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12
두 사람은 조금 더 식탁에 앉아 있었다. 플로리언이 꺼낸 담배는 불도 붙이지 않은 채 그대로였고 그가 끓인 차는 식어버렸다. 이 순간은 간직하며 떠나겠다, 그는 생각했다. 이 순간은 남겨두고 가겠다. 단정하게 펼쳐진 지금 이 순간이 매일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p.254.
그저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뿐인데 어쩜 이리 피곤할까. 작은 활동에도 금방 지치는 것은 결국 더위 때문인가 한다. 무엇을 해도 아직까지는 작년 여름의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어떤 이유도 특별한 계기도 없다. 그냥 불쑥, 예를 들면 샤워를 하다가 비누를 보거나 혹은 커피를 만들기 위해 냉장고의 얼음을 꺼내다가도,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말과 생각과 목소리와 장면이 있을 뿐. 시간이 더 지나도 어떤 것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슬픔이나 아픔이라고 해도.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할 이유다.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을 때 그녀의 외로움은 그의 외로움이 되었다. 그러다 그는 지나친 욕심을 부려 우정에서 너무 많은 무엇을 바람으로써 위태로운 사랑이 피어나는 것을 무심히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그에게 왔고, 이제 더 커진 죄책감은 연민을 더욱 키웠으며, 죄책감에는 연민이 가진 어떤 위엄까지 드리워졌다. 무모한 착각은 - 오늘 일어난 일로 인해 - 조금 덜 무모해 보였고, 가망 없는 갈망은 조금 더 설득력을 지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고 시간은 멈춘 듯했다. p.254.
윌리엄 트레버를 알게 된 것은 한참 전에 뉴욕타임스에서 줌파 라히리가 그의 단편 중 한 작품을 낭독해주어서였다. - 그때 팟캐스트 같은 채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라디오로 음악을 듣듯이 그저 틀어놓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들었는데, 그녀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라 마음이 묻어나서였는지 아니면 그녀의 낭독 솜씨가 훌륭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척 좋게 느껴졌었다. - 하긴 나는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는 행위 자체부터 책을 잘 읽는 목소리까지 모조리, 무조건 좋아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 책날개를 보니 무려 작가의 나이 81세(!)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그 위에 있는 - 너무나 좋은 인상(!)의 - 프로필 사진도 심지어 '스노우든 경'이 촬영하셨다네, 허허. 갑자기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서 본 캡처 화면의 자막이 생각나 저장해 둔 페이지를 열어본다. '진리에 사는 것 진리에 생명을 거는 것 / 그게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 진실한 사람은 착하게 되어있고 / 진실하고 착한 사람은 내면세계가 아름답게 되어있어 / 그림만 잘 그리면 됐지 / 그 사람 사생활은 어찌 돼도 좋다 이렇게 볼지 몰라도 / 인간이 바로 서야 해 / 작품이란 그 사람의 흔적이니까 분신이니까' - 찾아보니 윤형근 작가의 전시 영상인가 보다, 전시를 보러 가고 싶어 졌다 - 아무튼 나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책날개의 작가 얼굴을 보니 결국 그런 거 아닌가 싶고. 또 순서도 체계도 없이 멋대로 가지가 뻗어나간다. 내가 그렇지 뭐.
침묵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막혀버린 듯했던 대화는 정원을 산책하는 동안 조금씩 되살아났다. 수염가래꽃, 부들레야, 안개나무에 아직 남은 뭉글뭉글한 여름 꽃, 매자나무, 층층나무, 뿔남천. 엘리는 그 식물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몰랐던 이름들이었다. 이어 두 사람은 여름의 그 새가 왔는지 보려고 호수로 갔지만 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다름 자두 나무 너머로 전에 라즈베리가 있던 곳에서 그들은 스칸디나비아에 대해 이야기했다. p.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