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소설에 맡기고 휴가를 떠나요

2018-08-11

by a little deer
아버지에게 일은 생존력을 뜻했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일은 자존심을 뜻했다. 일은 아버지가 집안을 책임진 사람이란 뜻이기도 했다. 일에는 자각과 자제라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일하는 사람은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일을 하면서 아버지는 가정적인 남자로 굳어졌다. 직장이 있고 어딘가에 고용돼 있으며 생활비를 번다는 뜻인 일은 그 일에 필요한 능력과 실질적인 동의어가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그 자체로 미덕이 되었다. 그랬다. 하루가 길었다. 지독히 외롭고 답답했다. 보수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혜도 없었다. 책상에 앉아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지루한 일이었다. 그러나 반대편과 비교하면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직업이 없으면 내세울 자존심도 마뜩잖았고,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당연히 임금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달리 말하면, 일은 아버지의 윤리적 세계관에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p.10.


토요일 아침이니 늦잠을 자고 - 그래 봤자 더 자고 싶어도 아홉 시 좀 넘어서 수수 보리 때문에 일어난다만 - 느릿느릿 물을 마시고 화장실에 가고 빨래를 돌려놓고 냉장고를 열었다. 배는 고프지만 더워서 딱히 입맛도 없고 - 라고 하면 또 아무도 안 믿겠지마는 - 해서 남은 모닝빵과 요거트와 블루베리를 꺼내고 아이스 라테부터 만들었다. 책상에 먹을 것을 대충 펼쳐놓고 하아품을 백만 번 하면서 고른 책은 바로 이것. - 다음 주에는 휴가를 갈 것이기 때문이다! - 이 책의 편저자이자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리처드 포드의 서문이 흥미로운 것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대공황기에 젊은 아내였던 내 어머니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일("취직")은 다른 것을 뜻했다. 일은 내가 줄곧 주제로 삼아왔던 것들을 뜻했다. 안정된 봉급과, 우리 앞에서 풀려가는 미래가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그런 봉급과 미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밖의 모든 면에서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해서 그런 얘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나는 어머니에게 변변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사랑은 논외로 치더라도 옹골찬 자식으로 보인 적도 없었다. p.11-12.'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조차 그렇다고 하니 여러 의미에서 웃음이 날 밖에. '그러나 프리쳇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에 나도 크나큰 매력을 느낀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일을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일은 인간사에서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사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일의 진실한 모습도 우리 상상의 행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p.18.'


존 치버, 줌파 라히리, 앨리스 먼로, 조이스 캐럴 오츠, 애니 프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등의 이름이 실린 목차를 훑어보다가 제임스 설터부터 읽기로 결심했다. 제목은 '이국의 해변'. 읽다 보니 전혀 상관없지만, 문득 뉴질랜드에 처음 갔을 때 일했던 카페 앞의 바닷가 - 브라운스 베이 - 생각이 났다. 일이 끝나면 바다를 보며 한참을 앉아 있다가 언니네 집으로 가곤 했었다. 아무튼 이 이야기의 끝은 이렇다. '누군가는 애쓰지 않아도 손쉽게 행복을 거머쥔다고 생각하면 구역질이 난다. 네드가 결혼한 여자가 바로 그런 경우다. 네드는 브리지햄튼 근처 고속도로변 식당에서 일하던 여자와 결혼했다. 충격이었다. 충격 이상이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거의 모든 것이 말도 안 되는 일뿐이다. p.643.' 갑자기 누군가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좀 두껍기는 하지만, 휴가 때 이 책을 들고 가볼까 싶다. 서른두 개의 이야기 중 이제 하나를 읽었으니 말이다. 다음으로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약국'을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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