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아팠다. 이제는 그만, 숨고만 싶었다. 연애를 하더라도 사랑만은 피하고 싶었다. 더 이상 사랑을 앓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겁쟁이가 된 채로 무의미한 만남과 이별을 반복했다. 사랑하지도, 아프지도 않은 그저 그런 미적지근한 상태로. 만남도 이별도 내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만남이 있으니 이별도 당연한 순리였다. 어느 순간부터 이별은 상실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의 시작점처럼만 여겨졌다.
예전의 나는 능동적이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도 내가 먼저 표현하지 않았다. 고백은 늘 상대의 몫이었고, 누군가 다가오면 마음이 없어도 일단 한 번 만나보고 판단하는 식이었다. 겉으로는 안전해 보였지만, 그런 만남은 점점 나를 지치게 했다. 마음이 없는 관계는 공허했고, 억지로 이어진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다 가장 소중히 여겼던 사람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카페 모서리 자리에서,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 사이로 그가 건넨 말은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그 순간 나는 예감했다. 한쪽에서 뱉은 이별의 말은 둘의 관계에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을. 마음은 붙잡고 싶어 몸부림쳤지만, 입술 끝에서는 선뜻 “알겠어”라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웃음과 울음이 교차하며 내 안에서 뒤엉켰다. 사랑의 무게가 처음으로 전신을 짓눌렀던 순간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랑을 회피하는 태도가 오히려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는 것을.
시간은 천천히 그 상처를 덮었다. 흔히 말하는 “시간이 약”이라는 문장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돌아보면, 이미 무뎌진 자신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무뎌진 마음 한편에서 다시 사랑하고 싶은 갈망이 피어올랐다. 단순한 연애가 아닌, 진정한 사랑을 향한 열망이었다.
그 무렵, 우연한 만남이 있었다. 처음엔 조심스러웠다. 또다시 마음을 열었다가 상처받을까 봐.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예전처럼 기다리지 않고, 내가 먼저 마음을 표현해 보기로 했다. “오늘 좋은 하루였어”라고 말하는 것, “보고 싶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 작은 용기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 활동”이라 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사실을 잊고 있었다. 사랑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는 점점 메말라갔다. 사랑은 기다림이 아니라 선택이었음을, 회피가 아니라 참여였음을 그제야 배운 것이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는 다르다. 퇴근길에 먼저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말하고, 문득 그리워져서 “밥 먹었어?”라고 메시지를 보낸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말들이 오히려 서로를 붙드는 다리가 되었다. 때로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안아주며 마음을 전한다. 예전 같았으면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하며 삼켰을 말들을 이제는 자연스럽게 건넨다.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은 나를 타인에게 노출시키는 언어다”라고 했다. 그렇다. 사랑은 나를 가장 연약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가장 진실되게 만든다. 기대와 두려움, 몰입과 회피, 애정과 상처가 한꺼번에 몰려오지만, 그 모순 속에서 비로소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가끔 무서울 때도 있다. 이렇게 마음을 열었다가 또 상처받으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그 두려움도 이제는 부정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결국 서로의 상처에 상처를 맞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 사실 겁이 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내 영혼의 가장 여린 곳을 내보이는 용기다.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상대방도 자신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치유가 아닌 공명을 통해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랑을 피해 다니던 나는 이제, 두려움과 외로움까지 껴안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더 이상 겉으로만 강한 척하고 싶지 않다. 혹시 또 아픔을 겪는다 해도, 그 아픔 또한 사랑의 일부라 받아들이려 한다. 먼저 다가가고, 먼저 마음을 열고, 먼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기르고 있다.
사랑은 언제나 나를 흔들지만, 동시에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그것은 나를 연약하게 하지만, 동시에 나를 더 넓은 세계로 열어젖힌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단순한 만남이 아닌, 마음과 마음이 온전히 닿는 그 순간. 그 순간에야말로, 내가 가장 나답게 존재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