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랜드 Jun 21. 2024

기억의 편린

나를 사랑하나요? 2화


  주소와 호수만 말하고 끊어버렸다. 혹여나 위치추적이 안될까 싶어서였으나, 그럴 필요 없었는지 모르겠다. 드디어 그녀의 표정이 변해 보였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것은 맞았지만, 이게 내가 원한 것이었나. 지금 밖에 비도 오는데? 내가 무슨 행동을 한 건지 생각할 수 없었다.


 처음이었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건. 그 누군가 내게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제 그녀를 모른다고 해야 하는 건가. 그녀가 정말 내게 모르는 사람인가. 아니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녀는 항상 어떤 하루건 기억에 남았다. 어디에 있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녀는 내 뇌리를 항상 스쳤다. 사실. 어쩌면 이제 정말로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껏 그 사람을 그녀라고 불렀고, 내 하루의 기억에 남는 그 사람은 제게 어머니, 내게 엄마였으니. 나는 지금 다른 어떤 이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고, 그 사람이 여성이니 그녀라고 지칭하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지도 않았다. 울음을 터트리고 싶지도 않았다.


7년 전 겨울 눈이 오던 날. 그 사람은 분명 내게서 떠나갔었다. 분명히 그랬다. 그 날 내리던 눈은 정말로 아리따웠고, 나는 가장 아름답지 않은 기억을 매번 한겨울의 추위보다 더욱 춥게 기억한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추운 기억 하나 때문에 지금 내가 울고 싶진 않았다. 나는 아까 떨림을 참을 때보다 더욱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숨이 떨렸지만 이내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울렸다. 그 사람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건 전화 안에 그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이는 과연 그 사람일까.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는 음성이 들렸고,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저 내려놓기만 했다. 이윽고 초인종이 울렸다. 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여전히 휴대폰만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현관 앞으로 가더니, 뒤돌아보았다. 나지막하고 정말 따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딸아, 커피는 늦은 저녁에 마시지 마렴. 그건 밤이 너무 아쉽잖니.’

숨을 한 번 주욱, 들이키더니 다시 내뱉었다.

‘그래, 정말 그래, 시간이 많이 지났네. 내 아가, 많이 컸구나.’

그 사람은 현관을 열고, 또 경찰과 마주쳤다. 나는 출동한 경찰관에게 경위를 설명했고, 그 사람은 잠시 남아서 경찰이 내가 이야기하는 말을 모두 듣고 나서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다시 현관이 닫혔고, 나는 작은 화분을 바라봤고, 내 방 안 가장 푸른 그것을 바라봤다. 눈앞이 요동쳤다. 일렁였다. 아른 거렸다.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그 사람이 앉아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고, 그 자리는 조명이 닿지 않아 그늘져있었다. 나도 고개를 숙였고, 내 얼굴에도 그늘이 생겼다. 그대로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눈물은 떨어졌고, 나는 쉬이 몸의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그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원래 나는 그 사람의 그늘 아래에서 자랐다. 마치 양산을 쓴 듯이 아니 어쩌면 선글라스를 쓴 듯이. 나는 그 사람의 세상에 있었다. 그 사람은 내 세상이었다. 하늘이었고, 모든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이 똑같은 번호를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억울했다. 그렇게 떠나갔다면, 번호라도 바꾸지. 차라리 번호라도 바꿔버리지. 괜히 내가 엄마를 찾지 않은 것 같았고, 그리 느끼는 사실이 너무 나를 밉게 했다.


엄마의 휴대전화 뒷번호는 내 생일이었다. 괜히 휴대전화를 갖고 와서 그 떨리는 몸으로 엄마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러보았다. 눌렀다 다시 지웠다. 눌렀다가 지웠다. 그 횟수만큼 내 생일에 엄마가 차려준 미역국이 생각났다. 매번 다른 음식을 차려줬지만, 미역국 맛은 한결같았다. 항상 향긋한 미역내음. 적당히 짭조름한 국물, 그리고 언제나 맛있는 소고기. 엄마의 미역국엔 항상 특별한 비법이 없었다. 하지만 특별했다. 항상 맛있었으니. 언제 곤 또 찾고 싶었지만,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 기억을 가다듬어보았다.


생일 다음 날엔 항상 계곡에 놀러 갔다. 뜨거운 여름의 가운데에서 엄마와 같이 가는 항상의 여행이었다. 엄마는 흔들거리는 바위 위에 서있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어린 마음에 하지 말라며 무섭다고 외쳤다. 엄마는 물가가 아닌 곳에서 큼지막한 바위 하나를 잘 찾아내 그 위에서 덜컹거리며 나를 놀렸다. 어느샌가 청청한 하늘이 낮아진 것을 느끼게 되면 엄마는 나를 데리고 산장에 들어가선 손을 씻기고, 시원한 수박 한 통을 잘라 포크와 같이 가져왔다. 엄마는 계곡에서 수박을 쪼개먹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항상 계곡에 가기 전 숙소를 먼저 들려 수박 한 통을 냉장고에 들여놓고 계곡으로 나갔었다. 수박을 한 입 베어 물고 있으면, 엄마는 뭐가 그리 바쁜지 칼과 도마를 씻고 나선 조명을 한 개만 켜두고, 노래를 틀었다. 난 수박이 맛있었고, 입술의 몽우리진 곳으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거침없이 먹었다. 입에 한가득 넣고, 수박과 눈싸움을 했다. 엄마는 항상 내 머리를 양 갈래로 쓰다듬었다. 나는 앞으로 가지런한 것이 가장 좋았지만, 엄마의 손길이 부드럽다고 느껴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나는 엄마가 나를 보는 게 마치 촛불과 같다고 느꼈다. 나는 그것을 보지 않지만, 엄마의 눈은 항상 나를 보고 있었고, 그 눈길은 따뜻했다. 차분했고, 조금씩 일렁였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기억을 다 세지 못하고, 가다듬지도 못했다. 그 모든 걸 엄마가 내 머릿결을 매만져줄 때처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잠에 빠졌다.



 꿈을 꾸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그 어정쩡한 시간의 틈 속에서 나는 창문 앞에 있었고, 차가운 눈꽃이 콧잔등 위에 앉았다. 눈은 소복소복 쌓여갔고, 나는 일 년 내내 살 찌운 옷을 입었다.  봄과 여름 가을의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과 초연한 빗줄기는 옷장 안에 놓인 겨울옷을 전년도보다 더욱 두툼하게 살 찌웠다. 나는 그 포근함에 감싸 안겨 방 밖으로 나갔다. 거실엔 무슨 가삿말의 노래가 잔잔하게 흘러오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계절의 편지 같은 눈은 여전히 밖에 있었고, 나는 엄마의 방 안에 들어갔다. 방문을 열었고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녀의 등 뒤로 가서 그녀를 안았다. 꼭.



 ‘엄마, 나 꿈꾼 거 같아.’,

 ‘그랬어?’,

 ‘있지 엄마는 그런 적 있어? 엄마는 꿈꾸고 나서 무슨 꿈꿨는지 기억 안 난 적. 그런 적 있어?’

 ‘그럼 당연하지 그럴 땐 다시 잠들어보려 하기도 한단다?’

 ‘근데 그럼 기억이 안 나는데 슬플 수 있어?’

 ‘음.. 슬픈 일이 기억을 먹어버린 거 아닐까?’,

 ‘엥 그게 뭐야’

‘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울 아가가 지난번에 엄마가 해준 비빔밥을 먹었을 때, 정말 너무 배부르지 않았어?’

 ‘맞아, 배가 너무 불러서 정말 힘들었어’

 ‘그때 비빔밥이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나?’

 ‘아니 잘 안나는 거 같아’

 ‘그런 거랑 비슷한 거 아닐까? 너무너무 배불렀던 것만 기억나고, 비빔밥에서 무슨 맛이 났는지 또 어떤 게 들어갔는지 기억이 안나는 거랑 비슷한 거 같아. 어때? 그런 거 같아?’

 ‘음.. 잘 모르겠어! 근데 맛있었던 거 같아!’

 ‘그래? 그렇게 기억해 줘서 고마워. 근데 아마 다시 먹어보면 지난번에 먹은 비빔밥이 그 맛이 맞는지 비교해 보면서 기억이 날 거 같은데?

기억은 수연이 머리 안에 있기도 하지만 마음에 숨어있기도 하거든.’

 ‘기억이 그런 거야?’

 ‘아닐 수도 있고?’

 ‘너무 어려워!’

 ‘하하하, 아냐 어렵지 않아. 너랑 항상 같이 있는 게 기억이라서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느낄 수 있을걸?’ ‘그래도 어려운 거 같아.’

 ‘그래? 그럼 우리 오믈렛 해 먹을까?’

 ‘옴렛?’


 그랬다. 나는 항상 오믈렛을 옴렛이라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어감이 오물오물이랑 비슷해서였던 거 같다. 엄마는 언제나 주말엔 아침이건 점심이건 저녁이건 밥을 해주셨다. 매번 색다른 요리는 아니었지만 매번 맛있었다. 지금 그 요리 중 하나를 엄마는 또 선보이려는 것 긑다.. 나는 자리에 앉아있고, 엄마는 루를 볶기 시작하곤, 소스를 먼저 만든다. 밥을 휘적, 휘리릭. 볶아버리곤 한 김 식혔다가, 계란을 풀어 볶음밥이 있는 접시 위에 얹곤, 그 위에 소스를 뿌린다. 오목하게 들어간 접시는 엄마가 항상 볶음밥을 내놓는 곳이었다. 나는 내가 아닌 듯했다. 저기 자리에 앉은 꼬마애는 어린 시절의 나였지만, 나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난 천천히 그 애를 바라봤고, 그 애는 나와 시선이 마주친 듯했다. 잠시. 아주 잠시. 그리곤 이내 눈을 돌려버리고, 코를 킁킁거린다. 마치 오랫동안 봐온 듯이 시선이 그 애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고, 갑자기 모든 것이 흐릿해져 갔다. 잠에서 깨고 난 후 눈이 아직 덜 떠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지랑이 같이 피어오른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추지 못했고,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햇빛은 눈 위에 쌓였고, 따뜻함과 무거운 눈꺼풀에 찬찬히 눈을 떠보았다. 창문은 여전히 열려있었고, 햇살은 결대로 누워져 방안에 쏟아지고 있었다. 무엇이 꿈이었을까. 긴 밤이었다. 밤의 공기는 옥상 위 빨랫줄에서 말라갔다. 햇살은 그대로 그들을 멀리 떠나보내었다. 어젯밤의 눈물 자국도 말라버린 채 그대로 내 얼굴 위에 남아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잠든 곳이 방바닥이고, 옆엔 화분을 놓은 탁자가 있었고, 햇살이 누워있는 것만 알아차렸다. 딱 3개가 눈앞에 차오르곤 다시 눈을 감았다.


숨을 길게 내쉬려 했지만, 떨렸다. 숨은 마음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답답함을 느꼈다. 더운 숨이 안에 차올랐다. 가까스로 온몸이 숨을 내뱉었다. 처연하게 널브러진 것 같은 몸을 일으켰고, 의자에 앉았다. 나는 내가 겪고 있는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너무나도 벗어나고 싶었다. 어젯밤에 그 사람이 앉아있었던 침대 모퉁이를 가볍게 시선으로 쓸어내렸다. 기억을 가다듬으려 했다. 노트에 나이와 햇수를 적어가며 불이 꺼진 방에서 스위치를 찾듯이 더듬더듬 기억을 찾아보려 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오래전부터 이 일을 준비한 것 같기도 했다. 18살엔 엄마가 모아놓은 돈과 아빠가 남겨놓은 꽤 큰돈을 모두 내 명의의 통장으로 묶어두었다. 그땐 항상 엄마와 같이 장을 보기도 했다. 단순히 장을 본 건 아니었다. 엄마는 때때로 어떻게 하면 이 맛이 난다는 것을 알려주고, 나와 함께 주방에서 시간을 보내던 순간이 있었지만, 엄마는 내게 어떤 재료가 어떤 비율로 들어가고, 몇 개를 덜 넣으면 맛이 사라지고 몇 개를 더 넣으면 맛이 생기는지 자세하게 알려주려 했다. 장 보는 것은 그것의 일환이었다.


엄마는 장 보는 것에 있어선 딴 사람 같았다. 아니, 어떤 일이든 엄마가 한순간 집중하거나 몰입할 땐 엄마가 다르게 보였다. 엄마는 어떤 식품, 식재료가 신선할지, 맛있을지 그리고 좋은 것인지 알려주면서 장을 보았다. 엄마의 손은 경박하지 않지만 빠르게 식재료를 찾아냈고, 손길은 느리진 않았지만 우아했다. 엄마가 장을 볼 때 알려주는 것은 색깔로 과일 중에서 신선한 것을 찾는 법 같은 대게 주부들이 공유하는 것이나 인터넷에 소위 비법이라고 칭하던 모든 것들을 함축해 두었다. 그것을 내게 알려주려 했고, 더 알 수 없었던 것은 엄마는 항상 어떤 게 고장이 나거나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으면 날 불렀다. 가끔은 자기가 고치다가 망가질까 봐 두렵다며 나를 불렀고, 가끔은 네가 해놓은 게 깔끔하다며 나를 불렀다. 정말 그 이유뿐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건 엄마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알려주려 하는 것 같았다. 그중에선 가계부를 쓰는 법도 포함됐었다. 엄마는 항상 가계부를 썼는데, 그 내용은 굉장히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기억을 해보면 가계부에 기입해야할 것은 모두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기입되는 것의 종류는 많았지만 정리되어 있었고, 항상 결론과 종합적인 평가가 나와있어 그것만 보더라도 이 달은 얼마나 계획적으로 돈을 굴렸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유독 알아보기 힘든 그것은 엄마의 코멘트였다. 항상 엄마는 가계부의 필요한 정보를 써넣는 것보다 훨씬 더 길게, 가령 정보를 쓰는 게 반 페이지 정도 됐다면 그것에 대한 엄마의 코멘트는 항상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엄마는 무엇보다도 그것에 공들여서 적어 내려 갔으며, 어느 때는 밥 먹다가 말고, 이상하리 만치 갑작스럽게 그 붉은 양장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가계부라고 써진 그것을 열어젖히며 글을 휘갈겨 써놓았다. 물론 내게 보여주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엄마는 그의 관념이나 생각에 빠져들어 당장 적지 않으면 휘발해 버릴 것을 붙잡아두려 함이지 않을까. 어쩌면 그건 엄마의 비밀일기와도 같은 맥락이었다. 엄마는 항상 그러한 코멘트를 달아두었고, 나는 그것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렇게 가계부를 쓰며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내 행동에 대해 절제하는 법은 배웠었지만, 그것이 꼭 계획으로 이끌어지진 않았다. 그랬기에 엄마가 적는 가계부나 내게 알려주려 따로 사온 양장노트에 무엇이 적힐 때에도 엄마가 알려주는 이야기에나 집중을 했지, 엄마의 비밀일기인 가계부에 관심이 있진 않았다. 엄마는 항상 가계부에 무언가 집중해서 적어 넣었고, 그렇게 가계부에 집중해서 적어 넣은 것은 꼭 내게 무언가 알려준 뒤였다. 집안의 잡일들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을 쓰는 일 혹은 소비를 선택 하는 법이라던지. 결국 마지막에 나는 엄마가 하는 방식의 집안일을 고스란히 알아차리게 됐다. 엄마가 잔소리하는 방식이 왜 생겼는지 알게 되었다.


문득 떠올랐다. 나는 그 코멘트가 궁금해졌다. 그 순간. 엄마가 무언가 적고, 무언가를 내게 알려주고, 또 적던 순간. 그것으로 기억을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그때가 시작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하면서 준비를 한 것이 아닐까. 나도, 어쩌면 엄마도 모르게 준비하고, 대비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때를 위해서. 그때, 19살 1월 7일


아직 새벽의 입김이 가시지 않은 어느 때 이른 아침에 엄마는 초연하게 내 머리맡에 와선 내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창문을 열고 자서인지, 누비이불이 내 머릿결에 부스럭거리는 건지 잘 몰랐지만 이제 기억을 가다듬으면,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양갈래로 빗듯이 쓸고는, 이내 방문을 나가선 그 길로 현관 앞으로 향하였다.


아마 짐작건대 신발장에서 나는 소리와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간극이 길었던 것으로 보아 엄마는 현관 앞에서 잠시 나를 봤으리라. 엄마는 잠시 신발을 신다 말고, 엄마의 분신과도 같은 이제 겨우 엄마의 잔소리를 이해하기 시작한. 그러나 엄마의 잔소리가 아직은 미운 그 소녀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그것도 잠시, 엄마는 현관을 열었고, 그 길로 엄마는 나가버렸다.

이전 02화 그녀와의 독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