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어스 #한달자기발견 #30일글쓰기
일을 잘한다는 건 무엇일까?
나에겐 기억에 남는 몇 명의 상사가 있다. 실력은 있지만 인간성은 별로였던 사람, 리더십은 있지만 디테일이 부족한 사람, 디테일을 신경 쓰느라 큰 그림은 놓쳤던 사람 등. 나는 언제나 막내였기에 상사의 말은 곧 법이자 꼭 따라야 할 지침이었다.
나의 첫 상사는 앞전에 언급한 실력은 있지만 인간성이 별로였던 사람이었다. 항상 자신만만했던 그분은 마케팅 초짜였던 나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많다며 화이트보드 앞에 나를 세우곤 했다. 4P가 뭔지, 캐시 카우가 뭔지 써보라고 하시면서 우물쭈물하던 나를 답답해했다. 왜 그렇게 세상을 좁게만 보냐느니, 클럽도 가보고 연애도 많이 해보라며 엄마도 하지 않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건 약과였다. 나중엔 성희롱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마케팅이 참 어렵다고 느꼈고, 그분과는 그 어떤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상사는 나와 성격 유형이 많이 비슷했던 분이었다. 하지만 비슷한 사람이 만나면 오히려 더 부딪히는 법! 그분이 싫어하는 일은 나도 하기 싫었고, 그분이 원하는 일은 나도 하고 싶었다. 그렇다 보니 죽이 맞을 때는 잘 맞았지만 반대의 경우엔 발전할 여지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상사는 디테일에 아주 강한 분이었다. 서류 작성은 물론, 회의를 진행하는 방식도 철저했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율을 얻어야 했기에 그랬을지는 몰랐지만 언제나 예상외의 일들은 발생하는 법이었다. 그분은 그럴 때마다 꽤 많이 당황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상사의 스타일이 달라질 때마다 일의 기준 또한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야근을 불사르더라도 무조건 성과를 내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이다, 즐기며 한다면 결과가 어떠해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리스크를 최소한으로 줄이며 현상유지를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등. 나는 그럴 때마다 일에 대한 기준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고, 상사에게 잘 맞춰주는 내가 일을 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상사에게 잘 맞추는 것인 일을 잘하는 것일까?
만년 고급 인문자가 될 수는 없다
철학자 드라이퍼스 (Hubert L. Dreyfus)의 저서 'Mind Over Machine'의 도입부에는 '기술 습득의 5단계 모델'이 나온다. 일명 드라이퍼스 모델로 초급자(Novice), 고급 입문자(Advanced Beginner), 능숙자(Competent), 숙련자(Proficient) 그리고 전문가(Expert)로 분류된다.
1. 초급자(Novice)
- 해당 기술 영역에서 사전 경험(사고에 변화가 생기는)이 거의 없는 단계
-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대한 판단 기준이 없다
- 배우는 것보다 당면 과제를 달성하고 싶어 한다
- 실수에 대응할 방법을 모르고, 잘못되는 경우 혼란에 빠지기 쉽다.
2. 고급 입문자(Advanced Beginner)
- 고정된 규칙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여 자신만의 작업을 시도하기도 하는데 여전히 문제 해결에는 어려움을 느끼는 단계
- 정보를 빨리 얻고자 하는 욕구도 커진다.
- 자신의 경험 중에서 비슷한 상황에 맞춰서 조언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 전체적인 이해는 아직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 전체 비율 중 가장 많은 유형.
3. 능숙자(Competent)
- 개념적인 모델을 정립하고 그 모델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단계
- 문제를 스스로 해결(troubleshoot)하고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 접해보지 못했던 문제라도 당황하지 않는다.
- 전문가의 조언을 찾아서 듣고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
- 과거의 경험을 활용하여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지만 문제를 해결할 때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를 어려워한다.
- 다음 단계인 숙련자에 이르려면 도약이 필요하다.
4. 숙련자(Proficient)
- 해당 기술에 관한 큰 개념적인 틀을 찾아서 이해하고자 하는 단계
- 너무 단순한 정보는 좋아하지 않게 된다.
- 이전에 잘못했던 일을 스스로 교정할 수 있고, 다음번에 더 잘할 수 있는 접근법을 찾는다.
- 격언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 따라온다.
- 격언을 맥락에 맞게 이해할 수 있는 경험과 판단력이 있다.
- 경험상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다
5. 전문가(Expert)
- 적절한 맥락에서 써먹을 수 있을 만큼 방대한 경험을 가지고 늘 더 나은 방법과 수단을 찾는 단계
- 세부사항 중에서도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직관으로 가려낼 수 있다.
- 범위를 제한하고 집중해서 패턴을 발견해내는 데 아주 능숙하다.
- 전체의 1~5 퍼센트 정도
이 다섯 가지 모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급 입문자' 단계에서 머물러 있다고 한다. 5개의 단계가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순서라고 하는데 '전문가' 단계에 속한 사람들이 전체의 1~5%밖에 안된다고 하다니... 마치 그 단계에 속한 사람들은 득도에 성공한 도사에 가까운 이미지랄까?
나는 현재 가장 높은 비율인 '고급 입문자'에 속하는 것 같다. 고정된 업무에서 탈피해 나만의 업무 스타일을 찾은 단계. 이 단계라면 계속 회사 내에 머물며 더 높은 단계로의 발전을 꾀해야 할 텐데, 나는 퇴사를 결정했다. 이유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엔 전문가는 고사하고 능숙자와 숙련자 단계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에 계속 머물다간 고급 입문자에서 능숙자로의 발전은 꿈에도 못 꾸고 오히려 초급자로 퇴보될까 걱정도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회사'가 아닌 '나만의 콘텐츠'를 선택했다. '나'를 도구로 삼아 '더 넓은 세상'을 목표로 도전한다면 지금 당장은 막막해도 회사 안에서보다 더 빨리 나를 성장시킬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