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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윈디웬디 Jun 14. 2024

'죽음'을 묵상함으로써 '삶'
을 긍정하게 하다!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성공한 판사로서 승승장구 출세 가도를 달리던 주인공 이반 일리치가 어느 날 찾아온 원인 모를 병으로 서서히 죽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의 1장 첫 장면은 이반 일리치의 직장인 법원에 전해진 부고 소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알려지자, 법원 동료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로 인해 공석이 된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의 동료이자 학창 시절부터 친구였던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장례식장에서 일리치의 임종 당시의 상황을 전해 듣고 "이건 언제라도, 지금 당장에라도 내게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일순간 두려움을 느꼈지만, 이내 "그건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일이지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애써 죽음을 외면한다. 그리고는 조문을 마치고 부리나케 마차를 타고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카드 게임' 장소로 이동한다. 미망인이 된 일리치의 부인은 장례식을 치르는 와중에도 어떻게 하면 남편의 사망 보험금을 더 받아낼 수 있을지 골몰한다. 이쯤 되면 대체 이반 일리치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가까운 동료와 가족들의 반응이 이런 걸까 사뭇 궁금해진다. 


흔히 사회생활에서 '대체불가'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만 사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란 없다. 공석으로 유지되던 이반 일리치의 자리는 그의 죽음과 함께 다른 사람으로 빠르게 채워질 것이다. 그의 부고를 듣고 동료들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 "자신과 지인들의 인사이동이나 승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한 것"이었다니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품처럼 손쉽게 대체되는 직장인의 비애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작가 톨스토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의 행동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이기적 속마음을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다. 


2장의 첫 문장은 강렬하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대단히 끔찍한 것이었다."로 시작된다. 단순하고 평범한 삶은 '좋은 삶'이 아닌가? 왜 작가는 이런 삶이 끔찍하다고 이야기할까? 그 이유가 읽다 보면 차차 드러난다. 이반 일리치는 소위 모범적인 엘리트코스를 밟았던 인물이다. 남들이 '선남선녀'라고 평가하는 조건 좋은 여성과 결혼을 했고, 매 순간 최상류 층에게 좋게 받아들여지는 선택을 하고자 노력했다. '품위'를 중요시 여겼고, 승진에 도움이 되는 인맥관리에 힘을 썼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행동이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부 갈등의 사례처럼 신혼 때는 사이가 좋았으나 아이가 태어나고 부부가 함께 분담해야 할 양육 책임에서는 일과 공무를 핑계로 가정으로부터 은근슬쩍 도피한다. 상냥했던 아내는 점점 불평과 짜증이 늘어갔고 둘 사이는 소원해지지만 이반은 이를 불편해하지 않고 오히려 정상적인 것일뿐더러 그럴수록 일에 더 매진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까지 여긴다. 이기적으로 보이는 그의 행동은 사실 예전 세대 가장들의 보편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그의 인생이 단순하고 평범했으나 끔찍한 것이었다고 작가가 언급한 이유를 조금씩 알 것 같다. 그는 가정을 자신의 품위 유지에 도움 되는 수단으로 여겼을 뿐 아내와 진실된 교감이 없었고 대외활동 역시 자신의 출세에 도움 되는 정략적 관계에 치중한 삶을 영위했던 셈이다.


이반 일리치는 한때 승진 누락으로 크게 상심하며 인생의 고비를 맞이했으나, 오히려 그 좌절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더 좋은 조건의 직장으로 이직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높은 연봉의 직장과 큰 저택으로 이사하게 된 덕분에 소원했던 부부 사이도 다시 친밀해진다. 일리치는 이사한 집을 고급 취향으로 멋지게 꾸미면서 자신의 성공을 실감한다. 새로운 직장에 안착하고 실력도 인정받는다. 일과 취미생활에 모두 공을 들이며 워라밸도 챙긴다. 더할 나위 없이 안정적이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중산층의 여유로운 삶이다. 평온한 일상 속 그의 주된 관심사는 오로지 '인사이동'이고, 그의 진짜 기쁨은 지인들과 즐기는 '빈트 게임'이라고 불리는 카드 게임이라는 대목을 읽으니, 1장의 이반 일리치 장례식 장면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작가의 치밀함이 엿보인다. 만약 장례식장의 고인이 일리치가 아닌 그의 다른 동료였다면, 일리치도 동료들과 똑같이 고인으로 인해 생길 자리 변화에 관심을 두었을 것이고 조문 후에 부지런히 빈트게임을 하러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동료들이 일리치의 부고를 듣고 '죽은 것은 자기가 아닌 그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는데 이는 일리치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잘 나가던 일리치가 어느 날 거실에서 커튼을 달러 올라간 사다리에서 떨어지면서 옆구리를 다치는 상황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통증이 심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더니 급기야 참을 수 없는 중증으로 발전한다. 이 의사, 저 의사 병원 순례를 하며 고쳐보려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 질병은 철저히 당사자가 감당해야 할 고통이다. 그 누구도 대신 아파해줄 수가 없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이해한다. 일리치의 다른 가족은 모두 건강했다. 일리치가 질병에 걸리자 평온하던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신체적 고통은 일리치의 마음을 점점 무너지게 만든다. 그는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자신의 고통에 무심한 의사의 태도에 적의를 느끼며 자신 역시 똑같이 법정에서 무심한 태도로 피고를 대하던 예전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입장이 바뀌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를 가장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의 고통이 점점 커져 가는데 세상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병의 심각성을 인지한 이반 일리치가 단계별로 보이는 행동 변화와 심리묘사가 너무도 생생해 독자들에게 그의 고통이 그대로 전이되는 느낌이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톨스토이의 엄청난 필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오랜만에 자신의 얼굴을 대하는 처남의 표정에서 이반 일리치는 이건 '맹장'이나 '신장'의 문제가 아닌 '삶'이냐 '죽음'이냐의 문제임을 자각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사이클을 이반 역시 그대로 밟고 있는 듯하다. '아닐 거야, 괜찮을 거야. 의사가 처방해 주는 약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 금세 나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애써 병의 심각성을 '부정'하던 단계를 넘어 자신은 이렇게 하루하루 죽어가는데 저들(가족들과 친구들)은 변함없이 웃으며 파티를 하고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보며 '분노'를 느낀다. 그가 퍼붓는 말, "저들도 똑같아, 똑같이 죽게 될 거라고. 멍청이들. 내가 조금 먼저 가고, 저들은 조금 늦게 갈 뿐, 결국엔 다 마찬가지야. 그런데도 저렇게 좋을까" 이반 일리치가 하는 말이 왠지 톨스토이가 독자인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이반 일리치는 키제베터 논리학에서 배운 3단 논법, 즉, <카이사르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그러므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를 떠올리면서도 이는 카이사르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느낀다. 그의 모습이 자만심처럼 보이다가도 사실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례식장에 조문을 가고, 뉴스에서 사망사고 보도를 보면서도 그런 죽음이 나 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덕분에 험한 세상에서 그나마 살아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반 일리치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잊기 위해 자신이 좋아했던 '일'에 몰두해 본다거나, 응접실의 가구 배치를 바꾸면서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고 하지만 극심한 통증이 찾아오면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그를 보면서 새삼 하게 된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가족들과 동료들이 겉으로 하는 위로의 말이 이반 일리치에게는 '거짓'으로 느껴진다. 그들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말과는 달리 그들의 행동은 전혀 환자를 고려하지 않는 모습 때문일까? 반면 하인 게라심은 이반을 진심으로 불쌍하게 여기며 항상 웃는 낯으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그를 돌본다. 가족이 아니기에 더 솔직하고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일리치도 편안하게 그에게 요구사항을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이미 전문 간병인 제도와 호스피스 병동의 필요성을 역설한 듯하다. 가족은 가깝기에 서로에게 더 기대하고 더 서운해 할 수 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그 누구를 비난할 수 없다. 속으로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판단해도 가족이기에 솔직하게 죽음을 인정하는 말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고통의 한복판에서 힘들어하는 일리치에게 게라심 같은 간병인이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라심은 일리치에게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이 일리치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작가는 '게라심'이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에 대한 자비심, 즉 '측은지심'을 이야기한다. 동료들과 부인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진심 어린 위로와 공감을 이반 일리치는 게라심에게서 발견한다.


아내와 딸이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한껏 치장을 하고, 공연 기대감에 들뜬 모습을 보면서 이반이 느꼈을 소외감을 생각해 본다. 집안에 환자가 있다고 모두가 환자처럼 우울하게 지내서도 안되지만, 이반 일리치의 가족처럼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유지하려는 듯한 모습도 보기 불편하다. 모녀가 오페라 안경을 두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이반 일리치가 느꼈을 분노가 이해가 된다. 흔히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말을 한다. 이반 일리치 역시 몇 달 전에 오페라 공연 예약을 하면서 특별석을 고집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 공연을 보러 갈 수 없는 처지가 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화가 난 모습의 일리치로 인해 침묵이 흐르지만 예비 사위 앞에서 가짜 품위가 깨지고 진실이 까발려질까 두려워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대외적 위신을 중요시한 채 껍데기만 붙잡고 살아온 가족을 보는 듯해 안타깝다.


'죽기 전에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품위 있게 사는 것이 삶의 신조였던 일리치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다. 서러움을 토해내며 불행에 직면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돌아본다. 자신이 그동안 산에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일정한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지한다. 절망에 빠진 일리치가 영혼의 소리와 나누는 대화는 톨스토이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들린다. <너한테 필요한 게 무엇이냐?> <사는 것이라고? 어떻게 사는 걸 말하는 거지?> <예전엔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았어?> 죽음을 앞둔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여정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톨스토이의 중편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모든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다.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 삶에서 진짜 중요한 <그것>을 놓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신의 인생이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찬 인생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의 모습은 독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물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게 만든다. 놓치지 말아야 할 내 인생의 진짜 중요한 <그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곱씹어 보게 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결국 무엇이었을까? 이반 일리치의 일생은 '삶과의 사투이자 죽음과의 사투'였기에 이반이 죽음 직전에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마침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톨스토이가 평생토록 끊임없이 추구했던 <죽음을 의식하는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이반이 「이렇게 기쁠 수가! 」라고 말했을 때의 '기쁨'은 두려워서 도망치려고 했던 죽음으로부터 마침내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의미하는 것 같다. 주변인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 서운함을 내려놓고 그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마침내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보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죽음을 앞두고 되돌아본 자신의 <문명화된 삶>에서 끊임없이 추구했던 '가짜 기쁨'을 통렬하게 직시한 후, 자연으로의 회귀를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자리와 액수>로 평가받던 삶에서 벗어나 마침내 '죽음이 끝났다'라고 선언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뭉클하게 와닿는다.  결국 '메멘토 모리'다. 짧은 분량의 소설 한 편이 죽음을 통해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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