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by 앤N


여름을 그토록 싫어하던 난데, 세부에 살다 보니 더위에 적응이 됐다. 겨울에도 30도를 웃도는 기온이 영하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한국도 따뜻했으면 좋겠다.


세부 어학원엔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필리핀으로 온 다국적 학생들이 모여 있다. 필리핀 강사뿐 아니라 미국, 영국, 호주 강사도 있어 다양한 억양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미국식 영어를 배워서 다른 억양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받아쓰기를 하며 형편없는 점수에 놀랐는데 내가 듣던 단어 발음과 다른 탓이었다. ‘anxiety’가 왜 ‘언사이어티’야, '앤자이어티'에 가깝지


이 답답함도 두 달 밖에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웠다. 나보다 어린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대학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학생들이 꿈을 꾸는 아름다운 그 시절이 천천히 흐르길 바라며 종종 상념에 빠졌다.


“글 씨~ 오늘 날씨 좋죠?"

"더운데요."

"어휴, 글 씨 T에요?"

"강훈 씨는 F예요?"

"맞아요! 어떻게 알았지?"


어학원에서 가장 많이 대화하는 사람은 김강훈, 김 대리다. 김대리는 1년 파견 근무를 와서 나보다 10개월 더 있어야 한다.


"이번 주 주말에 스쿠버 다이빙 해볼래요?"

"저는 한 번도 안 해봤는데요? 그리고 저 수영 못해요."

"수영이랑 상관 없어요. 저도 깊은 물 무서워하거든요? 수영장에서 편도로 가는 것도 숨차고요. 근데 산소통 매고 바다 40m 아래까지 들어가면 와! 진짜심해의 적막감이 얼마나 평온한지 몰라요. 한 번 빠지면 못 헤어 나온다니까요? 그리고 귀여운 물고기랑 하늘을 나는 기분이에요. 하다 보니까 재밌어서 저는 Master 자격증 준비중이에요. 이 좋은 거 나 혼자 하기 너무 아쉬운데, 같이 해봐요! 글 씨도 세부 왔는데 추억 쌓고 가면 좋잖아요."


강훈씨가 스쿠버다이빙 홍보를 하는 듯 와다다 극찬을 쏟아내는 바람에 홈쇼핑 마감 5초 전처럼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럴까요?"

"오케~이! 그럼 토요일 오전 9시까지 어학원 정문으로 오세요. 몸만 오면 나머진 거기 다 있어요!"





무슨 정신으로 내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고 했을까. 수영하다 잠깐 기절까지 한 적 있는 내가, 외국에 나오니 공포를 극복하고 싶었던 걸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다이빙장에 도착했다.


기초 이론 교육을 듣고 얕은 물에서 잠수 연습을 했다. 옆에 있던 어떤 남자도 예전에 물 공포증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엔 발이 닿는데도 잠수를 힘들어했는데, 극복해 낸 게 대단하다.


주말마다 스쿠버다이빙 연습을 하고 저녁엔 동화 씨와 통화를 했다. 이렇게 멋진 세상이 있는 줄 알았으면 빨리할걸… 어느 날은 강사님과 함께 바닷속에서 신호를 주고받다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산소통은 어느새 40m를 가리키고 있었다. 강훈 씨가 말한 기분이 이거구나…


한글학자인 아버지의 반대에도 외국 문화를 공부하려 애쓴 나의 고집이 틀리지 않은 기분이었다.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하고 깊은 바닷속에서 나는 내 존재의 의미를 고민했다. 강사님의 지시를 보고 수면 위로 방향을 틀었다. 다리만 동동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어두운 터널을 지나 밝은 빛을 향하는 느낌으로 힘껏 오리발을 흔들었다.


“글 씨, 오길 잘했죠?”

개운하게 씻고 들떠있는 나에게 강훈 씨가 다가왔다.


“네. 고마워요, 강훈 씨.”

“뭘요, 글 씨랑 같이해서 더 재밌었어요. 벌써 다음 주에 한국 가시네요?”

“그러게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건강히 지내시고요.”


“한국 가서도 연락할 거죠?”

“음… 글쎄요?”

“한국에도 다이빙 스팟 있어요. 제가 소개해드릴게요.”

“하하, 네. 고민해 볼게요.”





다이빙 수업이 끝나고 당 충전을 위해 레몬 사탕을 먹으며 어학원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동화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글 씨!”

“동화 씨~ 낮에 웬일이에요?”


“밖에 첫눈 와요!”

“첫눈이요?… 여기는 그냥 더워요.”

“아 맞다… 같이 보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고마워요. 동화 씨 지금 어딘데요?”


“길모퉁이 북카페 가고 있어요. 첫눈을 글 씨랑 보고 싶은데, 글 씨가 여기 없으니까 글 씨를 아는 사장님과 보려고요.”

“하하하하하하하하! 동화 씨 진짜 못 말린다니까. 한국 가서 같이 진짜 첫눈 봐요.”

“글 씨가 한국에 없으니까 오늘 건 퉤 퉤 퉤! 우리 둘이 같이 본 걸 우리 첫눈이라고 해줘요.”


“좋아요. 그럼 눈 내릴 때 북카페 같이 가요.

이제 북카페 장작 피워서 난로도 엄청 예뻐요.”

“우와~ 2개월간 진~짜 가고 싶었는데, 알려줘서 고마워요.”

“뭘요, 오늘도 다이빙하고 있어요?”





동화 씨의 질문에 옆에 강훈 씨가 타고 있는 것도 잊고 오늘의 감정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고독한 느낌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고. 바다가 다 괜찮다고 안아주는 느낌이 포근했다고. 아빠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진로를 선택했지만 내가 행복한 길이 결국엔 아빠도 행복한 길일 거라고.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니 동화 씨가 전화기에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로 말했다.


"글 씨, 얼른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동화 씨의 말에 부끄러워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남자친구예요?"

"아니예요."

직설적인 강훈 씨의 물음에 우리가 무슨 사인가 궁금해졌다.


"엄청 신나게 이야기를 하길래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

"그래요? 남자친구는 아녜요."

"그럼, 내일 저녁 같이 먹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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