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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버른앨리스 Jan 18. 2018

좋은 남편, 아빠가 꿈이던 남자의 이야기 by 저스틴

방송국 피디로 호주에서 사는 이야기




나는 멘토라는 개념을 경계해. 

몇 년 전부터 유행처럼 널리 쓰이는 이 멘토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렇게 가볍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라는 생각을 나는 가끔씩 하거든. 스스로 청년의 멘토라 자칭하며 유려한 언변으로 조언을 늘어놓는 기성 지식인들을 볼 때면 멘토라는 단어가 바다 넘어와서 참 고생한다, 싶어 질 때가 있어. 사실 멘토는 본인이 자처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선택권은 전적으로 멘티에게 있는 거지. 강요된 존경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멘토링도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 야지만 진정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해.

가끔 요리나 창업에 관해 조언을 묻는 후배들이 나에게 멘토링을 부탁할 때가 있거든. 멘토가 되어달라고 하면 나는 내가 이 분야의 선배로서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조언을 해줄 수는 있지만 감히 멘토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해.  나는 개인이 개인을 멘토링을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있거든. 멘토의 원 뜻인  ‘정신적 지주, 영혼의 길잡이’가 되려면 한 분야에서 일시적인 작은 성공을 하였다는 것 만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인 거야. 


호주에서 9년간 만났던 많은 어른들 중의 대부분은 기회가 닿는 대로 나와 나의 상황을 평가하였고, 요즘 세상에는 맞지 않는 조언을 쏟아냈어. 그리고 나는 그분들을 존경하지 않았지. 말의 홍수 같던 ‘멘토링’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가끔은 멀미가 날 것 같았어.


하지만, 정말 가끔, 아주 아주 아주 극소수. 

입으로 나오는 말이 아닌 평소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느끼게 하는 선배들이 있어. 절대로 쉽게 조언을 하지 않는, 누군가의 멘토가 될 생각은 전혀 없는 분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는 멘토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 9년간 조니가 있었고, DY오빠, HJ언니가 있었어. 그분들은 내가 혼자 멘티 놀이하고 있는 것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운이 좋게도 최근에 내 비밀 멘토 리스트에 한 명을 더 추가할 기회가 있었지.

몇 년간 만난 선배 중 가장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사람이고, 오늘의 이야기의 주인공이야. 

호주에서 내가 만난 많이 배우고 닮고 싶은 선배 4호, 저스틴.






내가 저스틴을 처음 만난 것은 저스틴의 직장, 호주 공영방송국 SBS에서였어. 

스몰 비즈니스 오너들을 초대해 노하우를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내가 초대되었고 저스틴은 담당 PD였지. 

한국인치고 그렇게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사람은 참 오래간만에 만났던 것 같아. 분명 나와 몇 년 차이 나지 않을 듯한 얼굴인데, 머리는 자연스러운 은발이고 또 말투는 너무 공손한 거야. 

처음에 내가 긴장을 좀 많이 했거든. 방송국이라는 장소 자체가 가진 위압감이 좀 있더라고. 그런데 같은 이민자로서 내 입장을 공감하면서 위로하고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는 사람 앞에 있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이 편해졌고 어느 순간 신나게도 수다를 떨고 있는 거야.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나이 대 - 나에게 사장이거나 높은 상사였던 10살쯤 차이 - 의 남자 어른과 초면에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를 해본 적이 내 생애에 있었나 싶더라니까. 나중엔 내가 더 신기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게 됐어. 이 분은 원래 뭐하시던 분이고, 왜 여기 있는 걸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렇게 탈권위적이며 오픈된 사고를 가지게 된 걸까, 궁금해지는 거야. 


처음에는 해외에 오래 살아서 사고가 비교적 자유로운 교포인 줄 알았어. 그런데 나랑 같은 해에 이민을 왔더라. 원래 여유로운 주류 엘리트라서 이렇게 근사한 곳에서 멋진 직업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와서 아파트 청소랑 한식당 설거지부터 시작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거야. 

어떠한 무형, 유형의 것으로도 암묵적인 권위를 나타내지 않는 한국 중년 남자라, 신선했지. 

위아래 계급 배경을 다 떼고 대화의 본질만 남긴 대화 방식으로 1,20년의 갭 따위는 무시해버리는 소통방식이 정말 신선했어. 그를 두 번째 만나게 된 자리에서 나는 저스틴을 롤모델로 생각한다는 E라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더라. 그때 E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분명 저스틴은 우리의 롤모델이고 멘토고 할 의도가 전혀 없어! 우리를 가르치려 하지 않고 그저 눈높이에서 친구로 대해주는데도 불구하고 문득 저스틴의 행동, 본인의 경험담, 혹은  가볍게 건넨 말들이 어떤 울림이 되는 구조인 거야.  


‘아, 저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저렇게 세상을 혹은 상대를 대할 수도 있구나. 
저럴 때는 이렇게 행동할 수도 있고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그럼 더 낫겠다.’  



말로 아무리 가르쳐봐야 배워지지 않는 어떤 삶의 자세 같은 게 있잖아. 그런 걸 생각하게 해. 

그것도 아주 아주 교묘하고 자연스럽게! 이게 굉장히 어려운 거잖아. 안 그래?





오늘은, 그런 저스틴의 이민 이야기를 가지고 왔어. 

저스틴 가족의 파란만장한 이민 역사를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아깝더라구.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한국과 호주에서 고군분투해왔던 과정과 이민의 난관을 극복한 과정. 대부분의 한국 청장년 이민자들과는 다른 행보, 흔치 않은 직업군에 종사하게 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는 굽이굽이 굴곡져 있고 그래서 흥미로워. 그래서 바쁜 저스틴을 열심히 졸라서 글을 받아냈고, 거기에 같이 틈틈이 나눴던 대화들 까지 더해서 정리해 보았어. 이 글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내가 E에게 공감했던 것처럼 너도 나에게 공감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특히. 이번 글은 추천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가족과 함께 해외에서의 새 출발을 꿈꾸는 3040의 젊은 가장이 있다면 꼭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 비슷한 위치에서 같은 고민을 하였던 저스틴의 솔직한 이야기가 아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야!


그럼 재미나게 읽어줘 :-)








A (알리스) : 안녕저스틴!! 이렇게 다시 만나서 반가워아이러니하다우리 입장이 반대가 됐네저번에는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내가 질문을 받았고 이번에는 이렇게 내가 질문을 하게 됐어우리 저번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마음 맞는 친구끼리 수다 떨듯이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어

먼저간단히 자기소개  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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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저스틴) : 응, 안녕. 저스틴이라고 해. 나는 앨리스랑 같은 년도인 2009년에 호주에 온 올해 9년 차인 이민자야. 사랑하는 딸과 아내와 노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평범한 40대 가장이고, 직업은 PD야. 호주 공영방송인 SBS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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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저번에 SBS 스튜디오에 인터뷰하러 갔을 투어가 인상 깊었어. 멋있고 커다란 오피스에 50 국의 팀이  나라의 국기를 자랑스럽게 걸고 치열하게 방송을 준비하는 모습이 드라마 같았거든. 무슨 작은 UN 놀러 온  같더라일하는 곳과 하는 일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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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호주에는 공영 방송국이 SBS와 ABC 2곳이 있어. 네가 호주가 다문화사회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지를 궁금하다면 내가 일하고 있는 SBS를 잘 관찰해보면 답이 나올 거야. 올해 11월 초를 기준으로 볼 때 SBS 라디오는 74개 언어 방송을 하고 있거든. 

2016년 인구 조사 결과를 보면 호주에서 사는 사람들의 부모 중 한 명이 해외에서 출생한 경우가 무려 45%를 기록했어. 호주 인구의 25%가량은 본인이 이민자라는 사실 놀랍지 않니? 호주 정부가 세금을 들여 SBS라는 공영 방송을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아.

각 나라별로 각기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PD들이 있고 나는 한국어 방송의 PD 중 한 명이야.

우리 한국인들이 호주에 살면서 우리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좀 알아야 하잖아. 하지만 사실 기성세대의 이민자나 혹은 이제 막 호주에 정착한 워홀러, 유학생들이 영어로 호주의 뉴스를 모두 따라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거든. 그런 각국의 이민자들을 위해 우리 방송국은 존재하고 있고 나는 그중, 한국어팀에서 호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다양한 소식을 한국어로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어. 역으로 한인 커뮤니티의 소식들을 호주 사회에 전하는 역할을 할 때도 있는데, 이럴 때는 한국의 문화를 호주인들에게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기회가 되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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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이민자들이 흔하게 가지고 있지 않은 직업군이라 흥미로워한국에서는 청년 희망 직업  하나이기도 하고처음부터 피디를 하려는 계획으로 이민을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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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아니, 천만에! 나는 지금도 생각나는 게, 이민을 결정한 후에 아내가 나한테 조심스러운 제안을 딱 한번 한 적이 있었거든. 내가 외국계 회사를 오래 다녔단 말이야. 그 이야기를 하면서 묻더라. 


“외국 회사까지 다녔는데 호주에서 직장을 구해보는 게 어때?”


내 대답은 단칼에 NO! 였어. 두 번 생각해보지도 않았지. NO!

한국에서 나는 방송국 PD 생활을 하다가 대기업, 그리고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해서 마케팅과 홍보 업무를 주로 했어. 내가 밥벌이하는 일의  골자가 커뮤니케이션이다 보니까 한국어로는 ‘말발’과 ‘글발’에서 누군가에게 뒤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이민을 앞에 두고 잘 생각해보니, 어떻게 보면 내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을 빼앗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말과 글을 사용해서 누군가와 소통하고 설득하는 능력에 자신이 있고 그런 업무를 주로 해온 사람이 갑자기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를 사용해야 한다니! 갑자기 겁이 덜컥 나더라고. 그래서 애꿎은 아내에게 괜히 조금 짜증을 냈던 것 같아. 


“영어를 써야 해. 그런데 무슨 수로 커뮤니케이션 일을 계속하라는 거야?”


그 후로 아내는 두 번 다시 여기에 관련된 말을 꺼내지 않고 묵묵히 나를 지켜봐 주었어. 나는 당시 외국계 기업 홍보실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업무 관련한 대화와 이메일 쓰는 것 등은 익숙했지만 호주인들 사이에서 완전히 영어로만 커뮤니케이션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겁이 나고 ‘소름 끼치는 일’이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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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지금의 모습으로는 그때 그렇게 겁을 먹었을 거라는 것이 상상이 안된다그러면 와서 무슨 일을 하려고 했던 거야 무엇을 하고 싶어서   땅에 온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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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내 꿈은 사실 굉장히 소박했지. 한국에서 오랜 직장생활로 모은 돈으로 작은 카페를 차리려고 했었어. 향긋한 커피를 내리고 남은 시간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여유로운 삶이 내가 원하던 거였어. 나는 대학생 때부터 꿈이 좀 특이했거든. 사람들이 ‘너의 꿈은 뭐니?’라고 물으면 내 대답은 항상 같았어. 


“존경받는 아버지, 사랑받는 남편”


그런데 평범하고 소박한 바람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꿈이 한국 사회에서는 보통 힘든 꿈이 아니라는 것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거야. 넘치는 사랑을 주는 자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사랑받는 남편, 존경받는 아버지의 전부는 아니잖아. 현실적으로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든든한 가장이 되기 위해서는 돈도 열심히 벌어야 하고 보금자리가 될 집도 마련해야 하지 않겠어? 나는 결혼 생활을 정말 무일푼에서 시작했다 보니 더욱 힘들었어.


내 꿈은 가족과 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인데 그때의 내 모습은 정말이지 ‘가족’과 거리가 멀었어.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새벽 5시에 집에서 나가서 밤 11시나 돼야 집에 오는 하루하루를 반복하던 나와 나만큼이나 치열하게 직장생활을 하던 아내는 서로 얼굴을 마주할 시간 조차 없었어. 딸아이의 미래를 위해 그렇게 고생하면 뭐해, 딸아이와의 추억도 만들지 못하고 사랑을 표현할 시간이 없잖아. 내가 그리던 꿈과 현실 간의 괴리가 너무나도 컸어. 그리고 꿈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쓸 수가 없이 휩쓸려가는 과정에서의 자괴감이 가장 힘들었지. 어떻게 보면 늦은 나이에 무모하게 보일 수 있는 이민이라는 것을 감행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어. 

나는 정말 내 꿈을 다시 찾고 싶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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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대기업, 그리고 외국계 회사면 근무여건이 좀 나을 것 같은데 엄청 치열했구나.  좋은 학벌에 탄탄한 직장에 행복한 결혼 생활까지, 한국 사회에서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말 남부럽지 않은 삶을 등지고 왜 호주에 왔을까 늘 궁금했었는데. 한국 생활이 보이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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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결혼을 할 때 우리는 양가의 도움을 하나도 받지 않았어. 직장 초년생일 때 내가 모은 1000만 원과 아내의 500만 원으로 월세집을 구해서 그렇게 신혼생활을 시작했지. 정말 무일푼에 가깝게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치열하게 살아야 했어. 결혼 10년 만에 일산에 25평 아파트를 내 집으로 장만을 한 것을 보면 정말 전쟁하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린 것 같아. 아파트 대출 빚을 다 갚던 그 날 아내와 서로를 위로하며 수고 많았다는 말을 주고받는데 코 끝이 찡하더라. 

그때의 나는 경제적으로 활발할 때 더 확실하게 기반을 마련하고 싶었어. 그래서 내 친 김에 4억 원 정도 하던 25평 아파트를 팔고 대출 4억 원을 더 받아서 8억 원 정도 되는 40평 대 아파트를 샀지. 무리한 감이 있었지만 첫 번째 아파트의 대출금을 갚아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더 쉬울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어. 그때의 나는 30대 후반의 외국계 기업의 부장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아내 또한 영어강사로서 한참 잘 나가고 있었을 때였거든. 

하지만 앞서 말했듯, 성공의 연장선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어. 매일매일 이어지는 강행군, 저녁과 주말이 없는 삶, 함께 할 수 없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 아내와 나는 결국에 이민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지. 한번 이민을 결정하고 나서는 모든 일이 정말 착착 진행되었어. 우리는 회사에 사표를 내던졌고, 우리의 전재산이던 8억짜리 (반은 은행 소유였지만) 아파트를 1억에 전세를 주고는 급하게 출국 준비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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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나같이 20대에 이민을 오는 경우는 일단 와서 부딪혀보자일단은 가서 영주권을  방법을 찾아보자 하는 경우가 많거든그런데 가장의 입장으로 30 후반에 이민을   훨씬  고민이 많았을  같아영주권 신청은 어떻게  생각으로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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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당시에는 영주권 신청이 가능한 직업군에 마케팅 분야가 있었어. 이미 부장급이던 나는 경력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어. 하지만 문제는 역시 영어 성적이었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현지인과 다름없는 영어를 구사해야 받을 수 있다는 아이엘츠 7.0이 필요했거든. 영어를 쓸 수 없는 환경인 한국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회사에 사표를 내자마자 아내와 딸과 함께 유학생 비자를 받아서 호주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어.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하더라. 미지의 세계애 대한 설렘보다는 불안함과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어. 내가 높은 영어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불안한 미래 속에 가장으로서 아내와 딸을 잘 보살필 수 있을까, 아파트를 전세 주고받은 은행 잔고로 얼마나 오래 버텨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그 위태로운 마음이란.

가족들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때 정말 힘들었어. 처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하면서 잔고가 떨어지지 않도록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아파트 청소를 했어. 20대의 유학생과 워홀러들 사이에서 말이야. 나는 아내와 딸을 위해서 반드시 점수를 내야 했기 때문에 신세를 한탄할 겨를도 없었어. 공부와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했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성적이 나왔어. 그렇게 영주권을 받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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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진짜 대단하다나도 해봤지만 7.0이라는 점수가 정말정말정말 유학생들에게 꿈의 점수잖아비슷한 시기에 와서 나랑 비슷하게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동질감이 느껴져그렇게 영주권을 받고 나서는 한숨 돌렸겠네가장 힘든 고비를 넘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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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나도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진짜 시련은 시작도 안 했었더라.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 이더라니까. 내가 호주에서 치열한 생존게임을 하던 3년 동안에 일산 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반 토막이 난 거야. 정신없이 바쁘게 살던 나는 한국에 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던 거지. 집을 팔기 위해 한국에 갔을 때의 상황은 정말 참담했어. 내가 모은 4억에 은행에서 빌린 돈 4억으로 장만한 그 아파트는 나의 전재산이 었으며 우리 가족이 호주에서 살 수 있는 기반이었거든. 그런데 은행에 대출을 상환하고 전세금을 돌려주니 내 손에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반토막이 난 그 가격에도 팔리지 않더라. 고마운 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정리를 했어.


정리를 위해 한국에 가 있는 두 달 동안에는 매일매일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뒷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보면서 종점과 종점을 오가며 계속 생각했지.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남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영주권을 딴 후에 우리가 한국에서 뼈 빠지게 모은 돈으로 산 아파트를 팔아서 그 돈으로 작은 카페를 시작하겠다던 우리 가족의 꿈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어. 얼마나 허탈했는지 그때 심정은 지금도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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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와, 진짜 미쳤다! 정말 얼마나 암담했을지 상상도 안돼. 정말 사람 인생이라는 것이 불가항력에 의해 휩쓸려가는 순간들이 있나 봐. 십몇 년을 쌓아 올린 것을 그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리고 괜찮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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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물론 괜찮지 않았지! 정말 많이 좌절하고, 눈물을 흘렸고, 자괴했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어.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그 시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하고 있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그때의 내가 심적으로 기대고 있던 나의 물질적인 안전망이 갑자기 없어지게 되면서 살아남아야겠다는 마음이 훨씬 강해졌고, 간절한 생존본능과 헝그리 정신이 나를 지배했던 거야.

그때까지 호주에서 3년여를 사는 동안에는 한국인 사장님 밑에서 일하며 시급 $10 정도를 받았었어. 호주 사회에 진입한다는 것은 두려웠고, 40대라는 나이에 무엇을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야. 작은 카페를 운영하면서 살겠다는 생각 이외에는 다른 진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무일푼으로 전락한 그때부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대로 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현지 직장을 구해야만 했어. 이제는 안정되지 않은 임금으로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까!!


인맥도 없는 상황에서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호주 직장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이었어. 어떤 분야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거야. 하지만 사람이 궁지에 몰리니까 두려움이고 체면이고 없어지더라.  이 곳에서 우리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호주 직장을 잡는 것이라는 생각뿐이었어.


그때 내가 의지할 작은 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그렇게 용감하게 도전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 지난날을 돌아보며, 아내와 나는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해.


"내게 온 결핍의 축복이 나를 오늘로 이끌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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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맞아. 나도 발등에 불 떨어질 때까지 태평한 스타일이라 이해할 것 같아. 결핍이 없으면 안주하게 되는 거 같아. 그런데 용기를 냈다고 해서 저절로 호주 직장이 굴러들어 오지는 않았을 텐데, 원하는 직장을 얻을 때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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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구직한 이야기만 해도 밤을 새울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짧게 간추려볼게. 청소일을 하면서 다니게 된 박스힐 TAFE (직업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공립 전문대)에 이력서를 넣어서 사무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어. 환경이나 봉급이 안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일했지. 그러다가 우연히 학교에서 마케팅 담당자가 학교 홍보와 새로운 학생 유치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됐어. 그런데 그걸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케팅 전문가의 본능이 튀어나온 거야. 괜찮다면, 내가 한번 한국에서 하던 대로 분석을 해보고 보고서를 써서 너를 도와줘도 될까?라는 나의 엉뚱한 제안에 흔쾌히, 하지만 별 기대 없이 그는 나에게 책상 하나를 내줬어. 오래간만에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손에 잡으니 날아갈 것 같더라. 부족한 영어는 물어보고 찾아보면서 방대한 양의 보고서를 작성했어. 나의 보고서를 천천히 읽은 마케팅 담당자는 갑자기 총장과 임원들을 소집했어. 그리고는 나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해보라고 하더라.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풀타임 마케팅 부서 직원이 되었어. 그 경력을 디딤돌 삼아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주로 하는 멜버른 위틀리 대학의 대외 협력 메니져로 근무하게 된 거야.

내가 잘하는, 자신 있는, 나의 일을 다시 호주에서 하게 되었어. 그것도 영어로!


위틀리 대학에 면접을 볼 때 총장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어.


“당신의 단점은 무엇인가요?”


“홍보라는 것은 결국 커뮤니케이션 업무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영어로의 소통이 아직 부족한 것이 저의 단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이 얘기를 듣고 총장님이 하신 말씀이 나는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


“커뮤니케이션이 언어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나요? 우리 대학의 직원들은 모두 영어에 능통한 호주인들입니다. 당신이 영어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다른 직원들이 나서서 당신의 영어를 수정, 보완해 줄 겁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지닌 커뮤니케이션 스킬이고 그게 중요한 거죠.”


부족한 영어가 내 경력에 장애물이 될 것이라던 나의 굳은 생각이 다시 한번 깨지는 순간이었어. 그리고 위틀리 대학에서 3년여 일하는 동안 실제로 총장님은 내가 쓴 글들을 친절하게도 Proof reading 해 주셨지. 그렇게 나는 나의 가장 큰 컴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었고 그다음 단계로 올라가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들에 도전할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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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그렇게 천천히 다른 일들을 거쳐서 호주에서 방송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구나영어라는  그런  같아못한다는 것이 가장  걸림돌이고 잘한다는 것이 가장  자산일 수는 있지만 걸림돌이 있어도  해나가는 경우도 있고 자산이 있어도 쓸모없는 경우도 많잖아  때문에 지레 겁을 먹기에는 영어 말고도 우리가 내세울  있는 다른 요소들이 얼마든지 있기는 나도 처음에 키친에서 막내일 때는 영어 발음 때문에 엄청 구박받았는데, 죽자고 일해서 내가 헤드까지 달고 나니까 호주 얘들이  발음에 알아서 맞추더라키친 영어가  수준으로 하향평준화 되버리더라니까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면서 자리를 잡았잖아 우여곡절 많은 8 동안 이민을 결정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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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솔직히 호주에서 생활하며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 같아. 나 자신의 고생도 힘들었지만 사랑하는 딸과 아내가 고생하는 것을 바라봐야 하는 순간들에는 가장으로서 내가 얼마나 무기력하게 느껴졌는지 몰라.  그렇지만 호주 이민을 후회한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만에 하나 모든 것이 실패해서 한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이곳에서의 시간과 경험들이 나의 큰 자산이 될 것이라는 근자감도 있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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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마지막으로그때의 너와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 이민을 준비하고 있는 30, 40대의 한국의 아빠와 남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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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얼마 전에 한국 슈퍼에서 장을 봤는데 우연히 한국 여성 두 분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어. 무심코 지나칠 만한 가벼운 말들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8년 전이 생각나더라. 그분들의 말이 바로 8년 전 내가 가졌던 생각들이 었거든. 


“남자들이 호주에 와서 할 일이 없어요. 골프를 치다가 질리면 할 일이 없죠. 

한국에서 잘 나가던 남자들이 호주에서 얼마나 힘들겠어요?”


중년의 남자들은 사회적 관습으로 학습된 체면 때문에 실패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아. 한국에서는 사회적으로 잘 나가던 중년의 남자들은 나이가 훨씬 젊은 사람들, 그리고 호주 현지인들 사이에서 영어로 경쟁하고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거든. 할 일이 없다기보다 거절과 실패를 무릅쓰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 자체 어려운 거야.  화려한 경력과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도 그걸 꺼내 보일 기회를 찾을 용기가 없는 거지.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어. 왜냐하면 내가 그랬으니까.

그 대화에 불쑥 끼어들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어. 그래서 그냥 꾹 참았지.

그 날 그분들께 드리고 싶었던 말 , 그리고 이민 초기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료 한국 남자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로 나의 이민 이야기를 마무리할게.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경력을 쉽게 포기하지 마세요. 그 능력을 살려서 호주에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저도 안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간절하다면 언젠가는 꼭 이룰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짧지 않은 내 이야기 잘 들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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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호주 이민 생활 중이거나, 호주에서 이민 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민을 생각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담 없이 댓글이나 인스타 디렉트 메시지를 줘! 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필요도 없어. 지금 이민의 과정을 밟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민에 대한 좋은 점과 후회되는 점도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동료들의 참여 기다릴게!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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