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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랜드 Aug 26. 2024

왜 아직 살아있나요?

카뮈의 작품세계에 관한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아이가 바닷가에서 놀고 있다. 쨍한 햇살이 아이를 비추었고, 그 짧은 다리와 팔로 아이는 마치 파도를 끌어안듯이 헤엄을 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해변에 머물 뿐 바다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 따뜻하게 데워진 모래사장 위에서 아이는 뛰어논다. 황금빛 모래가 부드럽게 밟히고, 바다의 짠 내음이 아이의 머리를 적신다. 편안함을 느낀다.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볼은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면 누른 그대로 자국이 남을 것처럼 부드러워 보인다. 그리고 아이는 은은하게 퍼져오는 바람 소리에 따라 노래를 부르며 모래에 손을 파묻는다.

 

 해변에 널어놓은 빨래가 마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모래를 본 아이는 더 이상 모래가 황금빛이 아닌 것을 깨닫는다. 아이는 갑자기 어둑해진 주변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모래, 바위, 해변 옆의 집들 시선의 끝이 어느덧 바다로 향한다. 바다를 본 아이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응시한다. 아까의 청량한 빛으로 빛나는 바다는 온데간데 없고, 아이는 처음 보는 바다의 빛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게 눈앞으로 다가온다. 아이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지만 보는 것은 움직이고 있다. 파도가 아이를 휩쓴다. 쾅!


번개가 치고 한 채의 집은 가뿐히 삼킬 만큼의 파도가 끝없이 몰려온다. 그리고 아이는 사라졌다. 며칠 뒤, 아이의 아비는 장례식에서 아무것도 없는 관을 쓸어낸다.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한 것인지, 고통이 몸을 잠식한 것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관을 쓰는 손이 떨린다. 아이의 어미는 과연 살아서 낼 수 있는 소리인지 의심스러운 신음을 내며 친척들의 팔에 붙들려있다. 마치 이미 삶은 그녀의 것이 아닌 것 같다. 겨우 다른 이들의 눈물, 고통, 처량한 몸짓으로나마 겨우 삶을 지탱하고 있다.


 많은 이들의 애도, 그리고 곡소리. 몇몇 사람들은 곧 장례식을 떠난다.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날 바다가 너무 날씨가 안 좋았어.’

‘맞아, 아침에 보니까 어두컴컴한 것이 꼭 태풍이 올 거 같더라니까’

‘하늘도 무심하지, 저리 어린애를 데려갔을꼬…’

‘애 부모가 좀 각박했어야지. 항상 자기들만 생각하고, 남 욕이란 욕은 어찌나 하고 다니던지. 그게 우환이 된 거야.’

‘이 사람아! 못하는 소리가 없어.’

‘내가 틀린 소리를 했나? 사실이 그렇잖아 사실이! 바다가 갑자기 분노한 거라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애가 왜 죽어’

‘그만들 하시죠. 애 부모는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내리 밥도 못 먹는 거 같더만..’

‘그렇겠지. 괜히 애를 놀게 두어서 그 사달이 나게 하나.. 본인들 마음도 미어지겠지.’


 장례식이 끝나고, 어미는 장지까지 따라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선 기절하듯이 통곡하다가 눈물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 되면 몸을 파르르 떨면서 신음을 냈다. 그러다 아이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 정신이 들었을 땐, 눈앞에 보이는 검은 양복들. 아비는 부인의 손목을 잡고, 목을 잡고 처량한 소리를 낸다. 그때 아이 어미의 눈에 들어오는 아이의 영정사진. 그녀는 순간 그 아이를 품에 안았던 때가 떠올라 아이의 영정사진을 향해 내달린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초인적인 힘에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이는 속절없이 그것을 빼앗긴다. 아이 어미는 더 이상 울음이 나오지 않고, 떨리는 손이 영정사진을 땅에 떨어트린다. 플라스틱인지 유리인지 모를 조각들, 바닥에 널브러지고, 아이 어미는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손으로 관을 쓸 듯, 사진을 쓸어낸다. 아까의 맑은 눈물은 온데간데없고, 아이 어미의 손에 보이는 붉은빛.


‘아야, 아이야, 내 것아, 말해봐라. 말해라. 내가 여기 있다. 엄마가 여기 있다. 말을 해다오. 말이라도 해다오.’


천천히 감기는 눈. 멀어져 가는 시선이 흐릿해져 간다.

아이 어미는 그 자리에 아이 사진을 품은 채 누워버렸다.

아이는 여전히 모래를 만지던 표정처럼 밝은 미소를 가졌고, 붉은 피가 여럿 튀어있지만 곱다란 머릿결이 사진 속에서도 찰랑거리는 듯하다.


삶은 언젠가 끝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건 언제일지 무엇일지 누구한테 갈지 어떤 질문을 던져도 알 수 없다.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명확한 것 하나는 끝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끝에서 헤엄칠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측량할 수 없는 고통과 정신의 피폐를 느낀다. 아이 어미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녀에게 잠은 기절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의 슬픔을 설명할 수나 있을까? 빛을 박탈당한 세계에 놓인 그녀는 아무것도 그녀를 이해할 수 없고, 아무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다.


그녀에게 추억과 사랑과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니 어쩌면 다 빼앗긴 것이라고 해둘 수 있다. 그러다 한 가지 물음이 든다.


‘그 많은 사람 중 왜 굳이 내 아이가 죽었어야만 했는가. 내가 죽을 수는 없었나. 왜 그랬어야만 했는 거야. 왜 대체 왜!’


그녀는 남은 이성을 겨우 쥐어짜 내 물음을 던진다. 그러나 그건 해답이 없다. 마치 삶이 언젠가 끝을 보여주는 것처럼 아이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 하나만이 유일한 답이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그녀가 알 수 없다. 설령 그녀가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 아이가 안 죽었을까. 살아 돌아올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런.


그저 사실에 불과하다. ‘해가 떠있다’와 같은 정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실에 불과하다. 아이가 언젠간 죽는다는 사실과 어미가 알 수 없었던 것은 사실에 불과하고, 인간은 거기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럼 우리는 이성이 필요할까. 인간은 여기서 무력감을 갖는다. 아이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실을 부정할 수도 먼 미래의 사실을 바꿀 수 조차 없다. 바다가 눈앞에 있다. 그리고 언젠가 사람은 죽는다. 그래서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래서 무엇을 우리가 할 수 있는가. ‘무엇인가 대비를 해야 하고, 슬픔을 잊을 노력을 해야 한다.’ 그 어미에게 가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니, 해야 하는가? 무엇이건 어떻게 건 그것을 ‘왜’ 해야 하는가. 그럼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염통이 바닥에 구를 정도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왜 살아가야 하는가. 그러한 정도의 고통이 아닐지라도 끝없고 처량하고 공허한 무력이 드는 감정을 안고서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카뮈의 철학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그 아이의 어미에게 답을 구해다 주려면 우리는 이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자살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죽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는가. 이로써 우리는 자살에 도달했다. 그 어미가 죽지 않고 살 이유가 있는가.


 만약 훗날 그녀가 자살을 선택했다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아이를 떠나보내고 그것을 이기지 못한 슬픔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골병이 들었고,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단편적인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가장 복합적으로 변할 수 있다. 골병이 든 그 순간. 아이를 생각하며 더 이상 삶이 의미가 없다는 그 생각 혹은 아이를 보고 싶기에 그 애를 보아야겠다는(세상의 가치보다 그 아이가 더 가치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살은 출발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가치가 있다면 왜 우리는 죽지 않아야 하는가. 그래서 이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번지르르한 말들은 모두 상관이 없다. 겨우 하나뿐이다. 이 문제에 답변을 해야지만 그 아이의 어미는 살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답변을 해야 하는 문제이고, 이 외에 세상이 어떻게 펼쳐졌고, 이성의 존재방식이 어떤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 밖의 철학적인 모든 것들을 펼치려면 우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린 가장 먼저 그 골병이 든 순간을 바라보아야 한다. 처음으로 자살에 관한 생각이 든 순간. 그녀가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그 순간에 우리는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카뮈는 이 순간을 삶과 인간의 절연이라는 생각을 들고 온다. 아무도 그녀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 또한 세상의 그 모든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결국 권태를 느낀다. 거기서부터 생각이 시작된다. 그 생각은 누구에게는 불쾌감일 수도 있고, 그저 분노일 수도 있고, 미치광이에겐 행복일 수 있다. 그것을 카뮈는 부조리로 설명한다. 합리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아까 장례식에서 많은 이들이 나눈 대화처럼 바다가 왜 그 아이를 데려갔는지. 어미가 생각하듯이 왜 그 애가 죽어야 했는지. 인간은 저마다 각자의 합리적인 이야기를 내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그러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했는지에 대한 답변은 전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살 이유도 되지 못한다. 그러면 이유가 너무 많은 건가? 그래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그걸 다 알면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것들이 모두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합쳐서 결론을 지을 수는 없다. 내게는 마음이 존재하고, 마음은 어떨 때 슬픔을 느낀다. 이건 확실하게 참이다. 그리고 마음은 어떨 때 몸을 아프게도 한다. 이것 또한 완벽하게 참이다. 그 마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남들이 보는 마음의 모습, 열정과 사랑, 침묵,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그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완벽하게 하나로 합할 수는 없는 법이다. 흐르는 물을 하나하나 손으로 퍼올릴 수는 있지만, 물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간다.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없다.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불합리가 시작된다. 부조리가 발생한다. 세계를 모두 하나하나 설명할 수는 있다. 인간의 이성은 원래 그런 식으로 작용하니까. 그러나 그것을 하나로 합쳐서 결론을 낼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아까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불쾌함을 느낀다.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다. 더 이상 결론을 지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럼 우리는 돌아가서 또다시 그저 우리가 이방인이고, 우리는 이해할 수 없으니 삶을 포기해버려야 하는 것일까? 유일하게 ‘아 이것은 분명하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설사 조금이라도 해결이 되는가 싶으면 다시 세계는 부조리해 보인다. 이건 영원히 반복될 거 같이 보인다. 이성은 합리적인 것과 친숙한 것을 찾으려 하고 그것에 해당하지 못하는 것들만을 발견하면 드디어 절규를 한다.


카뮈는 이 감정과 권태, 절연, 여러 것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출발은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에게서 그리고 [페스트]의 주 무대가 되는 오랑 시에서 찾을 수 있다.


뫼르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존재이다. 세계는 그저 존재할 뿐이고, 인간의 이성은 친숙함과 합리적인 것을 이해하려 하기에(이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이해를 발견하려 하는 시도가 세계에 대한 이성의 도전) 인간과 그 세계의 사이에서 부조리가 생겨난다는 것을 여실하게 알고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카뮈는 [이방인]에서 첫 소절부터 뫼르소라는 부조리한 인간을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것을 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여자가 사랑을 고백할 때에 결혼을 묻자 그저 그럴 수도 있다고 대답해 버린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카뮈가 말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조리라는 것의 ‘사실’을 알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뫼르소는 사형되기 전 신부가 자신을 찾아와 본인이 이해하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여러 의견을 늘어트리고 질문을 던지지만 뫼르소는 그것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심지어는 신부가 본인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하자 멱살을 잡고 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그것은 뫼르소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즉, 우리가 이야기하는 ‘답변’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뫼르소는 바램을 말한다. 우리 모두가 죽는 것이고,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그래서 나는 죽을 때 증오의 함성으로 많은 이들이 자신을 맞아주었으면 하는 바램. 그러나 답을 구하는 우리들은 여기서 알아야할 것이 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실제로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의미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모든 것을 의미로 만들 수 있다. 마치 세계의 모든 모습을 하나하나 묘사하듯.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시지프에게 주어진 형벌을 말하며 영원하고 끝없는 것을 겪는 시지프가 고통과 형벌을 받는 것이 부조리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조명하는 사실은 시지프의 관한 이야기이다. 시지프는 확실하게 인간임에도 신이 내린 형벌을 버텨낼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초월적인 것이고, 더하여 확실히 인간임에도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할 수 있다. 올림포스 산에 돌을 올려놓을 때까지 고통을 인내할 수 있으며 돌이 다시 굴러떨어짐에도 시지프는 그것을 보고 웃을 수 있다.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에서 시지프가 가지는 무한한 의미이다. 그건 부정이라는 것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 뫼르소 또한 말한다.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그저 사실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에서 시지프와 [페스트]의 주인공 리외는 끊임없이 살아간다. 그리고 뫼르소는 감옥에서도 영원히 살 수 있음을 느낀다.


이건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세계와 타협(화해) 하지 않고 그 세계에서 살 수 있는가. 그저 자살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에 관해서 영원한 긍정을 내비치는 것이다.


그래서 카뮈의 작품 세계는 (우리나라의 번역본에서는 반항, 자유로 나타난다.) 긍정과 부정이 보여진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부조리에서 벗어나서 삶을 추구할 수 조차(인간의 이성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고, 인간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부조리는 끊임없이 삶을 위협한다)없고, 그렇게 부조리를 저버려서도 안된다.(세계가 이해가 된다고 ‘믿어버리는 건’ 그저 도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의미가 없다는 것에 반항하며 그것에 대항하며 본인의 의미, 즉 본인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자유를 만끽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끊임없이 유지하고 수정하고 바라보는 열정으로 삶을 이룩한다. 그것을 카뮈는 나의 반항, 나의 자유, 나의 열정으로 귀결시킨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실들에 침체되어서 죽어버리거나 허황된 믿음 속에 사는 것이 아닌 영원한 승리를 외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많이 세계를 느끼는 것이 부조리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결론이다.


다시 그 아이의 어미에게로 돌아가보자. 처참하게도 짝이 없는 그 감정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자식의 아름다운 모습을 추억할 수 있는 건 오직. 오직 그 엄마.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깊이의 고통으로부터 대항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을 상기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의미라는 것을 증명하고 반항하기 위해서, 본인이 살아있고 아이는 죽어있다는 그 슬픔을 ‘살아있음’으로써 기억하기 위해서 어미는 살아간다. 앞으로 웃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미는 끝없이 살아가면서 그 애가 얼마나 본인에게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증명하고,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또다시 닥쳐올 부조리에 대해 또 한 번 맞서기 위해서 삶을 유지한다. 모든 이유를 하나로 합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마치 땅따먹기를 하는 것처럼 하나의 의미가 사라지면 또 다른 의미를 찾을 것이고, 몇 백개의 의미가 사라지면 몇 천 개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열정의 불꽃을 지필 것이다. 그건 그의 아이를 위한 것이기도,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시 닥쳐올 부조리를 응시해야 하고, 그곳에서 웃음을 짓는 것을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카뮈의 부조리로 비끄러매지는 작품세계는 페스트에서 가히 정점을 찍는다. 그것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다룰 수 있을 거 같은 생각에 미소를 지어본다. (카뮈가 사유한 부조리의 추론과 일상으로의 결론에 대한 것을 설명한 이 이야기는 다만 비유하고 축약해서 만들어진 글에 불과하다. 이것 하나로 카뮈의 부조리를 남김없이 서술할 수는 없다. 다만 더 잘 이해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기에 비판의 여지가 확실히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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