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 little deer Feb 03. 2020

겨울방학

2020-02-02

내게 글쓰기는 매일 밤 마시는 따뜻한 우유 한 잔 같은 습관이었다. 우유를 꼬박꼬박 잘 마신다고 상을 받거나 칭찬을 듣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글은 나를 외롭게 했다. 조금 다른 의미로, 그림은 우현을 외롭게 했을 것이다. p.81.


오늘로 나의 '겨울방학'이 끝난다. 삼 개월 반쯤 되었나. 내일부터는 다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건조한 사무실에 앉아 지루함과 졸음을 참으며 맛없는 커피를 물처럼 마시고 있겠지. 낮에는 몇 달 만에 네일숍에 다녀오는 것으로 나름의 출근 준비를 했다. 이번 '방학'에는 훌쩍 여행을 다녀오지도 않았고 딱히 뭔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노는 것마저 시큰둥, 대충대충이었다. 강연도, 요가도, 맛집도, 읽고 쓰기도 설렁설렁. 별 일 없이도 하루하루가 잘 갔다. 살이 조금 쪘고 머리카락이 꽤 길었다. 방학 숙제를 다 못한 개학 전날 밤의 기분으로 알람이나 맞춘다.


애써 태연하려 해 보지만 사실은 몹시 긴장된다. 잠이 안 오면 어쩌나, 알람을 못 들으면 어쩌나,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어쩌나, 첫날부터 지각하면 어쩌나, 첫인상이 별로면 어쩌나, 맡은 일을 잘 못해내면 어쩌나, 이런저런 어쩌나. 게다가 전염병까지 돌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새벽에는 눈이 온다고도 하는데. 걱정이 많고 실전에 약하고 포기가 빠른 타입인 나란 인간아, 이번에는 부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우현의 미래가 어느 정도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우현은 이미 궤도를 탄 것이다. 반면 내게는 궤도가 없었다. 아니, 아직 나의 궤도를 모른다. 궤도를 알게 되면...... 잠은 바깥에서 짬짬이 자야겠지. p.82.' 여전히 나의 궤도를 모르지만, 아니 궤도에서 이미 한참 벗어났는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잘하고 싶다.


맨눈으로 밤하늘을 볼 때는 별이 거기 있는 것을 전혀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망원경으로 그 실체를 자세히 보면, 보고 있는 순간에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저렇게나 커다랗고 예쁜 게 정말 저기 있다고? 지구도 저렇게 떠 있는 거라고? 자세히 볼수록 낯설고, 이상하고, 믿을 수 없어졌다. 저런 게 대체 왜 저기 있는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잡다한 생각을 끝없이 하다 보면 결국 허무해졌다. 그건 나쁜 허무가 아니었다. 광활한 허무였다. 나를 160센티미터짜리 인간에서 해방시키는 담대한 허무. p.81.


작가의 이전글 아침의 피아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