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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Feb 01. 2021

혼자만 만끽하는 기쁨이 있는가

101간의 여정 12주차

10명의 사람이 모여 매일 101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합니다. 2주마다 한 명씩 질문 하나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연재도 하고 있답니다. 벌써 반환점을 돌았어요. 50개의 질문에 답하다니. 101개의 답변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마라톤을 하는 마음으로 차분히 임해보겠습니다.


56 혼자만 만끽하는 기쁨이 있는가

휴일에 하루 종일 누워 넷플릭스와 왓챠를 항해하며 드라마와 영화를 보는 것. 맛있는 식사 후에 피우는 담배. 게으름을 이겨낸 뒤 쟁취하는 러닝 혹은 PT 타임. 좋은 노래를 발견하고 그 노래를 반복 재생하는 시간. 그리고 그 노래들을 블루투스 마이크로 신나게 불러보는 것. 블라인드 피그에서 올드 패션드를 마시며 실내에서 눈치 보지 않고 담배 피우는 일. 날씨 좋은 날 벤치에 앉아서 멍 때리는 시간. 외국 리조트 수영장에서 맥주 한 잔 시켜놓고 책 읽다가, 담배 피우다가, 수영하다가 잠드는 시간. 집에서 청소를 하면서 혼자서 상황극을 해보는 것. 영화나 글을 읽고 글감을 얻어 소설을 끄적여 보는 시간. 종종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만끽하는 것들이다. 


생각이 복잡할 때는 일기를 쓰거나 그 생각을 풀어내는 글을 쓰는 시간들을 좋아한다. 요즘엔 그러기에 머리가 너무 복잡할 때에 해당한다. 그럴 때면 '담'이 추천해준 '베어'라는 어플을 켜고 소설 도입부나 시놉시스를 되는 대로 써 본다. 클리셰 범벅인 내용일 때도, 나만 하는 생각이겠지?(이미 나온 이야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하며 쓸 때도 있다. 각 잡고 쓰는 이야기가 아니라 떠오르는 부분 부분이 조각처럼 기록되어 있다. 부끄러울 때도 많은데 언젠가는 쓸 데가 있겠지, 하고 수치심을 뒤로하고 삭제 버튼은 누르지 않고 있다. 끝내주는 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SF소설을 쓰는 것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데 언젠가는 그 꿈을 이뤄줄 자양분이 될 것이라 믿으며. 고로 요즘의 말 그대로 혼자만 만끽하는 기쁨은 '소설가가 된 척 하기'가 되겠다.


마인드 컨트롤 혹은 자신감 셀프 발전(generation)을 위해 원하는 것을 이룬 나를 가정하고 인터뷰이가 되어 이것저것 주절주절 할 때도 있다. 좀 민망하기도 하고 낯부끄러운 광경이긴 하지만 굉장히 많은 순기능이 있다. 입으로 머릿속 생각들을 뱉으면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구나, 내가 이런 것을 하고 싶구나, 내가 이런 사람이 되고 싶구나가 명쾌하게 정리가 되기 때문이다. 덤으로 이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동기부여도 따라온다. 상상 속의 나지만, 혼자라도 그런 사람이 되어보는 것은 확실한 나의 기쁨이다. 여러분들도 한번 해보세요. (주의: 현타가 올 수도 있음. 물론 저는 뻔뻔 맨이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습니다.) 공상에 그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자, 오늘도 다짐하고 자러 가보렵니다. 


57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지금의 나에게는 위로와 확신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은데 머릿속이 왔다 갔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뒤섞여 있어서 쉽사리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요즘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아서 이 이야기는 나중에 좀 더 다듬어서 쓰고 싶다. 101개의 질문을 모두 답한 뒤 소회로 적고 싶기도 하고. 이런 핑계로 답변을 미루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시길.


58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 있는가

있다고 답한다면 그 비밀을 여기다 풀어낼 수는 없겠지. 숨기거나 감추고 싶은 비밀은 있다. 마음을 먹고 말하려고 하면 말할 수 있는 정도의 비밀들. 선의의 비밀들도 존재한다. 나를 혹은 타인을 보호하기 위한 비밀들. 하다 못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마니또조차 비밀 아닌가. 영화 나이브스 아웃의 주인공 소녀는 거짓말을 하면 토를 하는 이상한 증후군을 갖고 있는데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사건의 단편적인 사실들만을 이야기하며 탐정의 추리를 피해 간다. 우리 삶도 때로는 그러하다. 적당한 거짓 혹은 비밀을 안고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숨겨가며. 


나는 궁금한 것을 유독 못 참는 성격이라 말을 하다 말면 집요하게 답을 끌어내는 악취미가 있다. 그래서인지 나의 비밀을 숨기는 것도 능한 편인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 앞으로도 없었으면 좋겠다. 아마 나는 살인을 하게 되더라도 가족이나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는 말하고야 말 것이다. 나는 그런 중대한 비밀을 혼자서 안고 갈만한 배포가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그러한 비밀이 생긴다면 아주 치밀하게 지킬 수 있는 능력까지도 함께 있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그러므로 그런 비밀은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겠다.


59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보았는가

예전에는 내 인생에 종종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래서 기록이 중요한 건가. 홀로 유럽여행을 떠난 일. 교환학생 시절 겁대가리 없이 밤거리를 쏘다닌 일. 그러다가 강도를 당한 적도 있다. 휴학을 하고 이것저것 진로를 찾다가 지방선거의 사무장이 되어 당선까지 함께 한 일. 의원실을 그만두고 김경수 선거 캠프에 들어간 일. 지독했던 선거를 치른 일. 미련 없이 국회를 떠난 결정. 계획 없이 반년 동안 휴식을 가진 일. 창업을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도전해보는 것. 안면도 없는 사람에게 무작정 만나자고 미팅을 요청하기. 30년의 인생을 회고하기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 순간이 닥쳤을 때 나는 고민 끝에 어떠한 결정을 내렸고 그 결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꾸역꾸역 점들을 잇고 선을 만들고 그 선들이 모여 형태가 될 것이다. 어찌 됐든 아직까지는 커다란 한 두 개의 목표를 두고 이것저것을 시도해보는 중이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볼 기회가, 용기가 줄어들지 않기를 바라본다. 


60 내 형제는 어떤 사람인가

네 살 터울의 신유지 양은 늘 내 어깨만치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동생이었다. 엄마 아빠는 동생의 키로 종종 걱정을 하곤 했다. 유전자의 힘으로 고등학교 때 쑥쑥 자라 이제는 눈높이를 함께하는 동생이 되어버렸다. 유지는 조용하지만 한방이 있는 사람이다. 엄마한테 혼날 때 나는 맞기 싫어서 눈물을 똥똥 흘리며 잘못했다고 빌 때 동생은 묵묵히 혼이 나던 아이였다. 언니가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놀 때 자기 방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인형놀이를 했고, 가끔 내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괴물 놀이를 자주 했는데 유지가 괴물 역을 맡고 4살이나 많은 언니들이 집안을 휘저으며 도망가곤 하였더랬다. 철없는 언니 같으니라고. 정신없고 시끄러운 언니의 그림자 때문에 첫째는 모르는 둘째의 마음고생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곧잘 공부를 잘했고 이것저것을 해보며 정신없는 조금은 튀는 사람이었던 반면 동생은 조용히 자기가 할 일을 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타지로 가면서 엄마 아빠의 신경이 내게 쏠렸고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면서도 그랬다. 시시콜콜 짜증 나고 화나고 기쁘고 모든 일들을 재잘거리는 언니와 달리 유지는 과묵한 편에 속했다. 시끄러운 언니 때문에 부러 입을 다물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동생이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늘 동생에 대한 걱정이 함께 했다. 


유지는 손으로 하는 것은 뭐든 망치고 마는 나와 정반대인 아이다. 재능과 적성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건드려보다 결국 공부를 한 언니와 달리 유지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고 미대를 준비했고 건축학과로 진학했다. 동생이 수능을 치고 난 뒤 서울로 원서를 내라며 닦달하는 언니를 보며, 동생은 언니가 서울에서 외롭구나 하는 생각에 안쓰러움 반, 이래라저래라 하는 언니에 대한 짜증이 반이었다고 훗날 말했다. 성과주의에 찌든 언니와 달리 동생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었다. 눈물의 밤샘으로 5년 동안 건축학도로 지낸 동생은 돌연 전공 대신 다른 일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친구들끼리 간 일본 여행을 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는데 25만 회나 조회된 것이다. 여행사에서 여행 협찬도 들어왔고 그렇게 유튜브에 영상을 사부작사부작 만들어 올리더니 영상 감독이 되겠다고 말이다. 전공자도 아니고 창작자의 고통을 알기에 걱정이 앞섰다. 한 2년간 허송세월 하는 것 같아 보여 답답하기도 했지만 유지는 조용히 자신의 길을 찾고 얼마 전 조감독 자리를 꿰차고 그 길을 걷고 있다. 내 새끼 오구오구. 동생이 만든 뮤직비디오들을 보면 가슴이 웅장 해지며 뿌듯하고 여기저기 이거 내 동생이 만들었어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퐁퐁 거린다. 


우리 자매는 이제 친구처럼 살아간다. 서로의 옷을 함께 입고 비슷하면서 다른 취향을 공유하고 각자의 길을 응원하면서. 무뚝뚝한 츤데레 경상도 여자에게 나는 오늘도 철없이 장난을 걸고 어깨를 깨물고 꼭 껴안아 줄 것이다. 내 동생은 성대모사의 달인이기도 한데 나의 웃음 버튼이다. 내 친구들도 인정한다. 나의 웃음 비타민. 이거 해줘, 저거 해줘, 하면 툴툴대면서도 결국에는 해주고야 마는 나의 동생.


동생이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 보냈던 편지가 떠오른다. '처음에는 동생이라서 언니의 힘든 순간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나는 나이기 때문에 언니에게 힘이 되는 큰 존재가 될 수 없음을 느낀다.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언니만큼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위로가 되어주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언니의 삶에 많이 공감하고 함께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밤이 내게도 얼른 왔으면 좋겠다. 언니도 그 날을 천천히 기다려줘. 나도 엄마랑 언니만큼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


나는 유지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존재만으로 나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라고. 너는 어렸을 때부터 나보다 더 대범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엄마의 말을 빌려와서, 사랑을 바치고 싶지만 그냥 사랑한다. 내 소중하고 소중한 유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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