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
앞만 보고 달려온 직장인의 슬픈 자화상
나는 27년간 직장인으로 살았다. 외국계 기업, 고등학교, 교육출판사, 아동복지재단 등에서 기획자로 교사로, 사업책임자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무진장 애썼다. 오랜 세월 경주마처럼 달렸다. 이젠 너무 지쳤고, 할만큼 했다 싶은 어느 날 상황에 떠밀리듯 트랙에서 내려왔다. 후련할 줄 알았다. 이젠 자유가 기다릴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아등바등 살았는지 엄청난 회의가 몰려왔다.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듯이 허무함의 바람이 무시로 지나갔다.
니체는 인간 정신의 변화를 ‘낙타-사자-어린아이’의 3단계로 비유한 바 있다. 1단계는 무거운 등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단계이다. 시키는 일을 수동적으로 수행하기만 한다. 2단계는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며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포효하는 ‘사자’의 단계이다. 2단계 역시 기존 질서를 거부하기만 할 뿐 새로운 창조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마지막 3단계는 아이가 춤을 추며 놀이하듯 자신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어린아이' 단계이며,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단계라고 설명한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1단계의 '낙타'처럼 살아간다. 성실하고 묵묵하게 주어진 일을 쳐낸다. 한 곳에 매어 있는 것이 답답하다 여겨져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직장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특별한 재능이 있고 준비된 사람들만의 특권이라 여긴다. 매달 안정적으로 통장에 꽂히는 월급에 취해 직장 밖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다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한다. 모든 직장인에게는 ‘유효기간’이 있다는 점이다. 힘이 빠진 낙타는 언젠간 퇴출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잊고 산다.
설국열차 기계실 아이들이 그 자리에 더 이상 맞지 않을 만큼 몸이 커졌을 때 순식간에 열차에서 사라져야 했듯, 모든 직장인 역시 언젠가 열차에서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 눈발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추운 겨울날, 텅 빈 플랫폼에 가방 하나 덩그러니 들린 채. 열차 하차시간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벼락같이 그날이 온다. 플랫폼에 내린 사람들은 한동안 갈 곳을 잃은 듯 깊은 우울과 상념에 잠긴다. 온몸 바쳐 충성한 그 조직은 과연 나에게 무엇이었나? 젊은 날의 열정과 시간을 다 바치고, 소중한 가족을 저만치 후순위로 미루면서까지 헌신했던 그 일이 내 인생에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나? 전전긍긍 눈치 보며 살아온 세월이 한순간 야속해진다.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긴 작품 <남아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스 역시 전형적인 '낙타'의 삶을 산 인물이다. 그를 보면 '사유 없는 열심'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무한지 알 수 있다. 34년간 그는 영국 귀족의 대저택에서 '집사'로 일하는 동안 오로지 자신이 맡은 본분에만 충실했다. 그에게는 '위대한 집사'가 되겠다는 일념이 있었다. 개인 휴가 한번 쓰지 않고, 저택을 절대 벗어나지 않았다. 중요한 연회를 총괄하느라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자신을 흠모하는 여인의 구애도 모른 척 외면했다. 오로지 그의 관심사는 자신이 모시는 달링턴 경과 대저택을 물샐틈없이 서포트하는 일이었다. '위대한 집사'를 향해 가는 길에 '사생활'도 '사랑'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의 철저한 자기 관리 모습은 마치 직장인의 꽃인 '임원'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일에 매진하는 회사원의 모습과 유사하다. 스티븐스는 ‘품위’에 걸맞은 자질을 갖추기 위해 백과사전과 상류층이 등장하는 연애소설을 읽어 고급어휘는 구사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의 기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상사가 2차 대전을 전후해 정치적으로 어떤 위험한 행보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맡은 바 소임에만 충성을 다할 뿐이다. 오늘날의 대다수 직장인이 업무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각종 경제서적과 마케팅서적, 영업 전략서와 미래기술동향은 열심히 공부하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일이 차지하는 의미와 가치, 속한 조직의 방향성과 도덕성에 대해 묻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모시던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로 몰려 세간의 지탄을 받고 불행한 선택을 하게 되자 스티븐스가 그토록 정성을 다해 헌신했던 집사생활 34년은 남들에게 숨겨야 할 부끄러운 과거가 되어버리고 만다. 저택을 인수한 미국인 새 주인에게 그 저택을 가장 잘 아는 총괄집사였다는 이유로 저택과 함께 고용 승계되는 처지가 된다. 마치 1+1처럼. ‘위대한’ 집사의 꿈은 과연 그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였고 무엇을 남긴 것일까? 스티븐스의 초라한 현재 모습에서 직장인들의 슬픈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대다수의 직장인들도 스티븐스처럼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충성하다가 어느 날 저택이 남의 손에 넘어가듯 자신의 설자리가 애매해지는 지경에 이른다.
스티븐스는 저녁노을 부둣가 벤치에서 울적한 감상에 젖어 때늦은 후회를 한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회한에 잠긴다. 하지만 우연히 벤치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이 건네는 말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p.180)
그렇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하루의 일과를 끝낸 저녁이 오히려 중요하다. 인생의 남은 시간이 소중하다. 이젠 ‘낙타’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하고, ‘사자’의 단계도 넘어서야 한다. ‘아이’처럼 자신의 삶을 춤추듯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할 때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남아있는 나날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봐야 할 때이다. 그동안 남의 눈에 좋은 사람으로 살고자 애썼다면, 이제는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야 한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에게 옳은 일, 나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주는 일을 찾아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떠날 새 열차표를 예매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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