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
'그 사람 참 착해!' 혹은 ' 그 인간 참 못됐어!'
우리는 꽤나 자주 타인에 대해 단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마치 그 사람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이 말한다. 겪어 봤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한 사람을 '착하다' '나쁘다'로 금세 구분할 수 있을 만큼 타인을 보는 우리의 눈이 정확할까?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무 자르듯이 분류될 만큼 단순한 존재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 평생 탐구해도 자기 자신을 잘 모르듯이, 타인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착각이자 오만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다층적이어서 한 면만 보고 단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어떨 때는 선한 면이 두드러지는가 하면, 또 어떨 때는 이기적이고 악한 본성이 여과 없이 드러나기도 한다. 요즘은 소설과 드라마에도 히어로와 빌런의 경계를 애매하게 넘나드는 복합적인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캐릭터가 훨씬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체지방이나 골밀도를 측정하는 기계처럼 사람의 성품을 스캔할 수 있는 첨단 장비가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그 기계를 통과하는 순간 이 사람이 몇 %의 착함과, 몇 %의 악함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수치로 보여준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다. 아마도 검사를 받기 위해 기계 앞에 선 사람들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누구나 선과 악의 경계선상에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런 불완전함 자체가 인간의 본질이자 한계임을 알게 해주는 고전 소설 한 편이 있다. 바로 보르헤스,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함께 현대문학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작가 이탈로 칼비노의 대표작 『반쪼가리 자작』이다.
환상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칼비노의 작품답게 『반쪼가리 자작』은 마치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하다. 『반쪼가리 자작』의 주인공 메다르도 자작은 투르크와의 전쟁에 경험도 없이 호기롭게 나섰다가 대포의 포탄을 정면으로 맞아 몸의 절반이 날아가 버린다. 사실주의 문학이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해야 마땅한 상황이지만, 환상문학인지라 그는 반쪽만 남은 몸으로 멀쩡히 살아남는다. 의사들은 흥분하며 메다로도 자작의 몸을 이리저리 봉합했고 결국 그는 완전히 반쪽만 남은 몸으로 귀향한다.
그런데 자신의 영지로 돌아온 반쪼가리 자작은 안타깝게도 예전의 메다르도 자작이 아니다. '악한' 부분만 남은 반쪽이었다. 그는 자신이 마주치는 동 식물을 닥치는 대로 반쪽을 냈고, 영내에서 가벼운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도 가차 없이 사형을 선고한다. 사람들은 '악한' 성품만 가득한 반쪼가리 자작으로 인해 공포에 떤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양면성이 있어서 착한 듯싶다가도 어느 순간 이기적인 모습으로 돌변하기도 하고, 천하의 악당 같은 인간도 한없이 가끔은 순한 면모를 띄기도 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몸이 두 동강 난 메다르도 자작은 오로지 악한 행동을 하는데만 여념이 없다. 천하의 빌런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또 한 명의 메다르도 자작이 나타난다. 대포에 날아가 버린 나머지 다른 반쪽이 돌아온 것이다. 그는 성 안에 있는 메다르도 자작과는 정반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선행을 베푼다. 긍휼과 자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다. 마을 사람들은 그 둘을 각각 '악한 반쪽'과 '착한 반쪽'이라고 부른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메다르도 자작은 악하기만 한 반쪽과 선하기만 한 반쪽으로 나뉘어 사람들을 헛갈리게 만든다. 사람들이 '착한 반쪽'에만 열광할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결벽증에 가까운 선함에 점차 불편함을 느낀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착한 반쪽'과 '악한 반쪽'은 다시 한 몸으로 결합하게 되고, '온전한 자작'으로 돌아오게 되어 일견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동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상이 아주 복잡해져서 온전한 자작 혼자서는 이상적 사회를 구현하기 어렵다"는 말로 결론이 난다. 이탈로 칼비노는 『반쪼가리 자작』을 통해 혼란스러운 현대 사회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가기 힘든 인간들의 실존적 고통과 외로움을 표현하고자 했다.
두 명의 반쪼가리 자작이 각자 자신의 기준과 잣대로 타인을 멋대로 판단했듯이 우리 역시 왜곡된 관점과 시선으로 타인과 사회를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자신은 성한 사람이라는 오만함으로 타인의 고통과 상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도 살펴야겠다. 불완전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지만 최대한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싶다. 착한 반쪼가리 자작이 사랑하는 여인 파멜라에게 한 고백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이 책의 주제라는 생각이 든다.
"아, 파멜라. 이건 반쪽짜리 인간의 선이야. 세상 모든 사람들과 사물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야. 사람이든 사물이든 각각 그들 나름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이지. 내가 성한 사람이었을 때 난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머거리처럼 움직였고 도처에 흩어진 고통과 상처들을 느낄 수 없었어. 성한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 있지. 반쪼가리가 되었거나 뿌리가 뽑힌 존재는 나만이 아니야, 파멜라. 모든 사람들이 악으로 고통받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면서 너 자신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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