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진심 상(盡心 上) 편에 ‘유수지위물야 불영과불행(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물이 흘러가다가 웅덩이를 만나면 그 웅덩이를 다 채워야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라는 뜻이다. 예전 인문학 공부 모임에서 ‘맹자’를 함께 읽으며 마음에 새겼던 문구였다. 살면서 슬럼프를 겪거나, 인생의 전환기를 만나 부대낄 때마다 나는 이 구절을 되뇌곤 했다. ‘그래, 지금은 웅덩이에 물을 채우는 기간인 거야. 물을 다 채우지 않고 건너뛸 수는 없지. 힘들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쩌면 내 인생에 진짜 공부가 시작된 계기도 바로 이런 인생의 웅덩이를 채우는 기간 덕분이었을지 모른다. 예기치 않은 복병 같은 웅덩이가 조용히 내면을 되돌아볼 시간을 주었다. 원치 않는 질병, 인간관계로 인한 실족, 직장 생활의 슬럼프 등 내 인생의 웅덩이는 다양한 형태로 찾아왔다. 그 웅덩이를 회피하고 부정할수록 회복은 더뎠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쓸 수 없지 않은가. 웅덩이를 메꾸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들이 나를 멈춰 서게 했고, 성찰하게 했다.
“하고자 함이 있는 사람은 우물을 파는 것과 비슷하다. 우물을 아홉 길이나 팠더라도 샘물을 얻는데 까지 이르지 못했으면, 그것은 오히려 우물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뜻을 세워 어떤 일을 시작했다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정진하는 마음 자세가 반드시 필요함을 일깨워 주는 말이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나는 제법 이곳저곳에서 우물을 파 내려가다가 끝내 샘이 터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포기한 적이 많았다. 이는 재능의 부족일 수도 있고, 끈기와 요령 부족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믿음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좌절과 시행착오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 내가 나에게 조금씩 더 관대해지고 느긋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예전의 불안과 조급함을 버리고 웅덩이에 물이 차오를때까지 지긋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언젠가는 꼭 한 번 터질 시원한 우물물을 기대하는 마음도 커졌다. 그날을 기분 좋은 설렘으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이 또한 나이듦의 여유인걸까? 치열했던 젊은 날, 고군분투했던 순간들이 켜켜히 쌓여 이제는 내 인생에도 물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있다. 시간은 갈수록 내 편이다. 왠지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