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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윈디웬디 May 31. 2024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문명과 야만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사회생활을 하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한결같이 좋은 사람도 있었고,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태도가 돌변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을 어떤 환경에서, 어떤 관계로 만나느냐에 따라 확연히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가령 친목 동호회에서 만났다면 개성 있고, 화끈한 사람으로 통했을 사람도 '일로 만난 사이'로 엮이다 보면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모습에 기피하고 싶은 사람이 되기도 했다. 자리에 맞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 사람의 진짜 됨됨이가 무엇인지 헛갈리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라는 말을 하나보다. 가까이에서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부정적인 면이 서로 부대끼며 생활해야 하는 공간에서는 자연스럽게 도드라진다. 특히 힘의 역학관계나 이해관계가 작용하는 곳에서는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가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인격의 사람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람인지, 이용하는 사람인지, 지배하려는 사람인지, 함께 성장하려는 사람인지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본능일지도 모른다. 특히 위기상황이 닥치면 그 변화는 더 과감하고 드라마틱해진다. 의리와 질서 지키려는 마음힘이 강한 쪽에 의존하려는 욕망 충돌한다. 예의와 민낯이 대립하고, 문명과 야만이 경계선상에서 춤을 추듯 넘나든다. 그것을 누가 얼마나 잘 제어하느냐에 따라 삶의 결이 달라질 것이다. 고전 문학 중에 인간의 이런 양면성을 깊이 파고든 작품 있다. 바로 1954년에 처음 출간되어 198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윌리엄 골딩 <파리 대왕>다.


<파리대왕>의 배경은 무인도다. 핵전쟁이 발발한 미래의 어느 시점, 영국 소년들을 태우고 가던 비행기가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어른들은 다 죽고 오로지 소년들만이 살아남았다. 문명의 중심국이라 자부하던 영국 출신 아이들답게 표류 초기에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리더를 뽑는다. 이성적이고 합리적 성향의 ‘랠프’를 리더로 뽑고, 랠프의 지시에 따라 ‘봉화’를 올리고 비바람을 막아줄 거처를 마련하면서 구조를 기다린다. 하지만 구조될 기미가 보이질 않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아이들은 불안해진다. 자신 역시 리더가 되고 싶었던 ‘잭’은 랠프의 지시를 어기고 사냥을 통해 고기를 먹게 해 주겠다며 아이들을 선동한다. ‘봉화’ 불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지나가는 비행기에 구조신호를 보내지 못하게 되자 랠프와 잭 사이의 갈등은 고조된다. 그 사이 섬에서 정체불명의 ‘괴물’을 봤다는 소문이 돌자 아이들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역사적으로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는 강력한 카리스마형 독재자가 득세한다. 대중의 불안과 공포가 그런 리더를 용인한다. 아이들은 이성적으로 대처하자는 '랠프'보다는 거칠게 힘을 과시하는 '잭' 주위로 몰려간다. "리더는 강해야 해. 강하지 않으면 리더가 될 수 없어." 두려움에 휩싸인 아이들은 외친다. 랠프는 문명을, 잭은 야만을 상징한다. 공포는 대중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잭과 그 일당은 사냥한 암퇘지 머리를 막대기에 꽂아 괴물에게 바치는 제의와 함께 광기에 가까운 축제를 벌인다. 어두운 밤 축제에 도취된 아이들은 불빛 사이로 달려오는 다른 아이를 괴물로 오인해 죽여 버린다. 무인도는 점점 살기와 광기, 대립과 증오의 섬으로 바뀌어가고, 랠프 주변에는 어린아이들 몇 명만 남는다.


무인도라는 설정과 서바이벌 게임 같은 <파리대왕>의 상황은 험난한 현실세계의 축소판이다. 사람들은 가짜뉴스에 흔들리고 공포에 짓눌린다. 상식과 절차는 무시되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듯 보인다. 야만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이성적 목소리는 점점 설 자리를 잃기도 한다. 하지만 야만을 선택한 결과는 파국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벌어진다. 아이들만 살아남은 무인도였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추한 행태를 그대로 모방한다.  무인도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모습은 문명의 취약성과 인간의 나약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섬을 불 지르며 아이들이 야만으로 치닫다가 때마침 화재를 보고 도착한 해군함정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자 쫒던 아이들도 쫓기던 아이도 동시에 울음을 터뜨린다. 일견 현명한 어른들에 의해 상황이 종료되고 평화가 찾아온 것 같지만 그들을 구해준 어른들 역시 바깥에서는 여전히 싸우고 있는 중인 전쟁 군인들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파리대왕>이 쓰인 때는 1954년이지만, 그때에 비해 지금은 얼마나 문명세계가 되었을까?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워진 세상이다. 가짜뉴스가 범람하고 미혹과 중독의 유혹이 사람들을 손짓한다. 여전히 자연재해와 전쟁의 소식이 끊이질 않는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인간다움과 선함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환경에 지배받지 않고 스스로 중심을 잡아가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위기 앞에 휩쓸리지 않고 매 순간 올바른 선택을 하려면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주변을 돌아보아야 한다. 오롯이 깨어있어야 한다. 그 길만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일 것이다. 야만에 물들지 않고 문명을 지켜내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무인도에서 빠져나와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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