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갓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시작했을 때 의아했던 점이 있었다. 개발팀 책임님들이 수시로 인스턴트커피를 타 드시고 틈만 나면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것이었다. 처음엔 돈 아끼려고 그러나 아니면 커피 사러 가기 귀찮아서 그러나 싶었다. 사무실을 나서면 사방에 커피 전문점이고 심지어 사내 카페도 있는데 저 맛없고 몸에 안 좋은 걸 왜 저렇게 자주 많이 마시는 걸까 궁금했다. (여담이지만 인스턴트커피 냄새에 담배냄새까지 더해지면 최악이다. 코로나 이전이라 마스크도 쓰지 않던 시대다.)
난 커피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또 커피 없이 못 살 정도는 아니다. 회사 생활할 때는 점심식사 후 사무실로 돌아오며 습관적으로 커피를 한 잔 사서 들어왔고 공부하거나 일할 때도 커피를 마시면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아 별생각 없이 마시곤 했다. 메뉴는 십중팔구는 아메리카노다. 가끔 달달한 게 당기면 바닐라라떼나 모카, 특정 프랜차이즈에서는 모로칸민트라떼를 주문하기도 하지만 기본은 아메리카노다. 특히 디저트와 함께 마실 때는 무조건이다.
임신을 하면서 처음으로 커피를 끊어봤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당시 살던 집 바로 옆 건물 1층에 카페가 있었고 오후 4시만 되면 커피콩을 볶는데 그 향이 끝내줬다. 그때 알았다. 나는 커피를 맛보다는 향으로 즐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임신하고 수유하면서 커피를 못 마시는 게 대단히 큰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가끔 커피가 당기면 디카페인으로 마시기도 하고 커피 향 나는 곡물차를 마시기도 했다. 집에서 캡슐 커피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할 때 커피 향도 너무 좋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커피를 마시고 싶은 욕구가 어느 정도는 충족이 된다.
인스턴트커피(a.k.a 다방커피) 믹스는 아예 집에 사다 두질 않을 만큼 난 인스턴트커피를 커피로 취급하지 않는다. 내 입맛에 너무 달기도 하고 '인스턴트'라는 말에서 좀 거부감이 들기도 해서다. 그런데도 인스턴트커피가 필요할 때가 있다. 바로 여름에 맥O 커피믹스를 아이스로 타 마실 때다. 이상하게 여름에는 더위를 먹어 기운이 없어서 그런지 달달하고 시원한 게 당긴다. 그래서 유일하게 여름철에 인스턴트커피믹스를 한 팩 정도 사두곤 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여름이 아닌데도) 이 인스턴트커피가 당겼다. 아이 입원 준비를 하며 짐을 챙기는데 코로나 때문에 병원에 한 번 들어가면 외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먹거리도 이것저것 챙겼다. 커피를 사러 나갈 수도 없을 테니 아쉬운 대로 카O라도 챙기자 하는 마음으로 시댁에서 찬장을 열었는데 맥O 커피믹스가 보여 몇 개 챙겼다.
병원에서 아이와 하루 종일 지내며 간호하고 돌보느라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저녁밥을 먹고 인스턴트커피를 종이컵에 한 잔 타서 에이스와 함께 먹는데 너무 맛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몸과 마음이 힐링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따뜻하면서 달달한 커피에 스트레스가 풀리고 부드러운 에이스에 긴장도 풀리는 것 같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다방커피 다방커피 하는구나 싶었다.
10년 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의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던 책임님들이 어떤 마음으로 인스턴트커피를 타 드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지금 내 나이가 그 당시 책임님들 나이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 인스턴트커피가 좋아지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삼십 대 중반, 인스턴트커피가 좋아지는 나이 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