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첫째주
문화부장이 내게 와 물었다.
"너 책 좀 읽냐?"
마치 '너 싸움 좀 잘하냐', '껌 좀 씹냐'는 시비조였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출판사들이 각 언론사에 책 홍보 좀 해달라고 신간을 보내. 근데 너무 많으니까 다 읽을 순 없지. 이런 건 남는 책이니까 너 하나 봐."
그렇게 받은 첫 책.
신경림 작가의 시집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였다.
"신경림.. 조금 올드하긴 한데, 그래도 뭐.."
"감사합니다"
이 말이 끝난 뒤, 내 자리로 돌아가는 그 몇 발자국에서, 어쩌면 매주 새 책을 공짜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신 문화부장이 먼저 선택한 A급 책 말고, 선택받지 못한 책들이겠지만. B급 책들이랄까.
이제 그런 책들을 하나씩 소개해볼까 한다.
제가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기사와 문학의 접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이 시집을 해설한 도종환 전 장관이 바로 그런 얘기를 책에 써두었더라고요.
<한결같은 시인, 한결같은 시>
도종환
시인은 발견하는 사람이다. 늘 보던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이다. 늘 다니던 길에서 안 보이던 것을 발견해내는 이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는 사람이다. 시는 그것들과 만나는 것이다. 미미한 것, 숨어 있던 것, 드러나지 않던 것, 하찮은 것들과 만나는 것이다. 만나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 자체로 의미 있다는걸 알게 하는 것이다.
신경림 시인은 "시 쓰기 역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 다니는 행위"라고 하면서 "남이 알지 못하는 것,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남이 만지지 못하는 것을 알고 보고 만지기 위해 찾아다니는 일, 그것이 바로 시 쓰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끊임없이 들추어내어 의미값을 찾아내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말합니다.
그 연장선에서 기자는 시인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방식 또한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언제까지고 우리는 너희를 멀리 보낼 수가 없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이 이토록 허술했다는 걸
우리가 만들어온 세상이 이렇게 바르지 못했다는 걸
우리가 꿈꾸어온 세상이 이토록 거짓으로 차 있었다는 걸
밤마다 바람이 창문을 찾아와 말하지 않더냐
올해도 사월은 다시 오고
아름다운 너희 눈물로 꽃이 핀다
뜨거운 열망으로 비는 것을 어찌 모르랴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보다 알차게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을 보다 바르게
우리가 꿈꾸어갈 세상을 보다 참되게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아름다운 영혼들아
허술하고, 바르지 못하고 거짓으로 가득차 있었던 세상을 찾아내고, 알차고 바르고 참된 세상을 목적지로 콕 짚어두는 행위는 기사의 목적과 매우 유사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신경림 선생님을 기자로 여기자는 건 아닙니다.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시의성'이라고 답할 수 있겠네요.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갈 방향타를 잡는 업무를 빨리 처리해야만 하는 사람이 기자이겠습니다.
시인은 그보다는 더 많은 사람을 함께 동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둘이 만나면 극적인 시너지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대 있어 우리들 내일이 춥지 않고>
신문은 매일처럼 횡령과 부정의 기사로 넘쳤다.
협박과 공갈과 속임수로 선거와 투표는 허사였고
툭하면 사람들은 잡혀가 갇히고 죽고 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행사한 한표는 도둑맞았지만
나는 그것을 말하기조차 두려웠다. 그러나
그대 있어 이제 그 부끄러움도 추억이 되었다.
세월이 갔다, 육십 그리고 또 몇해의 긴 세월이.
나는 판자가 아닌 그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고
당당히 투표하고 배불리 먹고 자유롭게 말하고 글을 쓴다.
그럼에도 아직 막힌 곳, 춥고 어두운 곳, 잘못된 곳 너무 많아
내 학교가 싫고 이 땅이 밉다가도, 그러나
그대 있어 이제 내 꿈은 무한히 밝다.
그대 있어 우리들 내일이 춥지 않다.
그렇습니다. 이 둘이 재회하는 자리에서 희망이 터져나옵니다.
문학과 저널리즘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바로 희망이어야 합니다.
변질된 저널리즘(예컨대 비상계엄 이후 그 문제의 원인을 시민의 우둔함으로 잘못 짚은 기사[20241216 조선일보 1면 <"우리 사회에 火가 너무 많다">]).
변절된 문학(예컨대 비본질적인 영역으로 화제를 전복시키는 글[19910505 조선일보 3면 김지하 시인 發<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모두 공론장에서 퇴출되어야 합니다.
대신 그 자리를 메워야 할 의제는 희망이겠죠.
책 제목의 뜻은 바로 이 지점에서 튀어나옵니다.
살아있어야 희망을 찾을 수 있고, 희망이 있는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에선 거리낄만한 불순물이 없습니다. 생명-희망-아름다움은 한 세트입니다.
그러니 '오직 살아있어 아름답다'는 신경림의 격언을 우리 시대가 되새겨볼만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하늘을 훨훨 나는 솔개가 아름답고
꾸불텅꾸불텅 땅을 기는 굼벵이가 아름답다
날렵하게 초원을 달리는 사슴이 아름답고
손수레에 매달려 힘겹게 비탈길을 올라가는 늙은이가 아름답다
돋는 해를 향해 활짝 옷을 벗는 나팔꽃이 아름답고
햇빛이 싫어 굴속에 숨죽이는 박쥐가 아름답다
붉은 노을 동무해 지는 해가 아름답다
아직 살아 있어, 오직 살아 있어 아름답다
머지않아 가마득히 사라질 것이어서 더 아름답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한결같이 이어가야 합니다.
그게 신경림의 방식이자, 이 책에서 말하고픈 핵심이기도 합니다.
<한결같은 시인, 한결같은 시>
도종환
(중략)
초기 시부터 유작 시까지 하나의 결을 간직한 시를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생의 마지막까지 좋은 시를 쓴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게 우리가 신경림 시인에게 배워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 끝까지 희망찹시다.
제목 :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저자 : 신경림
출판 : 창비
발행 : 2025.05.16.
랭킹 : 시/에세이 부문 66위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