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2018-08-26

by a little deer
"그 사람이 우리에게 경고했소. 마스지의 사지는 온전하지만 내면에는 흠이 있다고 말이오. 나태와 속임수를 좋아하는 나약한 구석이 있다고. 그 일 기억나오, 사치코?"
"그 스님은 이 아이에 대해 다른 좋은 말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맞는 말이오. 우리 아들에게는 좋은 품성도 많다고 그 중은 짚어 말했소. 하지만 그 사람이 했던 경고의 말을 기억하오, 사치코? 그 사람이 말하기를, 설혹 좋은 품성이 우세한 때라도 이 아이를 양육할 때 방심하지 말고 그 약한 성향이 언제든 나타나지 않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했소. 그 노승은, 그러지 않으면 이 아이 마스지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말 거라고 했잖소." p.63.


아침에는 화가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었고 오후에는 화가의 그림을 보러 갔다. 윤형근의 전시였다. 그림은 묵직하고 대담하면서 모던하고, 영상 속 조각가의 말처럼 추상주의라기보다는 표현주의에 가까웠고, 답답하고 슬펐다. 어떤 작품을 보다가는 영화 <Arrival>의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떤 정보도 없이 따라나섰던 자매님이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는 전시라고 기뻐했는데, 거기에는 그가 김환기의 사위라는 점, 그의 작업실이 우리 동네에 있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실제로 전시장에 있던 편지 봉투에 적힌 주소를 보고 위치를 찾아보기도 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을 곳이었다. 우리는 그리 오래 전의 공간도 아닌 그 작업실을 잘 보존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고 입을 모았다. 애초에 전시를 보러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던 인터뷰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그는 아름다움을, 예술을 완성하는 마지막 하나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말하고 있었다. 본인도 찾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죽을 때까지 해봐야지, 하면서. 얼핏 슬픔과 고통과 인내를 지겹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내게는 요즘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희망 같은 것을 한 줌 쥐어주는 것 같았다.


친구가 감기 몸살에 걸려 주말 내내 쉬었다고 해서 잘 챙겨 먹고 얼른 나으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러고 나서 불과 한두 시간 후에 괜찮은 줄 알았던 몸이 이상하다. 목이 따갑고 잠기기 시작한다. 도라지 배즙을 데워서 홀짝홀짝 마시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얼른 자야겠다.


유튜브에서 NPR Music Tiny Desk Concert를 종종 보는데 Yo-Yo Ma 편이 올라왔길래 우연히 보았다. 다림질을 하면서 영상을 틀어두고 있었다. 그가 첫 연주를 마친 후, 바로 그 곡으로 네 살에 첼로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첫날 한 마디, 둘째 날 다음 한 마디, 그리고 셋째 날 그다음 마디...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무언가를 배우고 성취해나가고 하는 일이 고통과 인내만이 아니라 기쁨이고 즐거움인 사람(예술가)도 있고. 그런 삶의 비밀은 뭘까.


집에 와서 냉장고를 마저 정리하고 빨래를 널고 쓰레기를 정리해 버리고 설거지와 다림질까지 하면서 또 여러 가지 생각을 했는데, 반은 잊어버린 것 같다. 끝도 없는 이 자질구레한 생활.


맞다. 에릭 칼 할아버지도 떠올렸다. 아침으로 팬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을 먹었으니 이제 일을(그림을) 해야지, 하고 일기를 썼던 것 말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한 생명을 불태운 흔적으로써, 살아 있다는 근거로써, 그날그날을 기록할 뿐이다. - 윤형근, 1990년 우에다 갤러리 개인전 작가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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