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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Jan 09. 2021

때로는 슬픔도 힘이 되는가

101간의 여정 10주차, 반환점을 돌며

10명의 사람이 모여 매일 101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합니다. 2주마다 한 명씩 질문 하나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연재도 하고 있답니다. 벌써 반환점을 돌았어요. 50개의 질문에 답하다니. 101개의 답변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마라톤을 하는 마음으로 차분히 임해보겠습니다.


46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했는가


용서할 수 없다고 단정 지을 만큼 내게 개인적으로 원한을 진 사람은 없다. 10년 전 노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MB가 죽도록 밉기는 했다. 용서라는 단어를 쓸만한 인물들도 없고. 그저 너는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내가 잊으면 되는 정도의 일들이 떠오를 뿐이다.


용서라는 단어를 보면 나는 늘 영화 밀양이 떠오른다. 자신의 아이를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며 면회를 가는 전도연은 하나님에게 이미 용서받았다는 남자 앞에서 절규한다.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어떤 권리로 용서를 할 수 있냐고. 


사실 용서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어떨 때는 용서라는 것이 폭력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나에게 아주 큰 잘못을 한 사람일 텐데 용서하는 과정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 괴로운 과정 끝에 용서를 통한 완전한 해방이 있다면 그럴만한 가치가 있겠지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분노나 원망이 나를 갉아먹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용서받을 짓을 하지 말고 살자.


47 좋아지고 있는가


일 년이 넘게 창궐하고 있는 이 역병 때문에 많은 것이 제한되고 있다. PT를 받으러 헬스장에 갈 수도 없고 골프연습장도 마찬가지다. 서울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전시회에 다니지도 못하고 심야영화를 보러 가는 것도 겁이 난다. 보고 싶은 사람들은 만나는 것도 그러하다. 확진자는 연일 1000명을 찍다 잠시 주춤하는 모양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아주 일상적인 것들이라고 믿었던 것들의 소중함을 연일 깨닫고 있다. '포스트'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우리는 다시는 코로나가 있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백신이 나와도 마스크와 손 씻기라는 기본적인 방역 수칙은 계속되어야 한다고도 하고. 2024년에야 해외여행이 가능하다는데 과연 그때 안전하게 안심하고 여행을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쓰다 보니 조금 우울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좋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언젠가 이 역병을 끝내는 날이 올 것이며 연내에는 백신 접종도 가능할 테고 2020년보다는 조금 더 나은 한 해가 될 것을 믿어본다. 개인적으로도 좋아진 것들이 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불안감이 늘 함께하지만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시끄러운 바깥세상에 귀를 닫고 내면에 집중하는 시간도 가졌다. 게을리했던 독서도 열심히다. 예전처럼 작은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담담함도 생겼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만들어가려는 노력도 하고 있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에너지를 비축하고 기회가 있을 때 뜻을 펼치기 위한 시간이라 믿는다. 샤워를 하다 문득문득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뭐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서른을 먹고도 아직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던지 확신 같은 것들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올해 계획한 것들을 행동에 어떻게든 옮길 것이다. 이 다짐만으로도 나는 좋아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상황이 나아졌을 때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너무나 기대된다. 


48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키우는가


한때 귀농 유튜버를 꿈꾼 적이 있다. 리틀 포레스트처럼 한 번쯤은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생은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며 타박했지만. 나는 무엇을 키우는 것에는 젬병이다. 선인장도 말라죽게 만든 전적이 수두룩하다. 


진짜 씨앗이 아는 관용적인 의미에서 씨앗은 많이도 뿌려봤다. 열매를 제대로 수확하지 못해서 그렇지. 나는 종종 진담 반 농담 반 머릿속의 어처구니없는 사업계획을 친구들에게 읊어댄다. 낚시하는 걸 좋아해 낚시와 소개팅을 접목한 '러브 피싱', 방탄소년단의 인기에 힘입어 한탕해보려 했던 'BTS 세계관 비평집' 등등. 뉴발란스의 '아빠의 그레이'에서 착안해 동묘 구제시장에서 환골탈태 후 부모님과 자녀가 함께하는 '도전 신데렐라'와 같은 이벤트도 열어보고자 했다.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은 일들이 대부분이고 시도를 했으나 좌초되거나, 진행 중이지만 지지부진하거나. 상태는 그러하다. 


주변 사람들이 너는 참 아이디어는 많은데 실행을 안 해서 문제라고 일을 모아 말한다. 나도 알아요. 원래 사업을 하려면 아이디어맨과 불도저 맨이 함께 해야 한다고 하던데. 나는 의지박약형 인간이기에, 무언가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을 보면 나이와 성별, 지위를 막론하고 존경심이 든다. 결과가 어떻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위대하다. 완성도를 떠나 머릿속의 무언가를 실체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회에서도 임기 내내, 혹은 임기가 끝나더라도 끌고 가고 싶은 어젠다들이 있었다. 일단 씨앗은 뿌린다. 자료를 소관 부처에 요구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보고, 토론회를 열거나 입법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해결되는 문제가 있는 반면 열매를 키우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 합의가 필요한 일들이 있다. 한 예로 갈등관리법 같은 경우에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법이라고 생각했다. 제정법안이기도 해서 애정이 컸지만 (구)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몽니로 진전이 되질 않았다. 선거 준비를 하느라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많은 시간을 쏟지 못했다. 그렇게 내가 뿌린 씨앗은 상임위 소위에 계류된 채 싹을 피웠다가 말라비틀어졌다. 


조국 이슈가 터지기 전부터 상임위가 교육위인지라 대입제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시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와 같이 대학 서열화를 완화하기 위한 방안들을 찾고 토론하고 개발하고 있었다. 최고위원인 의원 덕에 최고위원회에서 말씀자료의 형태로 화두를 던지기도 하고, 의원실 자체적으로 연구 용역을 통해 해외 사례들을 종합한 다양한 버전의 입시 제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급진적이지만 대학 입학 추첨제까지도 논의했다. 일정 기준 이상이면 그다음은 추첨을 통해 대학에 입학시키는 것이다. 대입이 우리 사회에서 갖고 있는 영향력을 봤을 때 당장 세상에 내놓기는 어려웠지만 보완점이나 방어 논리들을 만들어 언젠가는 화두로 던지고 싶었던 주제였는데, 이것도 의원의 낙선, 그리고 나의 퇴사로 유야무야 싹도 틔워보지 못했다. 


열매를 키우지 못했던 경험들은 나에게 하나의 콤플렉스이기도 하다. 내게 열매를 꼭 맺고 싶은 일들이 아니었던가. 아마 내가 그럴 힘과 의지가 부족한 사람인 탓일 것이다. 이제는 뭔가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때가 아닌가 싶다. 올해 꼭 잘해보고 싶은 것 두 가지가 있다. 기필코 이 두 가지만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아, 101 모임의 완주까지 포함한다면 세 가지가 되려나. 욕심내지 말고 하나하나씩 소중히, 열과 성을 다해 열매를 키워보자. 아주 작은 열매라도.


49 거절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거절해야 할 것들은 너무 많다. 거절하고 싶지 것들도 많은데 대부분 거절할 기회조차 오지 않는 것들이다. 로또 1등이라던가 연금 복권 같은 것들. 존재를 알지 못했던 분의 유산 등등. 판타지에 가깝군.


거절했던 것들을 생각해본다. 후원금을 의원의 개인 주머니로 빼돌리는 일. 이 일로 한동안 의원의 짜증을 감내해야 했고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지만 그 일을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취업청탁이나 편한 곳으로 군대 좀 빼 달라는 민원들도 종종 있었다. 여자친구 혹은 와이프가 있는 남자들의 유혹. 개중엔 임자만 없으면 정말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카르마를 믿는 사람이므로 거절했다. 카르마를 떠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옳으니까. 


그다지 거절해야만 하는 것들이 많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담배, 마약 같은 것들을 말할 수도 있겠다만 나에게는 거절해야 할 것에 속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이나 폭행, 사기, 살인, 음주운전과 같은 범죄들은 당연히 거절해야 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나열하라고 물음을 던지지는 않았을 거고.


구체적으로 꼽기는 어렵지만 거절해야 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들이 아닐까. 내일 중요한 팀 프로젝트 발표나 회의가 있다고 가정하자. 평소 같으면 친구의 한 잔 하자는 제의를 흔쾌히 승낙하고 밤새 술을 마실 수도 있겠지만 가정 아래에서는 거절해야 할 것에 속한다. 약간의 편법을 사용해서 일이 더 잘 풀릴 수 있는 상황에서 그 편법을 단칼에 거절할 수 있을까? 잘은 모르겠다. 편법의 정도에 따라 어느 정도 함께 손을 잡을지도. 


불현듯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노콘섹스. 하지만 이렇게 답변을 마무리하면 안 되겠지. 원치 않는데 나에게 피해를 입히며, 강제성을 띠는 행위 또한 마땅히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로 마무리하겠다. 


50 때로는 슬픔도 힘이 되는가


기쁨, 분노, 슬픔, 걱정, 불안, 흥분 등 많은 감정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뇌과학적으로 풀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중에 혼자서 찾아봐야겠다. 5분 뇌과학 유튜버님에 따르면 감정이 섞인 기억이 오래가는 이유는 희로애락의 순간 기억력을 증강하는 신경전달물질이 다량으로 분비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슬픈 기억을 오래 안고 가는 것은 안 좋은 건가 싶기도 하지만.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떠올려보라. 슬픔이를 은근히 무시하고 따돌리다가 된통 당하지 않는가. 슬펐던 상황에서 힘을 얻는 상황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한없이 기분이 추락할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의 온기, 건네는 위로의 말, 때로는 나 대신 싸워주는 무모함까지. 슬픔 자체가 힘이 되지는 않지만 슬픔을 직시하고 나면 그 후에는 뭐라도 바꿔야겠다는 힘이 생긴다. 나로 인한 슬픔이었다면 내가 바뀌면 되고, 타의에 의한 슬픔이라면 그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혹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달리 행동해보는 방법들을 찾으면서. 나이가 들어가며 약해지는 아빠의 치아나 밤샘 촬영에 지쳐 쓰러져 자는 동생을 볼 때면 슬픔이 나를 찾아온다.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본다. 슬픔은 힘이 된다.


요즘 양부모의 학대로 세상을 떠난 정인이 사건으로 사람들의 분노가 들끓고 있다. 늦었지만 법을 재정비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토의가 이뤄지고 있다. 국회의원들의 '미안해 정인아' 챌린지를 보고 있으면 기가 찬다. 왜 국회는 늘 사건이 터지고 수습하기 바쁜 집단인 것인지. 정인이의 안타까운 죽음에 분노만 있는 것은 아닐 테다. 어린아이가 아무런 죄 없이 고통받아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일에 대한 슬픔도 분명 공존한다. 슬픔의 연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슬픔 없이 세상이 잘 돌아가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도 슬픔들이 모여 또 다른 정인 이들이 이 세상을 떠나지 않도록 안전망이 되어줄 것이다. 슬픔도 힘이 된다. 그럼에도 이런 슬픔들이 힘이 되는 사건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그렇게 만들기 위해 우리 사회가 노력해 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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