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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윈디웬디 May 08. 2024

사춘기 가정에 꼭 한 명씩 있는 홀든 콜필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딸이 중학교 2학년이 된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춘곤증으로 나른해진 오후,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사무실 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이 담임입니다. 요 며칠 이가 교무실에 와서 계속 반성문 쓰고 있습니다. 종례시간에 사라지기도 하고 수업시간에 늦게 들어오거나 수업태도가 불량해서 여러 번 주의를 줬는데도 고쳐지질 않네요. 어머님이 직장 다니시느라 바쁘시겠지만, 조금 신경을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주 시간 되실 때 학교에 한번 오셨으면 하는데요."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상담 날짜를 정하고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쿵' 하고 떨어졌다. 그날 담임선생님의 전화는 연년생 키우면서 꿋꿋하게 버텨온 나의 직장생활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동안의 고생이 다 부질없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중학교 2학년 들어서면서 딸이 부쩍 짜증을 내고 까칠해졌다고 느끼긴 했지만, 새 학년에 적응하느라고 그런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면 어찌해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학교 상담실에서 젊은 선생님께 죄인 마냥 고개 숙이고 이의 태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도, '선생님이 우리 이를 아직 잘 몰라서 그러시는 거야. 우리 이가 얼마나 착한 앤 데...." 속으로 되뇌었다. 학교에 다녀온 그날 저녁, 나는 아이를 앉혀놓고 말했다. " 아, 이게 웬일이야. 너 절대 교칙 어기고 그런 애 아니잖아. 엄마가 학교에 불려 가서 속상한 이야기 들어야겠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    


대부분의 교사들과 부모들은 학교 규율을 어기며 삐딱한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을 볼 때 반성문을 쓰게 하고 훈계하기 바쁘다. 나 역시 그랬다. 그날 이후 아이의 행동을 일일이 체크하고 간섭하기 시작했다. 숙제는 제때에 해가는지, 학원은 빠지지 않는지, 학교 교칙위반으로 걸리진 않는지. 그러다 보니 점점 잔소리가 늘어가고, 고성이 오가고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때 내가 상담실에 불려 갔다가 돌아와서 취했어야 하는 행동은 아이를 다그치고 취조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불안과 고민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알아봐 주는 것이었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것을 해결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러질 못하고 나의 기준과 나의 잣대로 아이를 판단했기에 한동안 나와 딸은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아이의 마음을 놓친 채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호르몬 변화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유독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사춘기가 힘들다. 과도한 입시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 물질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차별과 혐오가 넘치는 사회에 아이들이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불안감이 아이는 물론 부모까지 조바심 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마냥 해맑게 청소년기를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어른들을 믿고 따르기 어렵고, 부모들은 내 아이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밀려날까 두렵다. 자녀에게 '선공부, 후고민하라'고 몰아세우기 일쑤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쓴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속 주인공 홀든 콜필드 역시 위선적인 어른들의 세계에 불만이 많았던 청소년이다. 홀든은 아이비리그 대학입시 결과만을 강조하는 고등학교에서 성적부진을 이유로 퇴학당했다. 대외적으로는 명문임을 자랑하는 학교였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교사들과 학생들의 속물적인 행동과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홀든은 진저리를 치며 미련 없이 학교를 떠난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기숙사에서 짐을 싸서 뉴욕의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과 돌아와서의 며칠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51년 출간 당시는 물론 지금도 이 소설에 대한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린다. 이 책을 자녀에게 읽히는 것이 과연 맞는지 모르겠다는 부모들도 많다. 홀든의 거칠 것 없는 언사와 행동으로 1950년대 일부 학교에서는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홀든 콜필드만큼 오해를 받은 주인공도 드물다. 불량의 끝판왕처럼 보이는 그가 오히려 순수한 세계를 갈망하고 그 세계를 지켜주려 했던 귀여운 반항아였다는 사실이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추운 겨울 센트럴파크 연못의 오리가 어디로 갔는지, 무탈한 지 계속 궁금해하고, 우연히 만난 수녀들에게 기부를 더 많이 못했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미안해한다. 자신의 첫사랑이 바람둥이 놈팡이 녀석 때문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봐 안절부절못한다. 어린 여동생 피비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기에 피비를 만나러 간 학교 벽에 상스러운 욕설이 낙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분노를 느끼며 애써 지우려 한다. 그런 순수한 모습이 성적부진으로 퇴학을 당했다는 이유로, 미성년자가 술집에 드나들었다는 이유로, 얼떨결에 성매매에 연루될 뻔했다는 이유로 천하에 몹쓸 녀석으로 매도당한다. 우리가 청소년들을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홀든은 자신이 다니던 학교가 마음에 안 들고 위선적인 어른들이 싫지만 마음속에 그 누구보다 따뜻함을 품고 있는 아이였다. 홀든이 대학 '입결'을 강조하는 '명문' 펜시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것은 어쩌면 부조리한 교육에 대한 저항과 부적응일 수 있다.    

  

오빠를 걱정하는 동생 피비가 "대체 오빠는 하고 싶은 게 뭐냐'라고 묻자 홀든은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재미있게 놀며 달려가다가 절벽으로 떨어지려고 하면 그걸 붙잡아서 막아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일견 황당해 보이는 장래희망이지만, 이 책의 제목이 왜 '호밀밭의 파수꾼'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비록 홀든은 대책 없는 반항아 흉내를 내고 있지만, 피비 같은 아이들만은 순수한 세계에서 안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지켜주고 싶어 한다. 홀든의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피비 역시 가출하려고 하는 오빠를 만류하기 위해 자신도 가방을 싸들고 오빠를 따라가겠다고 한다. 결국 홀든을 일탈에서 막아 준 것은 피비의 진심 어린 걱정과 사랑이었다.   

   

사춘기 청소년을 둔 각 가정마다 정도는 다르지만 ‘홀든 콜필드’ 같은 녀석들이 꼭 있다. 거친 말과 불만을 쏟아내고, 위선적인 어른들을 조롱하고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 말이다. 부모들은 그들을 감당하지 못해 집집마다 다툼이 끊이질 않고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하지만 어쩌면 반항하는 그들이 더 건강한 아이들 일지 모른다. 부조리한 세상에 반기를 들지 않는 아이들이 더 위험할 수 있다. 아이들의 언어와 행동 이면에 자리한 불안한 마음을 먼저 살피려는 어른들의 노력이 절실하다. 그 마음을 진심으로 읽어줄 수 있다면 방황의 시간은 단축될 것이다. 홀든 곁에 '피비' 같은 존재가 많아질수록 방황의 시간을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이 앞당겨질 것이다. 홀든 콜필드는 오늘도 지지와 관심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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