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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랜드 Jun 13. 2024

그녀와의 독대

나를 사랑하나요? 1화


 ‘내겐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된단다.’


그녀가 말했다. 이윽고 의자가 흔들거렸고, 나는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은 채 그녀가 말하는 행동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 앉아 간이탁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그냥 이야기하는 거야,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만.’


이상했다. 왜 그녀는 내게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지, 또 지금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 눈은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지. 나는 알 겨를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을 빙빙 돌리기만 할 뿐이고, 나는 그 손가락 아래에서 도망 다니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자그마한 답답함을 느껴 창문으로 손을 뻗었다. 밖에선 비가 들이쳤고, 나는 차가운 빗방울이 좋았다. 창가 가까이 가서 그녀의 손가락을 피해보려 했다. 그녀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비가 창에 부딪히는 소리와 물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만 남을 뿐, 냉장고의 냉매가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간이 분리된 기분이었다. 그저 아무 말이나 내뱉어봤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전 차가운 비가 좋아요. 비를 맞고 있으면 저가 사라진 기분이거든요. 비가 쏟아질 때 밖에서 나뒹구는 상상도 몇 번 해봤어요. 가끔 귀 안에 들어가는 때도 있지만, 그건 뭐랄까. 찝찝하기보다는 재밌어요. 비가 내 몸을 청소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요. 아 혹시 비 맞는 걸 좋아하시나요. 저는 비 오는 날의 냄새도 좋아하거든요.  그거 아세요? 비 오는 날은 다른 날보다 냄새가 짙어져요. 어떤 계절이든 비가 찾아오면 냄새가 짙어지더라고요. 아스팔트 냄새도 철 냄새도, 제 몸에서 나는 냄새도 무엇인가 짙어져요. 비가 오는 날엔 심장이 진자운동을 하는 거 같기도 해요. 비에 쓸려나갈 듯이 떨리지만 결국 철렁. 떨어지진 않거든요. 그래서 비를 좋아해요.’


그녀는 궁금해하는 표정 같기도, 동의하는 표정 같기도 한 하얀 얼굴을 가지고,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내심, 그녀가 원하는 이야기가 이것이 아닐까 싶어. 갑자기 주제를 돌려보려 했다.


‘아, 희망봉에 가보셨나요? 전 정말로 그곳에 가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 동경이 무색하리만치 의미 없어졌죠. 저가 아는 아저씨가 희망봉에 여행을 갔다가, 글쎄 괴한들에게 지갑이랑 핸드폰을 뺏겼었대요. 아 그렇지 카메라도 뺏겼던 거 같아요. 앞에 철로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들이 갑자기 자신을 덮쳤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동경은커녕 이젠 생각도 잘 안 하죠. 엇 또 제가 좋아하는 걸 이야기해 버렸네요.’ 나는 덜컥 겁이 나서 그녀에게 물었다. ‘원하는 이야기가 이게 아닌 거죠? 제가 무엇을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요.’


 그녀는 서서히 옅어지는 입꼬리를 조금 들어 올리며 웃었다. ‘특별히 원하는 이야기는 없단다. 내겐 원하는 게 이제 없거든. 하지만 너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었으니 얘기한 거야. 지금 그 이야기가 나는 참 좋단다.’ 그녀의 눈은 촛불 같았다. 당장이라도 촛농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뜨거운 촛농을 잡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눈을 정말 잠시 감았다가 떴다. 그녀와 이야기를 더 해야 했다. 무슨 말이라도 안 하면 이 공간에서 튕겨나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까와 비슷한 자세로 입꼬리를 내리고 다시 아까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이 낯 뜨거워서 그랬는지 열어둔 창문에 한기가 들어서 인지 꿈에서 깨어나듯 번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행동은 전적으로 멍청해 보였다. 또 멍청하게 질문을 던졌다.


‘밖에 오래 계셔서 춥죠. 어.. 따뜻한 차는 없고, 커피는 있는데 그거라도 드릴까요? 아 너무 늦었을까요. 커피를 마시면 잠에 잘 못 드나요? 저는 잘 드는 편이거든요. 잠에 쉽게 들어요.’


나는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은 거 같았다. 그녀의 반응을 보았다.


‘아냐 지금 충분히 따듯한걸. 나는 지금 바라는 게 없단다.’


그녀는 똑같이 자리에 앉아서는 팔만 쭉 내뻗었다. 흉터가 보였다. 하얀 팔 위에 그 자리만 거멓게 그을려 있었다. 그다지 큰 흉터는 아니지만, 그래도 시력이 안 좋은 내 눈에도 보일 수 있을 만큼은 컸다. 나는 무색해진 내 행동을 가다듬으려고 또 말을 내뱉었다.


‘그럼 전 커피를 마셔야겠어요. 잠자기 전에 커피는 안 좋다고들 하던데, 저는 괜찮았거든요. 어쩌면 이게 중독된 거인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잠자기 전에 따뜻한 음료를 마시면 좋잖아요? 제겐 그 음료가 커피인 거뿐이죠. 뭐 다른 사람들은 우유를 마신다고도 하고, 홍차를 마신다고도 하는데, 그것들은 그다지 향긋하지 않아요.’


나는 드리퍼를 꺼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요샌 차갑게도 많이 마시지만, 저는 이렇게 뜨거운 게 좋아요. 따뜻한 거 말고요. 따뜻한 건 입만 온도를 느껴요. 뜨거운 건 배 속까지 느끼더라고요. 아 물론 데일 정도로 뜨겁게 마시면 며칠 동안 고생해서 별로지만요. 그렇게 멍청한 짓은 안 해요. 저는 제 취향을 알거든요.’


뜨거운 물을 붓곤, 천천히 기다리고 있었다. 싱크대 위에 두 손을 올려뒀다가, 빗소리가 커지는 듯 해 창문을 닫으려고 다시 자리로 갔다. 닫으려는 시늉은 했으나, 반만 닫았을 뿐 사실 열어놓았다.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커피를 좋아하는구나. 언제부터 마셨니? 처음 마셨을 때의 기분은 어땠었니.’


나는 무심코 옛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 음, 아마 20살 때였을 거예요. 좋아하는 친구랑 카페에 갔는데, 당연히 전 레모네이드를 시켜서 마시려 했죠. 전 신맛도 좋아하거든요. 한꺼번에 주문하려고, 그 애한테 물어봤어요. 뭐 마실건지. 사실 처음이었어요. 누구랑 같이 가서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본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마시는 걸 본 적은 있어도, 아메리카노를 따뜻하게 주문해서 먹는 건 주변에서 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당연하게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고 약간 들뜬 목소리로 다시 물어봤죠. 그 애는 확실하게 따뜻한 걸로 주문하면 된다고 말했죠. 약간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그 애는 제게 물었죠. 너도 마셔볼래? 은근히 먹을만할 텐데. 은근이라는 말에 끌려 그대로 주문을 하러 갔죠. 따뜻한 아메리카노 2잔을 달라고 했고, 또 먹고 갈 거라고 했어요. 약간의 기대감과 함께 기다렸었죠. 음료가 나오자마자 갖고 와선 자리에 놓고 잔부터 잡아봤어요. 그 애는 손잡이를 잡았고 전 컵 몸을 잡았죠. 그 애는 천천히 향부터 맡았고, 전 꽉 움켜잡았다가 다시 내려놨죠. 너무 뜨겁더라고요. 그 애가 컵 뒤로 미소를 숨기고 있는 거 같아서 괜히 머쓱해졌고요. 그래서 다시 컵 손잡이를 잡고, 그 애를 따라서 향을 맡아봤죠. 쌉쌀한 향과 약간의 들이마시고 싶은 향이 났어요. 그 애가 하는 것처럼 후후 불다가 마셨죠. 그게 첫 모금이었어요. 저가 너무 소극적인 거 같아 후루룩 마셔보려 했지만 그러다간 제 식도에 꼭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천천히 마셨죠. 반강제적이었어요. 레모네이드처럼 달큰시큼하진 않았지만, 어우 얘기하는 지금도 침샘이 열리네요.’


나는 이야기하다 침을 꿀꺽 삼키면서 떠벌떠벌 이야기하는 내 입에서 침이 튀어나가지 않을까 조심하면서 이야기를 잠시 멈추었다. 내려놓은 커피를 잔에 옮겨 담고, 코 가까이 잔을 올렸다. 숨을 옅고 깊게 들이쉬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커피는 레모네이드보다 훨씬 덜 달았던 거 같아요. 아니 어쩌면 쓰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그리고 미비하지만 정말 약간의 신맛이 남아있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또 엄청 쓰기만 한 커피도 있다 하더라고요. 근데 그 커피는 지금 이 커피와 비슷한 향을 풍겼어요. 그래도 맛은 없었지만요. 괜히 카운터에 있는 애꿎은 메뉴판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커피가 담겨있는 잔을 바라봤어요. 제 표정이 얼마나 더러웠으면, 그 애가 정말 환하게 웃더라고요. 크게 웃었어요. 딱 제가 민망해질 정도로. 그래서 저는 다음에는 레모네이드를 시켜 먹어야겠다고 다짐만 하고, 민망함을 돌리려고 화장실에 다녀온다 했죠. 그게 제 첫 커피였어요. 민망하고 맛없었죠. 뭐 향이 좋았단 기억은 있지만요. 맞다, 뜨겁기도 했고요.’


나는 그대로 식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와 비슷한 원두였지만, 지금 이 커피는 따듯하고, 향긋하고 오히려 정말 약간의 달달함도 느껴질 정도였다. 아 맞다. 내가 시럽을 두 번이나 펌핑해 넣어서 그런 거 같다. 어쨌든 몸이 풀리는 맛이다. 그녀는 예전 그 카페의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처럼 조용하게 얘기에 빠져들었고, 커피를 마시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대학생 때엔 그 커피가 마지막이니?’


나는 조금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사실 그 친구와 카페에 가면 유독 커피를 마셨어요. 다음에 갈 땐 그리 미숙하지 않게 보여야겠다는 마음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항상 가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죠. 여름에도요. 어느 날 그 애가 처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먹는 걸 보았지만, 저는 따뜻한 걸 시켰어요. 마치 오래전부터 제가 이 음료를 즐겨왔다고 느끼게끔 말이죠. 그 애는 이미 실상을 파악해 버려서 처음 같이 간 그때 한바탕 웃었는데 말이죠. 얼마나 웃겼을까요. 매번 손잡이가 아니라 컵 몸통부터 잡는 제 모습이. 어떨 땐 멍청해 보였겠죠? 몇 번 마시다 보니 은근히 괜찮더라고요. 쓴 맛이 아니라 씁슬한 맛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다른 카페는 또 다른 맛의 커피가 제공된다는 것도 알아차렸죠. 커피를 주문하는 저를 친구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요.’


어느 정도 손이 따뜻해지자,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에게 미안해졌는지 내 앞에만 잔이 있는 게 무색해 보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물었다.


‘물.. 은 괜찮으실까요?’


당연하게도 그녀는 좋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내 기분과 비슷하다고 느끼며 잘 물어봤다고 나름 흡족해했다. 아까 끓여놓은 물이 조금은 식었으리라 생각하며, 잔에 물을 부었다. 그녀에게 건네며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커피 말고도 처음 접해봤었던 음료는 많아요. 아! 그렇지 레모네이드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음료거든요? 15살 땐가. 친구를 따라 친구네에 놀러 갔었는데, 친구의 아빠가 있었고, 그 아저씨가 레모네이드를 타줬어요. 직접 착즙길 사용해서 만들어주셨거든요. 그 댁의 냉장고를 손 씻고 식탁에 앉으면서 슬쩍 보았는데, 신선한 과일이 여럿 줄지어 배치되어 있었어요. 꽤 형형색색의 색깔들이 신기했어요. 집에서도 과일은 먹지만, 이렇게까지 구비를 해두진 않았거든요. 마치 뭐랄까. 전투식량같이 각을 맞춰서 배열되어 있었어요. 거기서 레몬을 한 개 그리고 윗 칸에서 레몬청을 꺼내더라고요. 제가 아는 과일청들은 꽤 찐득해 보였었는데, 아저씨가 꺼낸 레몬청은 정말 묽었어요. 노란색 선글라스를 녹이면 저런 빛이 나올까 하는 색깔이었거든요. 잠시 눈을 돌린 사이에 레모네이드를 가져오셨어요. 위에는 자그마한 레몬 조각하나 가 올라가 있었고요. 아저씨는 제 친구와 얘기를 시작했고, 전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셔봤어요. 청량했어요. 탄산이 있었는데, 목 따가운 청량함이 아니라 시원한 느낌부터 들었어요. 달다가 상큼하다가, 새콤하다가 달콤해지고, 시원해지는 맛이었어요. 아예 컵에 코를 박고 마신 거 같아요.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째 되다가, 안 되겠다 하고 한 번에 마셔버렸어요. 전 원래 음료를 아껴서 아껴서 마시거든요? 근데 그게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한 번에 다 마셔버린 건. 잔을 내려놨죠. 근데 아저씨 눈에 띄었나 봐요. 아마 잔을 두는 소리가 이야기소리보다 약간 컸나 보죠. 그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치즈케이크와 남은 레모네이드를 더 따라주셨어요. 그 아저씨는 커피를 마시긴 했지만요. 그리고 아저씨는 그대로 방문을 닫아주고 나가셨어요. 그때 처음, 레모네이드를 좋아하게 됐어요. 지금도 그 아저씨한테 레시피를 못 물어본 게 아쉬울 정도예요. 그 애랑 이제 안 친하거든요. 꽤 오래됐고요. 또 저는 그렇다고 그 아저씨한테 레시피만 물어볼 정도로 낯 두껍고, 친화력 좋은 사람은 아니라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녀는 이제 다소곳하게 앉아선 내 쪽으로 더 팔을 기울였다. 그 이야기는 마치 오래전에 들어서 기억한다는 듯이 동의하는 제스처였다.


나는 닻줄을 끌어올리듯이 옛이야기를 주절주절 꺼내왔고, 그 덕에 문득 든 생각은 커피잔을 잡은 손에 힘을 주게 하고 다시 이야기, 아니 질문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왜, 찾아오신 거예요?’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무응답과 대답하지 않는 것이 자기의 대답이라는 듯 시간을 끌었다. 나는 그녀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질질 끌리는 시간에 자리했다. 오래되는 시간에 권태를 느낀 것은 내 쪽이었다. 난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지만, 무슨 말이라도 하길 바랬다. 아까 그 촛불 같은 눈이 다시 반짝이는가 싶어 내가 먼저 말을 꺼내버렸다.


‘정말 많은 일을 겪었어요. 기억하는 한 모든 이야기를 꺼내려면 이 밤만 필요한 게 아니겠죠. 어쩌면 며칠 혹은 한 달의 밤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 많은 기억에 당신은 없었잖아요. 왜죠. 왜 제 기억을 다시 가다듬을 시간조차 앗아가는 건가요.’


내 눈은 그녀의 눈에 맞춰지지 않았다. 아니, 맞춰지려 하지 않았다. 속에 들어간 커피를 게워내듯이 말을 퍼부었다. 아까의 뜨거운 커피는 몸을 데우기 충분한 열을 가졌고, 나는 그 열을 올바르게 식히는 법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크게 열을 냈다. 열을 더 끌어올렸다. 아까 그 레모네이드의 상큼함과 시원함 같은 괜찮은 청춘의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홀로 열이 끓어올라 주체하지 못한 어린애만 남았다.


‘당신이 내게 그랬잖아요.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옥죄는 삶도 두렵지 않다고 그랬어요. 제게 그렇게 말했죠.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없었죠. 나는 그게 궁금했어요. 제 기억은 환상에 불과했나요.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왜죠 왜 이 시간에 이 삶에 찾아온 거예요. 비웃고 싶었나요. 제게 그 모든 일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려주고, 제게 그 모든 일이 가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나요. 그 이후에 나오는 제 반응이 웃기고, 재밌을 것 같았나요. 저는 아직 그 기억들이, 당신이 곁에 있었던 기억이 아름다웠어요.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먼 옛날이 있더라도, 전 행복했을 거라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어요. 하지만 아직 둘 자리를 찾지 못했었죠. 아직 난 잘 모르는 거 같아요.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내가 왜 이렇게 당신에게 화를 내고 있어야 하죠. 당신에게 화내는 것조차 나는 당신 탓이라고 생각해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오한이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나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잠시 그저 정신을 잃어버리고 싶었다. 머리는 무거웠고, 내 삶에서 비를 처음 싫어하게 되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있는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려고 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뱉어낸 말들이 역한 것은 아닌가 확인해보고 싶었다. 시선을 멈추었고, 그 끝엔 그녀가 있었다. 여즉 그녀가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 울렁거림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이 이젠 역해져서일까. 저녁에 너무 많은 카페인이 들어가서일까.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나는 숨을 참고, 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몸의 떨림이 심해졌다. 이를 악, 물었고 눈에 힘을 주었다. 창가에 손을 뻗어 창문을 닫았고, 숨을 또 한 번 깊게 내쉬었다. 말을 아끼었다. 대신, 고민했다. 소리를 지를까. 차라리 다 내뱉어 버릴까. 목구멍을 박박 긁어대는 모든 말을 꺼내버릴까. 묻고 싶었던 것을 모두 물어보고, 울어버릴까. 아니, 아니야. 너무 초라해 보였다. 무언가 제정신이 아닌 아이처럼 보이고 싶었다. 차라리 그게 낫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냥 나는 그게 편했다. 나는 그래서 전화기를 꺼냈다. 경찰에 전화를 했다.

 ‘지구대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제 집에 들어와 있어요.’

 ‘출동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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