모님께 한번 더 말씀드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빠는 해외 출장이 워낙 많으셨고 나도 가을이 성수기라 일정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만나 뵙기 전에 아빠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까 많이 고민했다. 내가 왜 이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결국은 그 사람보다는 아빠 딸을 믿어달라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내가 부모가 되어보진 않았지만 부모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세상 귀하게 키운 딸인데 누굴 데려온들 만족해하실까 싶었다. 그리고 난 결혼 준비도 결혼도 정말 재미있게 하고 싶은데 부모님이 기쁜 마음으로 지지해주지 않으면 난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고 감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이건 진심이었다. 아무리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억지로 밀어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12장 가까이 되는 이메일을 보내 놓고 얼마나 노심초사했나 모른다. 너무 길어서 안 읽으시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다음 날, 아빠는 해외 출장지에서 메일 잘 받았다며 한국 가면 보자며 답장을 주셨다. 11월 첫째 주에 우리는 부모님을 다시 찾아뵈었고 부모님은 어렵게 입을 여시며 우리의 결혼에 OK 해주셨다. 남자 친구는 두 번이나 확인을 거듭했다.


그럼 저희 부모님께도 말씀드려도 되는 거죠?
봄이 오기 전에 결혼식을 올려도 되는 거죠?


우리 아빠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파악한 남자 친구의 확인 사살. 부모님은 두 번째 질문에 또 한 번 당황하셨지만 중요한 건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그다음 문제였다. 그렇게 프러포즈 이후 결혼 승낙을 받기까지 장장 11개월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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