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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윈디웬디 May 10. 2024

자식이 뭐길래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모에게 자식은 기쁨의 원천이자, 고뇌의 뿌리이다. 자식이 잘 되면 부모는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지만, 자식이 계속 속을 썩이면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한숨 쉬느라 땅이 패일 지경이 된다. 도대체 자식이 뭐길래,  부모는 자식 때문에 매 순간 이토록 노심초사할까. 부모의 사랑이 자식을 세상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그 사랑이 지나치거나 맹목적이 되면 때때로 자녀를 망치는 독이 되기도 한다. 독립적인 성인으로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Honoré de Balzac)가 쓴 <고리오 영감>에 등장하는 영감의 두 딸들이 딱 그랬다.


고리오 영감은 지독한 '딸바보'였다. 자기 자신보다 딸의 행복을 우선시했다. 자신은 월세를 줄여가며 점점 하숙집의 층수를 높여 더 형편없는 처우와 멸시를 감당했지만, 딸이 곤경에 처해있다는 소리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애지중지 간직하고 있던 은식기마저 우그러뜨려 전당포에 가져다 팔아 딸에게 보태준다. 과연 영감의 이런 행동을 딸에 대한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지, '집착'이라고 해야 할지 의아해진다. 딸들과 사위들은 영감의 그런 헌신적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속물이자 이기적인 사람들었는데도 말이다.


고리오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대신해 지극정성으로 두 딸을 돌보았고, 그 덕분에 딸들은 귀족과 금융사업가에게 각각 시집갈 수 있었다. 그는 두 딸들에게 엄청난 지참금을 쥐여주며 행복하게 살길 바랐지만, 이후에도 계속 아버지의 지원을 요구하는 딸들의 낭비벽을 감당하느라 전 재산을 탕진하고 종국에는 비참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애지중지했던 딸들은 영감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는다. 부성애 끝판왕인 고리오 영감의 최후는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에게 자식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인생과 자식의 인생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식의 성공이나 행복이 곧 부모의 성공이자, 삶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핏줄이기에 당연한 일이고, 이는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고리오 영감의 경우처럼, 그 사랑이 자기 자신을 내팽겨 치면서까지라면, 문제가 된다. 오히려 자녀에게도 도움이 되질 않는다. 고리오 영감은 비단 19세기에만 존재하는 부모의 유형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자식을 외국 유학 뒷바라지까지 다 하고 고독사한 노인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고리오 영감의 건강이 위독해져 가벼운 혼수상태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와중에 사람들을 보내 두 딸에게 소식을 전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대며 딸들은 당장 달려오기를 거절한다. 영감의 자조 섞인 탄식은 보는 사람이 더 속상하다.


부부싸움하고, 잠자고 있어서 못 올 거야. 나는 알고 있었어. 자식들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려면 죽어야겠군. 아! 여보게, 자네는 결혼하지 말게. 결코 자식을 낳지 말게! 자넨 자식들에게 생명을 주지만, 그 애들은 자네에게 죽음을 줄 거야. (p.367)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건강한 유대관계를 맺지 못한 고리오 영감과 그 딸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지만 또 한편으로는 씁쓸해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 부모들은 어떠한가? 자식의 성공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아이들을 무한 경쟁의 트랙 위에 올려놓고 그 트랙에서 지치지 않고 달려가도록 열심히 부추기고 있는 사이에 부모 자식 간에 진짜 필요한 사랑과 존경심은 뒷전으로 밀린다. 이것은 마치 고리오 영감이 두 딸을 상류사회에 진입시키기 위해 자신에게는 최소한의 비용만을 쓰고 나머지 돈은 딸들에게 다 투자했지만 정작 가르쳐야 할 인생의 덕목을 가르치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


그는 두 딸을 교육시키는 데 무리했다. 고리오는 년 육만 프랑 이상을 벌어들이는 부자였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천이백 프랑 이상 쓰지 않았다.  (p.124)


부모 자식 간의 올바른 관계가 유지되려면 심리적 '거리 두기'와  인생의 '과제 분리'가 필요하다. 자식을 사랑하되, 지나친 기대도, 간섭도, 희생도 없이 독립된 인격체로서 서로 존중해 주면서 안전한 울타리 역할만 할 수 있다면 베스트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 간섭과 방임, 통제와 무관심, 양극단을 오가느라 집집마다 속앓이하는 부모와 자녀들이 부지기수이다. 무엇을 놓쳤길래 '고리오 영감'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넘겨주고도 쓸쓸한 생을 마감해야 했을까. 1834년에 발표된 아주 오래된 소설 한 편이  2024년을 살아가는 현대의 부모들에게도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아! 내가 만일 부자였고, 재산을 거머쥐고 있었고, 그것을 자식에게 주지 않았다면, 딸년들은 여기에 와 있을 테지. 그 애들은 키스로 내 뺨을 핥을 거야!"(p.368)


 '노후설계 컨설팅' 전문가들이 은퇴 시니어들에게 당부하는 조언에 '고리오 영감'의 사례가 종종 언급된다고 한다. 그들은 시니어들에게 "수중에 돈이 있어야 효도도 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강조한다. "자식들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면 절대 미리 재산을 나눠주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발자크가 이미 190년 전에 고리오 영감의 입을 통해 증명한 말이다. 19세기 프랑스 사회상을 묘사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자본주의의 속성과 물질만능주의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고리오 영감은 딸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했으나, 그 사랑의 방법을 제대로 몰랐기에 오로지 '돈'으로만 딸들의 관심과 애정을 얻으려고 했다. 결국,  돈이 다 떨어지고 난 뒤에는 쓸쓸하게 딸들에게 버림받았다.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 가는 길이 그래서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진실된 관계맺기에 실패한 부녀지간이다.


우리나라는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이 OECD 국가중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나라이다. 2022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상대적 빈곤율이 38.1%로 21년 37.6%보다 오히려 조금 더 높아졌다고 한다. OECD 가입국 중에서 노인 빈곤율이 40%에 육박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한다. 노인을 위한 사회보장제도와 사회안전망이 여전히 미비한 상태다. 산업화 시대에 자식들을 부양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일했지만, 정작 자신들의 노후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세대이다. <고리오 영감>의 비극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진행중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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