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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윈디웬디 Apr 10. 2024

당신의 케렌시아는 어디인가요?

나의 케렌시아에서 길을 찾았던 시간 

당신의 케렌시아는 어디인가요?


'케렌시아 (Querencia)’ 는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를 뜻하는 단어이자, ‘투우장의 소가 투우사와의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잠시 숨을 고르며 에너지를 비축하는 장소’를 의미한다고 한다. 몇 년 전 '트렌드 코리아'시리즈에서 언급해 화제가 된 바 있다.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자신만의 안식처인 케렌시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트렌드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누군가에게는 그곳이 자주 가는 조용한 동네 카페일 수도 있고, 무인 책방일 수도 있다. 뒷산 산책로인 경우도 있고, 홀로 백패킹을 떠난 야영지 텐트 속일 수도 있다. 어쩌면 고요한 낚시터일 수도 있겠다. 어떤 이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차 속에 머물다 나온다고 한다. 그곳이 어디든, 어떤 형식이든 지친 마음을 추스를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한다.


나의 케렌시아는 어디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인생의 고비마다 '동굴'로 기어들어가듯 찾아가던 곳이 나에게도 있었다. 바로 동네 시립도서관의 '종합열람실'이었다. 원하던 도전에 실패했거나, 사회생활에서 상처받았거나, 인생의 큰 전환기를 맞이할 때마다, 나는 그곳을 찾아갔다. 조용히 그곳에서 실패를 복기했고, 무너진 자존감을 다독였으며, 다음 행보를 계획했다. 거주지역이 바뀔 때마다 내가 애정하던 시립도서관은 달라졌지만, 종합열람실 창가 자리에 앉아 숨 고르기를 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용기 내어 세상 속으로 나갈 수 있었다.     


가장 처음 도서관을 케렌시아로 삼았던 시절은 대학 신입생 시절이다.  2 지망으로 합격한 학과 공부에도, 어수선한 학교생활에도 도무지 적응하지 못하고 1학기 내내 겉돌았다.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할지 재수를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당시에는 수업도 빼먹고 학교 강의실보다 집 근처 시립도서관 종합열람실을 찾는 날이 많았다. 세상은 왜 이런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황하는 대학생에게 그 시절 도서관은 나를 살려준 심리적 CPR 장소이자 피난처였다. 어설프지만 나만의 기준과 관점을 만들고자 애썼던 기간이었다. 

    

그 후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국적 기업에 취직하고,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과 결혼하는 등 내 인생이 의도한 대로 흘러간다 싶을 때는 별로 도서관을 찾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임신 5개월의 몸으로 회사에 덜컥 사표를 내고 나온 뒤부터 다시 도서관을 찾기 시작했다. 나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안했다. 영영 사회로 복귀하지 못할 것 같았다. 불안해질 때마다 나를 다독여줄 피난처가 필요했다.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배를 안고 매일 도서관을 찾아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했다. 그 당시 읽은 책들은 명목상 아이를 위한 태교였다지만, 실은 나를 위한 위로였다. 첫아이가 태어나기 1주일 전까지도 도서관엘 갔다. 사서 선생님이 “어머~, 배가 밑으로 많이 내려왔어요. 이제 곧 아기가 나올 것 같아요.” 걱정 어린 눈길을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국, 출산 5일 전부터는 주변의 만류로 집에 머물렀으니, 그 시절에도 분명 나의 케렌시아는 도서관이었다.     


쌍둥이보다 키우기 어렵다는 15개월 차 연년생 남매를 낳아 눈물 나는 육아기를 보냈다. 스테레오로 우는 아이 둘을 안고 업고 달래다가 냉장고 문에 기대에 내가 엉엉 울기도 했다. 아이들이 잠들면 그제야 허겁지겁 밥 한술을 뜨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둘째 18개월부터 다시 풀타임 직장을 구해 일하는 여성으로 복귀했다. 일로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자 했던 치열한 시절이었다. 친정 근처로 이사가 친정 엄마와 어린이집의 도움을 받아가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좋은 엄마,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 되어야 한다는 '슈퍼우먼 신드롬'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힘겨운 줄타기가 계속되었다. 위태로운 나날이었다. 


마흔 초반 무렵, 열혈 워킹맘이었던 나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회사 일도, 사춘기 자녀교육에도 비상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수시로 나를 흔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의무에 매여 언제까지 인질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故구본형 선생님이 쓰신 책을 통해 그분이 운영하시던 변화경영연구소를 알게 되었고 때마침 모집하던 새벽 기상 자기 계발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1단계, 100일, 2단계 200일, 3단계 300일의 긴 여정 동안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모닝페이지를 쓰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꾸준한 독서를 실천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주말마다 책을 빌려왔다. 그때 읽기 시작한 고전문학이 나와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제 나는 2라운드 인생을 준비하는 전환기 앞에 섰다. 남아있는 날들을 위한 에너지를 비축하고 숨을 고르기 위해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요즘 다시 고전문학을 읽고 매일 글을 써나간다. 방황하던 젊은 시절과 불안했던 마흔 무렵에 접했던 고전을 이제는 한결 느긋하고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읽는다. 고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희로애락을 마음으로, 삶의 경험으로 이해할 나이가 되어 다시 만나는 고전은 한층 재미있고 맛깔스럽다. 나의 케렌시아가 도서관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책으로 꽉 찬 선반을 볼 때면 남은 삶을 잘 헤쳐 나가게 할 단단하고 강한 무기와 나침반들이 이토록 많구나 싶어 뿌듯하다. 열심히 달려온 중년의 사람들에게 인생 2막의 시작은 설레면서도 두렵기 마련 아니던가. 좀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시간을 써나가기 위해, 내가 쌓고 깨우쳐온 많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인생 2라운드를 완성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도서관에 간다. 나의 케렌시아는 언제나 나를 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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