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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윈디웬디 Jun 21. 2024

구한말부터 해방까지,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서사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지나온 역사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로 그 시대를 배경으로 치밀하게 구성된 '문학작품'을 읽는 것을 들 수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기성세대는 우리나라 역사를 단순 암기식으로 외우고, 객관식 문항 속에서 정답을 골라내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런 방식으로는 과거로부터 그 어떤 교훈도, 성찰도, 반성도 이끌어내기 어렵다. 그저 파편적 지식만 쌓일 뿐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진정 어떠했는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알려면 대하소설 <토지>와 같은 문학작품을 읽으면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오늘날 학교 현장에서 <토지>를 읽고 발하고 단상쓰고 토론하는 국어와 역사 과목의 통합 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상상해 본다.


이때 나루터에서는 읍내 갔다가 나룻배에서 내린 장연학이 둑길에서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며 걷고 있었다. 모자와 두루마기는 어디다 벗어 던졌는지 동저고리 바람으로,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끝>


대하소설 <토지>의 마지막 장면이다. 1969년 9월부터 1994년 8월까지 장장 25년간의 세월을 <토지>와 함께 보낸 박경리 작가가 원고지에 <끝>이라고 마침표를 찍은 날도 마침 8월 15일 광복절 새벽이었다고 한다. 평생을 '토지 집필'에 헌신한 대작가의 탈고 심정도 '만세'를 목놓아 외치던 장연학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갑오년 동학 전쟁부터 1945년 8.15 해방까지를 치밀하게 그려낸 작가의 집념과 인고의 세월이 고스란히 작품 속에 담겨 있다. 나는 <토지> 전권을 다 읽는 것만으로도 한 참 시간이 걸렸는데, 어떻게 이런 엄청나고 거대한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할 수 있었을까 저절로 경외감이 우러나왔다.


대하소설 <토지>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할 인물로 박경리 작가는 '장연학'을 선택했다.  600여 명이 넘게 등장하는 대하소설의 대미를 그에게 맡긴 작가의 의도와 심중을 곰곰이 헤아려 보았다. 장연학은 드러나지 않지만 가장 일머리가 좋아서 최참판댁은 물론 마을 사람들의 온갖 대소사를 다 챙겨 온 인물이다. 마치 작가의 분신처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속 사정과 아픔을 세세히 살피는 믿음직한 인물이었다.


장연학이 해방의 소식을 듣고 나룻배에서 내린 뒤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는 장면은 그래서인지 작가 자신의 외침인 것처럼 들렸다. 이날은 식민지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역사 속 해방의 날이지만, 장기간 집필이라는 고통스러운 '글감옥'에서도 작가 역시 해방되는 날이었으리라. 나는 처음에는 <토지>의 주인공이 서희와 길상이인줄로만 알았는데, 한 권 한 권 읽어가다 보니 <토지>는 식민지 시대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살다간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인 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그 모든 사람들의 처지를 두루 관찰하고 보살펴온 연학에게 마지막 기쁨의 만세를 부르게 한 것은 작가의 세심한 배려와 애정이 아니었나 추측해 본다. 대하소설 <토지>는 한국인라면 언젠가 꼭 한번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수 많은 인물들의 생애스토리를 통해 인간 본성과 삶의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토지>는 별도의 인물사전이 있을 만큼 무수히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물도 많지만, 긴 호흡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이들도 다수 있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연극들이 대다수 <토지>에 빚을 지고 있음을 한 권 한 권 읽어 나갈때 마다 알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토지> 속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저마다의 명확한 캐릭터로 길고 긴 대하소설 속에서 일관성 있는 언행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인물들의 성격과 심리묘사를 어쩜 이렇게 치밀하게 창조해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인상적이었던 인물들의 이름만 떠올려봐도 줄잡아 30명이 넘는다.


서희, 봉순이(기화), 월선, 임명희, 유인실, 강선혜, 양현, 영선네, 길여옥, 상의, 임이네, 두만네, 야무네, 판술네, 기성애미, 서울댁, 성환할매, 숙이, 모화 //

길상, 김환, 환국, 윤국, 영광, 몽치, 두메, 주갑,강쇠, 영팔, 이용, 이홍, 김두수(거복), 이상현, 김한복, 장연학, 정석, 조준구, 조병수, 조찬하,  오가타, 해도사, 임명빈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것은 물론, 인간 본성을 관찰할 수 있게 하는 탁월한 소설이다. 반면교사로 삼을만한 인물들이 참 많다. 또한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라는 강선혜의 자조 섞인 말에서 작가가 인생을 바라보는 관조적 관점과 메시지도 읽을 수 있다.


어차피,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다 사람은 완벽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인생과 똑같은 삶을 살 수도 없는 거고, 불행이다 행복이다 하는 그 말도 실상은 모호하기 짝이 없어.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우리들 운명, 행복 불행이 검정 과자 빨간 과자처럼 틀에다 찍어내는 것도 아니겠고, 운명 앞에 무력해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그러나 운명을 정복한 사람은 없어. 자신(自信)이라는 말같이 허망한 것이 어디 있을까. 노인을 보아. 그 경력이 화려한 노인일수록,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결국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거야. 삶이란 덫에 걸린 짐승 같은 것, 결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것.”

나남출판사 <토지> 5권 5부 (p.333)


지나온 시대의 사회 풍속을 알 수 있게 하는 문화사적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토지> 속에는 3대에 걸쳐 이 땅을 거쳐간 사람들의 삶과 연관된 여러 풍습들이 등장한다. 장례 풍습, 혼인 풍습, 어른에 대한 예우, 대를 잇는다는 것, 조상이나 자식에 대한 생각, 교육에 대한 의지, 남녀에 대한 생각, 부부 관계, 고부간, 부모 자식 간의 갈등. 음식문화, 술 문화 등 다양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 다수 등장한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어휘의 보고, 유려한 표현과 섬세한 묘사, 문학적 가치가 뛰어나다


11개월에 걸쳐 느린 호흡으로 '토지 함께 읽기' 멤버들과 함께 <토지>를 읽었다. 처음에는 경상도 사투리는 물론 생소한 어휘 때문에 여러 번 네이버 사전을 참조했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어휘를 익히고, 한자어를 살펴보고, 문장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한 작품이다. 박경리 작가의 엄청난 필력에 매 순간 감탄하면서 필사하고픈 구절이 넘쳐났던 기간이다.




어휘를 늘리는 동시에 단어와 문장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즐기고 익힐 수 있는 책으로는 박경리 선생의 소설《토지》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 수준 높은 문학작품을 읽으면 논리 글쓰기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굳이 단어나 문장을 암기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읽고 잊어버리고, 다시 읽고 또 잊어버리고, 그렇게 다섯 번 열 번을 반복하면 박경리 선생이 쓴 단어, 단어와 단어의 어울림,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저절로 뇌에 ‘입력’된다. 그리고 글을 쓸 때 그 단어와 문장을 자기도 모르게 ‘출력’하게 된다.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유시민 작가에 따르면, 어휘력을 향상시키고, 자연스러운 단어와 문장 조합을 익히는데도 <토지>만한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좋은 문장을 반복적으로 읽어 뇌에 '입력'하면 자연스럽게 '출력'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런 기대로 <토지>를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권 한 권 읽어나갈수록 글쓰기를 위한 효용가치 보다는 대하소설 답게 3대에 걸쳐 면면이 이어지는 인물들의 서사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식민지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역사책을 통해 지식으로만 접했던 우리나라 근현대사 인식이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를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빼앗긴 땅에서, 멀리 이국땅에서 해방의 날을 기다리며 힘든 세월을 살아낸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가 <토지>속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토지완독>은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하지만 방대한 분량 때문에 도무지 엄두를 못 내다가 <토지 함께 읽기> 모임을 알게 된 후 비로소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 모임 덕분에 무사히 완독할 수 있었다. 두꺼운 벽돌책일수록, 꼭 읽어야 하는 좋은 책일수록 '함께 읽기'의 힘을 빌리는 것이 좋다. 독서에도 함께 하는 '길동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완독할 수 있다. <이젠 함께읽기다>라는 책도 있다. 함께라면 <토지> 전권 완독도 문제 없다! 시작이 반이다. 아니, 마음을 먹는 그 시작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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