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업체를 하며 호주에서 사는 이야기
세월호 참사 1주기가 되던 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자리에서였어.
멜버른의 야라강 다리가 노란 리본으로 뒤덮인 2015년 4월 16일 - 나는 자원봉사하시는 분들을 위해 도시락을 준비해서 야라강으로 갔고 노란 리본을 매다가 엉엉 울어버렸지. 어찌나 서럽게 울었던지 교민잡지에서 취재차 나오신 분께서 ‘특별한 사연이 있으신지..?’ 하며 마이크를 들이미시더라.
나는 부조리와 막막함을 앞에 두면 어쩔 줄 몰라서 울어버리는 스타일이야. 그날도 나는 울었어. 하지만 그 날 처음 본 제이는 나와 반대로 소리 내고 분개하는 사람이었어.
정부의 안일한 대처와 교민사회의 무관심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제이.
내가 싸온 도시락을 제일 맛있게 먹던 제이.
영화에서 튀어나온 운동권 복학생 오빠 같던 제이.
제이와 나는 활동반경이 겹치지 않아서 마주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잊고 살았지.
1년쯤 후에야 나는 그를 다시 만났어. 박근혜 탄핵 집회 때 촛불을 들고, 마치 데자뷰처럼.
그때도 부조리를 대하는 우리 둘의 태도는 극명히 대조되었지. 구석에서 쭈그리고 애꿎은 잔디만 뜯으며 울음을 참던 나와 사람들 앞에 서서 한국의 정부와 미디어에 속아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힘주어 전하던 제이. 변한 게 없는 우리 운동권 복학생 오빠는 자기를 꼭 닮은 돌도 안된 아들을 품에 안고 있었어. 칭얼거리는 아들을 달래며 마이크를 잡고 이 아이들이 살아갈 다음 세대를 위해서 더 분개해야 한다고, 우리가 또 속지 않도록 기득권이 돌아가는 구조를 알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나는 멀찌감치 구석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어.
그렇게 나는 제이를 다시 만났고 그 후로는 청소업체 사장과 손님의 입장으로, 혹은 레스토랑 주인과 손님의 입장으로 몇 번 다시 보면서 우리는 천천히 친해지고 있는 중이야.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 중 한 명이야. 나는 노동자 계층인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이 노동이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고 생각하거든. 노동을 해야 하는 내가 비참하다고 느낄수록 정말 노동이라는 것은 비루하고 비참한 것이 되는 것 같아. 나는 일을 하는 사람인 내가 좋아. 몸을 움직여서 세상에 무언가를 더하고 쓸모가 되는 하루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제이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인 거야. 제이의 페이스북을 보다 보면 그게 자연스럽게 느껴져. 청소를 업으로 삼으며 제이가 만나는 고객들과의 에피소드들,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호수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잠깐 즐기는 여유의 고마움, 다양한 곳들을 청소하면서 배우는 각각 다른 문화에 대한 신기함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이 사람은 지금 하는 일에 참 만족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SNS를 활발히 하는 제이는 청소를 업으로 하며 느끼는 점들, 호주에서 사는 이야기, 육아 이야기, 사회 구조와 현상에 대한 의견 등 다양한 글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소통하고 있고 그런 제이의 페이스북을 읽는 걸 나는 참 좋아해. 의견이 같을 때도 다를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소통하고 수용하려는 자세로 의견을 주고받는 제이가 나는 마음에 들거든.
오늘은 이 알면 알수록 흔치 않은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수배자였던 운동권 오빠에서 유명학원 영어강사였다가 뜬금없이 멜버른에서 청소업체 사장으로 살고 있는 제이가 내가 오늘 소개할 3번째 호주 청년 이민자야.
이 특이하고 재밌는 오빠가 한국에서는 어떻게 살았고 영어는 어떻게 정복했으며 호주에는 어떻게 오게 됐는지 나는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들었으니 너도 재미있게 읽었으면 좋겠어! :-)
A : 안녕 제이! 반가워. 처음에는 튕기더니! 마음이 왜 바뀐 거야?
J : 미안 미안^^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러웠지. 그런데 앨리스 네가 내 글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고 필력이 좋다고 칭찬해주는 말에 기분이 엄청 좋아지는 거 있지. 나 사실 말은 진짜 잘하는데 글은 잘 못써서 그게 살짝 콤플렉스였거든. 역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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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으응, 정말 고마워. 짧게 소개 좀 해줄래?
J : 나는 호주에 온 지 9년 차가 된 30대 후반의 한국 남자야. 이민 과정을 마치고 영주권을 받은 지는 3년 정도 됐다. 지금은 청소업체를 운영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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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낯선 땅에서 이민이라는 높은 문턱을 넘고 본인 사업까지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원하는 걸 이루게 된 요인 같은 게 따로 있었던 것 같아?
J : 내가 목표하던 이민에 성공했던 가장 큰 요인은 남들과 좀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같아.
왜 이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영어, 기술, 돈이라고 하잖아. 나는 그 이전에 내 곤조라고 할까? 남들과 다른 가치관을 고집하는 성향 같은 게 크게 작용한 것 같아.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해 보이는 내가 남들과 다른 게 하나 있다면
"메인 스트림에서 벗어나서 생각하기" 거든.
나는 좀 그런 스타일이야. 누가 하지 말라는 거는 참 열심히 하고 하라고 하는 거는 있는 힘껏 ‘안’하는 청개구리란 얘기지. 너도 알다시피 한국사회는 굉장히 천편일률적인 사회야. 세상이 정해준 길과 그 방향을 따라야 하고 거기서 요구하는 부분에서 벗어나면 안 되지. 그 길에서 1등 하면 모두 인정해주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한심하다는 얘기를 듣는 곳이야.
한번 잘 들여다봐봐. 우리 모두 고등학교 때까지 똑같은 교복을 입고 상위권 대학 진학 만을 목표로 한 교육받고, 스스로의 생각과는 상관없는 주어진 정답을 달달 외우는 방식으로 공부를 해. 혹독한 입시가 끝나면 남자 같은 경우는 대부분 1년 정도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를 가. 군대를 전역하고는 다들 취업준비에 몰두하지. 취업에 성공하게 되면 조건 좋은 사람과 결혼해야 하고 결혼하면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야 하고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학원을 보내고.... 5천만 국민이 바라보는 방향이 대부분이 비슷해.
근데 이거 생각해보면 굉장히 섬찟한 거다, 안 그래? 진짜 끔찍한 거야!
그런데 남들과 함께 이 길을 걷지 않으면 형편없다 소리 듣고 정신 못 차린다는 얘기를 듣는 곳이 한국이야. 일반 직장을 다니지 않고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본 업으로 삼는다던가 시민단체에서 일을 하면 철딱서니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지. 예술하는 사람들도 정당한 대접은 못 받는 거고. (인정받는 상위 1%는 물론 제외하고 하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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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나만큼이나 한국 사회의 부조리에 치를 떨고 있구나. 정말 공감해. 그런 거 정말 싫지. 근데 그렇게 치를 떨게 된 계기가 있니?
J : 나는 대학시절 소위 말하는 운동권 학생이었어. 이 운동권이라는 낙인이 얼마나 무섭냐 하면 나랑 친하게 지내던 후배들도 ‘운동권'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피해 다니더라고.
“J 옆에서 물들지 말고 그 시간에 영어공부나 하는 게 낫다."는 얘기들이 동기와 후배들 사이에 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상처를 받았나 몰라.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있을 정도니까!
한국사회의 얽히고설킨 모순들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싶었어. 책도 엄청 읽었고, 이념과 사상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기야. 부조리한 대한민국의 모습이 싫었고 작은 힘이지만 무언가 바꿔보고 싶다는 열정이 넘쳤었지.
그러다가 나는 학생회장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배자가 되었어.
내가 대학 때는 단과대 이상 학생회장이 되면 자동으로 한총련 대의원 자격이 주어졌는데 당시에 한총련은 이적단체였거든. 사실 탈퇴서 한 장 쓰면 그만인데 나는 그게 싫었어. 비록 수배생활을 감행해야 할지라도.
그때의 내 생각은 이랬어. 자유민주통일을 주장하던 한총련을 지지하고 활동했지만, 그런 '한총련이 옳기' 때문에 탈퇴하지 않겠다 라는 마음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에서 거부감이 들었던 거야.
아니, 내가 어떤 단체에 가입을 하든 말든 왜 국가가 상관해?
국가가 개인의 단체가입,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해도 되는가라는 삐딱한 생각이 드니까 정말 굽히고 싶지 않더라. 그래서 나는 탈퇴서 작성을 거부하고 수배자의 길로 들어섰지. 한 1년 정도 신나게 도망 다녔어. 결국에는 붙잡혀서 재판 선고까지 구치소에서 두 달 징역을 살았어. 판결이 나왔지.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선고를 풀려 났어.
당시에는 징집대상자들 중에서 집행유예 받고 징역 1년이 넘으면 공익으로 빠지고 1년이 안되면 상근 예비역으로 빠졌거든. 그래서 나는 상근예비역으로 군생활을 하게 됐어. 그때는 정말 암담했는데 지나고 보니까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더라. 공익은 이병 제대라 어디 가서 군대 얘기하기 힘들거든. 근데 상근 예비역은 병장 제대잖아. 남자들 사이에서 이거 꽤 중대 사안이다? (ㅋㅋ) 그리고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자유롭게 시간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이 시간을 잘 활용했던 게 나한테는 정말 큰 재산이 됐거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군생활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면 복권이 됐기 때문에 범죄기록도 깨끗해.
만약 범죄기록이 남았다면 호주에서 영주권 신청할 때 문제가 됐을 텐데 천만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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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오, 뜻밖의 꿀이었네? 상근 예비 역할 때 시간을 어떻게 활용했는데 그렇게 큰 재산이 되었다고 하는 거야?
J : 그때 열심히 예비군 훈련 통지서를 돌리고 정시에 퇴근하고 집에 오니 딱히 할 일이 없는 거야.
내가 그때 당시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내가 앞으로 무얼 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시기였거든.
친구들처럼 컴퓨터 게임에 빠져 살기는 싫었어.
그래서 수능을 다시 봐서 서울대에 도전해 볼까 (내가 그때 학벌 컴플레스가 조금 있었어.) 대학원을 갈까, 아니면 일단 취업을 할까 고민을 했는데 이 시간에 어쨌든 영어를 공부해놓으면 앞으로 어떤 진로로 가더라도 써먹을 거 같더라고. 그래서 영어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어.
그 당시에 영어공부는 두 가지 갈래가 있었어.
토익공부 아니면 어학연수
한국 사람들은 이런 것들까지 유행 타는구나 싶더라. 영어공부를 시작하면 죄다 토익공부를 하거나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가더라고.
그런데 나는 이런 거 싫어한다고 했잖아. 남들은 별생각 없이 남들 다 하니까 해야 되나 보다 하고 유행처럼 따라갈 때 나는 이걸 왜 해야 돼? 저렇게 하면 영어 잘하게 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관찰을 먼저 해봤어. 보니까 토익공부는 점수 높이 기일 뿐이지 실제 영어 실력 하고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것 같았어. 900이 넘는 고득점자인데 외국인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걸 보고 나는 이건 진짜 아니다 라고 생각했어.
그때가 어학연수가 유행하기 시작할 때인데 가서 한국애들하고 술만 먹고 놀러만 다니지 영어 늘었다는 사람은 거의 없는 거야. 그러다 보니 어학연수=돈지랄로 보이더라.
그래서 나는 나만의 목표를 세웠어.
나는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게 목표이다.
학원이나 과외 없이 오로지 독학을 1년 해서 어학연수 1년 다녀온 애들보다 의사소통을 잘해보자.
그때 내가 25살이었는데 영어에 대해서 정말 아는 게 없었어. 중학교 때 to 부정사가 나오면서부터 영어의 개념을 잡는 것에 실패한 거지. 거의 백지상태였다고 보면 돼.
그래서 일단은 나 나름의 공부법을 만들었고 그걸 매일 실천했어.
제일 먼저 중학교 1학년 영어교과서와 테이프를 샀어. 그래서 하루에 한 과씩 본문 전체를 아예 외우는 방식으로 좀 무식하게 부딪혔어. 암송은 내가 테이프에 나오는 발음 속도 억양이 똑같이 나올 때까지 100번이고 200번이고 따라 했고 모르는 문법은 나올 때마다 사전처럼 문법책을 찾아서 공부하는 식으로 했어.
단어 공부는 절대로 하지 않았고 문장을 외우는 방식으로 단어를 익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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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그렇게 매일 실천하는 게 그 놀기 좋은 나이에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다. 나는 진짜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놀았을 때 넌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근력을 키웠구나. 그럼 한국에서 독학으로만 그렇게 영어를 한 거야?
J : 군 생활하면서 1년 반 정도를 혼자서 영어 훈련을 했고 전역하고 6개월 정도 있다가 좋은 기회가 생겨서 뉴질랜드에 가게 됐어. 심심하니까 친구도 사귈 겸 해서 난생처음 어학원에도 등록을 했지.
학원에서 처음에 레벨테스트를 받는데 스피킹 테스트했던 원장이 그러더라.
"한국인들은 리딩, 그래머가 스피킹보다 높은데 너는 반대야. 스피킹이 리딩 그래머보다 두 단계 높은 경우는 네가 처음이야."
당시에 한국 친구들이 다들 나한테 물어봤어.
"너는 해외 다른데서 살다왔어?”
물론 난 아니라고 대답했지. 아니니까! 그러면 따라오는 말은 언제나 이랬어.
"근데 어떻게 공부했길래 이렇게 영어를 잘해?"
당시는 10년도 더 전이라 대부분 영어를 못했어. 그래서 뉴질랜드 사람들도 나보고 미국에서 왔냐고 하고 한국 애들도 어떻게 공부했냐고 묻고는 했었지. 근데 지금은 아무도 안 물어봐. 지금은 영어 잘하는 사람이 천지에 널렸잖아!! 어쨌든 그때 내가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어도 KIWI(뉴질랜드 사람들)들하고는 너무 큰 벽이 있더라. 분명 세컨드 랭귀지로 영어 하는 애들 중에는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못 봤는데 현지인을 만나서 얘기하면 그들의 영어는 완전 넘사벽인 거야.
그래서 고민을 했지. 저 벽은 어떻게 넘을까.
고민 후에 나온 답은 "그들의 일상 언어를 암송하자." 였어.
한국에 돌아와서는 드라마와 영화를 무작정 외우기 시작했어. 한 30편 정도는 달달 외운 것 같아. 당시에 나는 졸업을 위해 한 학기가 남았었는데 학교 복학해서는 모두 영어 관련된 수업만 들었어. 학생 운동한다고 학점이 개판이었는데 마지막 한 학기는 다 A+ 나오더라. 근데 웃긴 건 전공수업에서 A+는 하나도 없어.
정말 영어에 미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면서 졸업 후에는 뭐할까를 생각했지. 죽자고 영어를 팠으니 이걸 써먹고 발전시키면서 돈을 벌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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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맞아, 10년 전만 애도 영어 잘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 좀만 잘해도 다들 우와 했는데 요새는 다들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는 하더라. 영어를 파는 김에 써먹으면서 더 공부하고 싶어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게 됐구나. 막 정하는 거 같아도 나름의 방향성이 일정하네.
J : 처음에 구리에서 특목고 보내는 영재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원장님이 나를 미국에서 대학 나온 교포 Bob이라고 학생들과 학부모님께 소개를 했지. 나는 그때는 물론 지금도 미국 땅에 발가락 하나 디뎌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정말 교포이거나 한 학부모가 말 걸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
거기에서 1년 있다가 당시에 가장 크고 유명했던 대형학원으로 이직을 했어. 그 바닥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월급도 많이 받았고 참 안정적이었지. 근데 1년 지나니까 재미없더라. 중간고사, 기말고사, 방학이라는 어떤 패턴에 끼워져서 획일적으로 가르치는 영어가 너무 싫었어.
그래서 1년 딱 채우고 사표 쓰고 나왔어. 그리고는 호주로 온 거야.
남들 다 겪는 영어시험 스트레스는 미리 한국에서 다 받고 왔기 때문에 영주권 준비하면서 영어 때문에 힘든 점은 전혀 없었지. 되려 아이엘츠 과외를 하면서 용돈벌이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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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와 진짜 영어 하나 제대로 파서 인생 역전했구나. 교포 출신 영어 강사라니. ㅋㅋㅋㅋ 나는 호주에서 엄청 영어로 고생하면서 한국에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영어 좀 할걸, 엄청 후회했거든. 부럽다. 한국에서는 밥벌이로 써먹고 호주에서까지 잘 써먹다니.
J : 조금 더 말해보면 이 영어 실력은 적응과정과 영주권 준비에도 도움이 되었고 나아가서 나의 사업을 시작하고 키워나가는데도 하는데도 결정적으로 정말 큰 힘이 되었어. 이 청소업계에서 종사하는 사람들한테 내가 참 많이 듣는 이야기가 뭔지 알아?
이 짧은 기간 안에 이렇게 사업 키우는 사람 없다는 이야기야. 기분 좋은 이야기이지. 그리고 모두가 인정하듯 내가 사업을 끌어나가고 키울 수 있던 것은 나의 영어실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어.
대부분 한국인 사장님들은 청소를 하청으로 많이 해. 아웃소싱 같은 개념이야. 호주 업체에서 따낸 일들을 어느 정도 떼고 작은 한국 업체에 넘겨주면 받아서 일하는 거지. 근데 우리 회사에서 하는 일들은 대부분이 원청이야. 중간 마진을 떼는 과정 없이 내가 직접 고객을 영입하는 구조지. 내가 직접 영업할 수 있고 일 문의가 들어와도 원활한 의사소통으로 잡을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강점이었어. 영어가 준비가 되지 않은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업체들의 대부분이 일을 따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겨도 영어가 딸려서 놓치기도 하고, 언어에서 자신감이 없으니까 고객을 만나게 되더라도 대화를 자신감 있게 리드를 못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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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영어가 정말 호주 생활의 큰 방패가 됐구나. 영어만 죽자고 판 세월을 보상받고 있네. 너는 이민을 하면서 영어가 너의 최대 강점이었다고 생각해?
J : 그래 맞아, 영어를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큰 힘이 돼주었지.
하지만 영어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은 ‘내 청개구리 기질’이라고 생각해.
내가 원하는 것들을 비교적 이루고 돌아보니까 나의 청개구리스러움 때문에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거더라고.
내가 사회의 틀을 거부하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수배자가 되고 징역을 살았을 때 사람들은 나를 보며 다들 신세 망쳤다고 했어. 정신 못 차릴 때부터 알아봤다며 손가락질했어. 하지만 나는 그 덕분에 상근예비역에 가게 되었고, 상근예비역을 갔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어. 영어공부를 할 때도 남들 다하는 방식을 거부했기 때문에 토익 900점은 없지만 실제로 통하는 의사소통 능력을 갖출 수 있었어. 월급 많이 받고 잘 나가는 안정된 직장인으로 안주할 수도 있었지만 그놈의 청개구리 기질이 튀어나와서 다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었어. 결과적으로 지금 나는 더 좋은 환경에서 나에게 더 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어.
계속 나를 둘러싸고 있는 틀을 스스로 깨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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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맞아, 세상일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것 같아. 나도 사기당해서 오픈한 레스토랑이 결국에는 내 인생역전이었어. 그때는 정말 인생 망한 줄 알았었는데. 나 호주 간다 그럴 때 정신 못 차린다는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었는데, 호주를 온 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어. 세상 일들은 참 이상하게 연결되는 것 같더라.
어쨌든 멋있는 청개구리 제이, 너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어. 고마워.
그럼 마지막으로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 동생,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J : 일단 세상이 요구하는 잣대로 너를 끼워 맞추지 말란 말을 꼭 해주고 싶어.
그리고 그 잣대로 너 스스로를 평가하게 되는 일을 우리 모두 경계해야 해.
미디어와 보이는 것들에 쉽게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
남을 위한 삶을 살지 마. 너의 인생이니까 꼭 네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보길 바래.
내 글을 읽어준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말도 함께 전하고 싶어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호주 이민 생활 중이거나, 호주에서 이민 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민을 생각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담 없이 댓글이나 인스타 디렉트 메시지를 줘! 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필요도 없어. 지금 이민의 과정을 밟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민에 대한 좋은 점과 후회되는 점도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동료들의 참여 기다릴게!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