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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도 몸이 기억하는 것들

악기와 운동, 그리고 통역

by 행복한나라의앨


어릴 적 가장 먼저 그리고 흔히 배우는 악기가 피아노인데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필자는 피아노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이 있다. 필자는 당시 한인 중에 공부하는 남편 따라 미국에 와서 집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던 분께 피아노를 배우게 됐다. 아마 만으로 대여섯 살 쯤이었던 것 같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돼서 보니 그 나이 때는 뭘 하든 재미있게 해야 하고 아이가 관심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한데 난 그 피아노 선생님과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 번 레슨을 받으러 가는데 따뜻함은 없었고 손을 펜으로 맞아가며 혼난 기억만 있다. 게다가 내게 연습하라고 해놓고 다른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러 가버리곤 했다. 이런 날이 쌓이다 보니 피아노도 재미없고 선생님도 싫었고 레슨 받으러 가기도 싫었다. 결국 얼마 못 가 피아노 배우기를 그만뒀다.


그래도 뭔가 악기를 하고는 싶었는지 나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어떤 악기를 배워볼까 나름 진지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플루트와 바이올린이 예뻐 보여서 고민하다가 바이올린을 배워보기로 했다. (이건 사실 바이올린 전공하신 이모의 영향이 컸다. 칠순을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악기를 들고 다니며 연주하고 가르치고 계신 이모... 존경합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현악기가 배우기 참 어럽고 소리다운 소리를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필자는 1:1 레슨으로 시작했는데 주 1회 선생님 댁으로 가서 '엄마와 함께' 스즈키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다. 스즈키 교육법은 아주 어린아이에게 악기 연주법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부모가 아이와 함께 수업에 참여하고 가정에서 연습을 지도하며 교사와 함께 아이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부모 참여형 교수법이다.


처음에는 소음에 가까운 날것의 소리였는데 점점 음정과 박자가 붙고 멜로디가 만들어졌다. 물론, 듣기 좋은 소리, 음악이 되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집에서 연습하다 보면 연주하는 입장에서도 바이올린 소리가 소음에 가깝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게다가 손 끝에 물집이 잡히고 굳은살이 베기까지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었다. 그렇다고 연습을 대단히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딱 해야 하는 만큼만 겨우 하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선생님 만나러 가는 시간이 기대되고 좋았다. 나를 예뻐해 주고 친절하고 재미있게 가르쳐주셨다.


다른 주(州)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만 바이올린은 이어서 계속 배웠다. 선생님은 바뀌어도 스즈키 교육법으로 계속 배우니 연속성이 있었다. 여전히 낑낑대는 소리였지만 계속해서 무대에 서는 경험도 했다. 콩쿠르 같은 큰 무대는 아니지만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독주도 해보고 비슷한 수준의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같은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남들 앞에 서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지만 악기 연주할 때만큼은 사람보다는 그냥 내 악기와 내 연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국에 와서도 바이올린은 놓지 않았다. 전공까지 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왠지 바이올린은 재미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방과 후 수업도 바이올린으로 들으면서 오케스트라도 하고 주말에는 학원에서 진행하는 앙상블에도 참여했다. 혼자 연주하면 영 별로인데 파트를 나누어 합주를 하거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참여하면 그럴듯한 음악이 완성되는 게 신기하면서도 뿌듯했다.


여름방학 때 스즈키 여름캠프에도 몇 번 참가했다. 일주일 정도 리조트에서 숙식하며 바이올린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고 마지막 날 공연을 했다. 곡을 연주하다 보면 계속 걸리고 잘 안 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정말 밥 먹고 바이올린 연습만 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3-4일 차쯤 되니 막히는 구간 없이 매끄럽게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의 기쁨과 쾌감이란!!!


공연 방식도 독특했다. 스즈키 교본은 1권(초급)부터 10권(고급)까지 있는데 스즈키 캠프에 참가하는 학생들도 실력이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모두가 한 무대에 다 같이 선다. 한 권 당 한 곡을 연주하는데 1권 곡부터 시작해서 각자 자기 수준의 곡까지 연주하고 무대 위에 그대로 착석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1권을 배우고 있는 아이는 1권에 해당하는 곡 (아마 '작은 별'이었던 것 같다)을 연주하고 앉는다. 2권을 배우고 있는 아이는 1권과 2권 곡을 연주하고 앉는다. 이런 식으로 쭉 가다 보면 10권을 배우는 실력자들(그 당시 내겐 굉장히 크고 위대해 보이던 언니 오빠들)은 1권부터 10권까지 총 10곡을 full로 연주하는 셈이다. 필자는 4권이라 네 곡을 연주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앙상블과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이어가다가 점차 학업을 핑계로 바이올린과는 멀어졌다. 하지만 지금도 일 년에 한두 번 생각날 때 먼지 쌓인 바이올린을 꺼내 쓰윽 닦고 튜닝(조율) 후 연주를 해본다. 평소에 안 하니 이제 굳은살도 다 없어져서 조금만 연주해도 손 끝이 아프고 소리도 듣기 좋은 것은 아니지만 악보를 보며 몇 번 끼적이다 보면 30년 전에 연주했던 것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캠프 때 연주했던 곡은 정말 신기하게도 몸이, 손이 기억하고 있다. 손가락과 활 움직임이 착착 맞아떨어져야 좋은 소리가 나는데 악보를 보고 겨우 연주하는 것과 몸이 기억해서 연주하는 것은 정말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정말 많이 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운동이다. 일단 학교에서 바깥놀이 시간이 정말 많을 뿐 아니라 체육시간이 시수도 많고 방과 후 활동도 음악과 운동은 필수로 꼭 들어간다. 거기에 개인적으로 배우는 운동까지 하면 정말 운동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일단 수영을 오래 배웠다.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 등 기본 영법과 다이빙은 물론이고 Life Guard 과정까지 수료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수심 12미터 되는 수영장에서 링을 던진 후에 잠수해서 바닥에 가라앉은 링을 가지고 올라오는 훈련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수영도 선생님이 너무 좋았고 수영을 한다기보다는 물에서 노는 것 같은 기분으로 정말 재미있게 배웠다.


필자가 살던 지역은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 천연설로 뒤덮인 스키장이 곳곳에 많았다. 언제 처음 스키를 탔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부모님께 여쭤보니 만 4세 때 처음 타고 배웠다고 한다. 어릴 때는 뭐든 배우는 게 빠르니 그렇게 몇 번의 겨울을 보내고 나니 고급 코스도 겁 없이 타고 내려왔다고... 그러다가 한 번 울퉁불퉁한 슬로프에서 굴러 내려온 이후로 고급코스는 가지 않았다...^^;


겨울에는 피겨스케이트도 배웠다. 미국은 동네마다 아이스링크가 잘 되어 있고 비용도 비싸지 않아서 접근성이 매우 좋다. (그래도 레슨비도 있고 매번 라이드 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없는 살림에 우리 부모님은 이런 걸 어떻게 다 해주셨는지...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감사하다.) 그 당시엔 중국계 미국인인 미셸 콴 선수가 큰 인기였는데 빙판 위에서 예쁜 옷을 입고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이 어린 내 눈에 너무 예뻐 보였다. 하지만 빙판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여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스키보다 어려웠다. 기본기를 닦고 다음 시즌부터 스핀을 배운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오게 되어 자칭 피겨 꿈나무였던 필자는 그렇게 피겨와는 안녕을 고하게 되었다.


중학교 때 1년간 방과 후 체육 활동으로 크로스컨트리(cross country) 러닝 팀에 들어갔다. 말하자면 언덕 넘고 물 건너 달리기를 하는 육상종목이다. 처음에는 달리고 나면 산소부족 현상이 오면서 하늘이 노래지는 경험을 몇 번 하기도 했다. 선생님들의 빠른 대처와 맞춤 훈련으로 이때 러닝의 기본기를 다질 수 있었고 학교별로 참가하는 대회에도 나가 5K는 거뜬히 뛸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달려본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성인이 되어서 제일 쉽게 자주 했던 운동이 바로 걷고 뛰는 것이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니 부담도 없고 그때그때 컨디션에 맞춰 운동할 수 있다는 게 최대 장점.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뉴스 또는 시사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걷고 뛰다 보면 몸이 가벼워지고 심장 뛰는 게 느껴서 좋다.


이 외에도 줄넘기와 훌라후프, 자전거, 롤러블레이드, 체조 등도 유아기 때부터 매일 즐겨하다 보니 내겐 익숙한 운동이자 놀이가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서 참 많이 뛰어놀았구나 싶다.




모두 어릴 때 학교에서, 집에서, 방과 후에, 또는 개별적으로 배운 것들인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몸은 이것들을 기억하고 있다. 늘 하는 게 아니다 보니 처음엔 좀 버벅거리긴 하지만 몇 번 해보고 조금 연습하다 보면 금방 다시 감을 되찾는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게 참 신기하다.


앞서 다른 글에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필자는 꾸준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위 운동만 봐도 한 가지를 진득하게 하기보다는 이것저것 다양하게 해 보는 편이지 않나. 공부는 더더욱 꾸준히 해본 적이 없다. 영어도 한국어도 생존을 위해 배웠기 때문에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며 학습한 적이 없다. 던져진 상황과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꾸역꾸역 적응해 가며 눈치로 익히고 배웠다.


거의 유일하게 꾸준히 차근차근하면서 성취를 느낀 게 악기와 운동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학창 시절에는 공부로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 스스로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겨서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해서야, 대학원 졸업을 위해, 그리고 지금은 프리랜스 통역사로 일하면서 매일 꾸준히 공부하고 연습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고 실제로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통역과 음악/운동은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고?


1.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해야 한다


지식을 머릿속에 넣고 외우는 건 벼락치기로 가능할지 몰라도 악기를 연주하고 운동으로 결과를 만들어 내고 통역을 수행하는 것은 벼락치기로 절대 된다. 악기도 운동도 통역도 기술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줄곧 칼날에 비유되곤 한다. 칼을 갈면 갈수록 날카로워지듯이 기술도 쓰면 쓸수록 좋아지기 마련. 반대로 안 하면 무뎌질 수밖에 없다. 무조건 많이 보고 듣고 연습해야 한다. 훈련과 연습만이 살 길이다. 그래서 조금만 쉬어도 티가 난다. 하루 이틀 쉬면 나만 알지만 일주일을 쉬면 동료가 알고 한 달을 쉬면 청중/관객/고객이 안다는 말이 있다.



2. 결국 퍼포먼스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연습해서 결국 무대에서 공연을 해야 한다. 시험을 볼 때도 아무래도 긴장하다 보면 평소 실력보다 못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긴장해서 못했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실력이다. 그래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위해서 연습을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몸이, 입이 자동으로 반응할 때까지 계속 연습하는 거다. 그렇게 무대에서 실수할 확률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나의 전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운동선수가 올림픽을 위해 적어도 4년을 준비하고 올림픽 무대에서 모든 걸 쏟아낸다. 메달을 따면 환호성이 터지고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데 그 순간을 위해 그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하면 겸허해진다. 그래서일까. 십여 년 전에 김연아 선수가 빙판 위를 활보하며 선보이던 아름다운 퍼포먼스를 볼 때마다 매 번 코끝이 찡해지곤 했다.



3. 몸이 기억한다


맹연습, 맹훈련을 하다 보면 몸에 익는다. 악기 연주할 때 손이 연습한 대로 자동으로 움직이고, 운동할 때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반응하고, 통역할 때 문장을 어떻게 시작하든 자유자재로 문장을 만들어 완성해 낼 수 있다. 이건 머리로 고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고민은 연습할 때 하는 것이고, 무대 위에서는 연습한 대로 실행에 옮길 뿐이다. 몸이 기억할 정도로 하고 나면 시간이 지나도 다시 모멘텀을 이어가는 게 어렵지 않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금방 다시 기억해 내고 익숙해진다.


여름과 겨울, 통역 비수기를 지내고 다시 현장에서 통역을 할 때 이런 경험을 매 번 한다. 오랜만에 다시 통역을 하려고 하면 머리도 입도 삐걱거리기 마련인데 뉴스 섀도잉과 낭독, 시역, 그리고 통역 연습을 하면서 다시 감을 되찾는 과정을 거치곤 한다.




올해 초등학생이 된 큰 아이가 바이올린과 줄넘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잘하고 싶은데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되니 짜증을 내고 힘들어한다. 그렇다고 엄마인 필자가 대신해줄 수도 없고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직접 몸으로 해보면서 습득해야 하는 부분이다.


줄넘기를 하다가 자꾸 걸리니 속상해하며 입이 한껏 튀어나온 아이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이야기해주고 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잘하는 것 같은데? / 더 잘 되는 것 같은데?
간식 먹으면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해보자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매일 연습하다 보면 미미하지만 매일 발전하게 되고 그렇게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면 훨씬 잘하고 있는 너 자신을 볼 수 있을 거야


신기하게도 3월에 줄넘기를 한 번도 못 넘던 아이가 점점 개수를 늘려가더니 7월이 된 지금은 50개를 거뜬히 뛴다. 게다가 요즘은 그냥 줄만 넘는 게 아니라 음악에 맞추어 다양한 동작을 하는데 온갖 기교를 더해 신나게 뛰고 있다. 물론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고는 하지만 아이도 안되던 게 어느 날 되고 자신이 해내고 있는 게 뿌듯하고 기분 좋은 모양이다. 재미있다며 계속하겠다고 하는 걸 보니 필자도 기분이 좋다.


그에 비해 바이올린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다른 악기를 시도해 봐야 하나 고민 중이다. 아무쪼록 아이가 계속해서 배움과 성장의 기쁨을 경험하고 이 크고 작은 성취의 경험을 쌓아갈 수 있게 잘 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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