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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 kwangsu Mar 10. 2018

사람을 위한 건축이란 무엇일까?

프리츠커 건축상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Pritzker) 건축상은 건축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비전을 선보임으로써 사회와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들에게 수여된다. 그런데 사회나 인류를 위한 건축이라니, 대체 그런 건축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그동안 경험한 건축이란 대부분 경제적 가치를 목적으로 한 투자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파리의 에펠탑이나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같은 예술적인 건물 역시 하나의 상품처럼 소비된다. 홀로 우뚝 솟은 도심의 초고층 빌딩은 자신보다 낮은 건물을 내려다보며 우월함을 과시하지만, 그 역시 상대적 열등의 또 다른 수준에 도달했을 뿐이지 절대적으로 우월한 가치를 지닐 수는 없다. 애초에 상대적인 요인에 의해 가치를 평가받는 건물의 가치가 영원하리라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건물에 투자하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불패신화가 연일 흥행하는 것을 보면 신화에 대한 수요는 여전한 것 같다. 그 덕에 재개발이 예정된 지역에 있는 주택은 투자의 대상이 되어 사람이 살지 않은 채로 방치된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쉽게 무너진다. 빌딩이나 아파트를 꿈꾸며 폐허가 되는 집들이 늘어간다. 굳이 전쟁이나 지진과 같은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어도 건물은 이렇게 쉽게 무너진다. 자본의 토대에 위에 건물을 올린 탓이다. 건물만 있고 사람은 없는 건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쯤에서 나는 프리츠커상이 추구하는 사회적 건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2013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 이토 도요는 자신의 건물을 통해 일관된 메시지를 전한다. 건축은 대체 어떻게 사회와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자신만의 답을 구해온 셈이다. 그는 자본이나 과시를 위한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건물을 고민했다. 그 고민의 결과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드러난다. 그는 공들여 세운 건물이 지진과 쓰나미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지는 광경을 처참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했다. 일터와 재산은 물론 삶을 영위할 최소한의 공간마저도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며 그는 회복을 위한, 희망을 위한, 그리고 사람을 위한 건축을 다짐한다. 모든 건물이 다 폐허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곳에는 아직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집을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 '모두의 집(Home-for-All)'이라는 이름의 쉼터를 짓는다. 여기에는 건물의 재건이나 공간 제공 이상의 의미가 있다. 끔찍한 재난으로 인해 극심한 절망감에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다시 집을 지어주는 것은 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짙은 상실의 그림자를 품은 채 어두운 방구석에 홀로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물리적 공간 자체가 아니었다. 모두의 집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거점이 되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함께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며 속에 담아둔 아픔을 덜어낼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을 한데 불러 모았을 뿐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치유하고 지탱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나는 그의 건축을 통해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얼까 생각했다. 사람은 마치 홀로 우뚝 솟은 건물과 같다. 아무리 위대하고 가치 있다 해도 한없이 위태롭고, 언제든 무너지기 쉬운 연약한 건축물 말이다. 내가 사람인(人) 자를 보며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법을 탐구하기도 바쁜 이 시대에 경쟁이 아닌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나는 그럴수록 서로 기대어 사는 삶이 더욱 절실하다고 느낀다.  더 높은 건물이 되기 위해 애쓰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다 보니 우리는 사람은 본래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라는 것을 곧잘 있는다. 홀로 고독한 시간 동안에 성장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홀로 있는 삶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다. 삶에서 짊어져야 하는 문제와 책임은 결국 개인의 몫이라고 해도 서로 기대지 않고는 도무지 살아갈 방도가 없다. "우리는 나나 저희들이나 한결같이 아무런 의지할 버팀대도 없지만 서로서로를 지탱해 주고, 매 순간 우리들의 상처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삶이 새어나가도 속수무책이지만 서로의 피를 주고받으면서" 살아간다는 장 그르니에의 고백처럼 사람은 결국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를 실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하듯, 종일 걸었던 여행자가 잠시 앉을 곳을 찾듯,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사람이 필요하다. 



인생의 무게는 모두 개별적인 문제라고 해도 인생은 홀로 외로운 여정이 아니다. 언제라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었던 시간들 덕분에 홀로 설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홀로 선 시간 동안 기댈 곳이 필요한 누군가도 내게 기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사람이 곁에 있는 한 나는 희망할 수 있다. 가끔은 지쳐 쓰러질지라도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잠시 기대어 기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고 다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때로는 의지하기도 하고 또 지탱하기도 하면서 험하고 긴 여정을 견뎌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무리 공들여 세운 건축물도 결국에는 힘없이 허물어지기 마련이지만,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결코 무너지지 않는 건축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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