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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 or review Sep 06. 2024

절망스러운 다정함

2024년 9월 첫째 주


답답할 때 꺼내보는 사진첩 속 울릉도 사진

이제 아침저녁으로 제법 찬 바람이 붑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서늘한 공기를 온몸으로 한껏 느끼며 생각합니다. 이제 '공채 시즌이 다가왔다'는 것을요.


서늘한 바람이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으로 바뀌면 또다시 생각합니다. '수능 시즌이 다가온다'는 것을요.


저는 이렇게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계절을 기억합니다.


봄은 장범준의 노래로,

여름은 제 생일로,

가을은 구직 사이트의 공고들로,

겨울은 수능으로, 한 계절의 시작을 알아차립니다.


이슬아, 남궁인 작가의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라는 책에서 본 문장입니다.


하여간 우리는 늘 뜯어먹고 살 과거가 필요한 것일까요. 그리고 그 찬란한 시간은 우리에게 다시는 오지 않는 것일까요. 저는 빛나는 시간들을 이미 모조리 탕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되돌릴 수 없으니 아무리 찬란했어도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엇이든 아쉽지 않습니까?


이번 여름은 아주 지긋지긋했습니다. 아휴. 너무 더웠고, 정말 더웠고, 심각하게 더웠습니다.

덥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더웠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말마따나 여러모로 아쉬운 계절입니다.

해낸 것과 해내지 못한 것, 계획한 것과 실행한 것 사이의 괴리감 때문이죠.


여름의 끝에서 전하는 안부 인사입니다.


안녕들하신가요.

이번 여름은 괜찮으셨나요?



소리는 상대적인가


넷플릭스에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매회차엔 이런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출처 : 넷플릭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드라마에서도, 철학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장입니다(라고 배웠습니다).


철학자 조지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요. 지각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는(더 나아가 육감적인 방식으로라도 느끼는) 과정'이 없다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영화 <올드보이>엔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은 주인공 오대수가 나옵니다. 오대수에게 '음식(혹은 먹을 것)=군만두' 뿐입니다. 오대수와 같은 사람은 "군만두가 아닌 음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라고 말한다는 거죠.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군만두가 아닌 물만두도, 샛노란 단무지도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나요? 나의 인식과는 무관하게 현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요? 내가 못 느낀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너무 게으른 게 아닐까요?



귀 기울이기


출처 : unsplash

복잡한 철학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현실 세계로 저 문장을 끌어와보면 '가청 범위'라고 표현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귀 기울이고 사느냐라는 문제죠.


20240903 슬로우뉴스發 민노씨 는 <죄와 벌, 그 상처의 가청 범위: 본격 부동산 스릴러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죄와 벌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피해와 상처’에 우리는 무관심하다.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지만(죄가 저질러졌고),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그 피해에 관해 배려해야 했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않는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숲에서는 오늘도 커다란 나무들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쓰러진다.


한 주간 우리 사회에서 소리 없이 쓰러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청범위 밖에 있었던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


출처 :  unsplash

특히 '응급 의료 공백' 문제는 이번 주를 아주 삼켜버렸습니다. 


응급실 11곳에서 퇴짜를 맞고 1시간 만에 병원에 도착했으나 1달째 의식 불명이 된 28개월 아이의 사연. 4m 높이의 공사 현장에서 떨어진 인부가 1시간이 넘도록 응급실을 찾다가 사망한 일. 안약인 줄 알고 순간접착제를 눈에 넣은 남성이 응급실 20곳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이야기까지. 이처럼 백기투항하는 응급실은 점차 늘어났고, 그렇게 늘어나는 하얀 깃발 아래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후두둑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우리는 그 '절망을 보며 절망'했죠.


20240905 시사IN 發 <한 구급대원의 편지 “사람 살리는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다른 구급대원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테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러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사람을 살리고 싶어서 구급대원이 된 저는 마치 ‘무간지옥’에 있는 것만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갈 수 있는 병원은 정해지지 않았는데, 환자는 바이털 사인(vital sign·활력 징후)을 계속 잃어갑니다. 소설가 김훈은 소방대원들에 대해서,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으니 ‘살려서 돌아오라, 그리고 살아서 돌아오라’고 쓴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방대원이 사람을 살려 돌아오는 길이 점점 멀어지고, 또 길어지고 있습니다. (익명의 구급대원)


20240905 조선일보發 <"환자 11명 동시에 돌봐… 응급실서 홀로 외줄타는 심정">

눈을 힘껏 감았다가 떴다. 명단을 노려보며 심정지, 심실세동, 심근경색, 뇌출혈, 빈혈, 복통, 두통, 코로나, 어지럼증 등의 진단명을 중얼거렸다.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환자가 몰려들자 걷고 있는 의료진이 없었다. 모니터에서 열한명의 심박이 제각기 뛰었다. 바이털 사인, 피검사, 소변검사, X-ray, CT 등의 결과가 실시간으로 떴다. 명단을 파악하기도 전에 갑자기 중환자실 구역 간호사가 심정지 환자의 맥이 느려진다고 소리쳤다. 목덜미에서 통증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다 잠시 전광판이 보였다. 낮 두 시였다. 교대해 줄 동료가 올 때까지 아직 여덟 시간 남았다.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20240901 주간동아發 최성락 박사님의 칼럼 <돈이 좋아 자기 피 파는 사람은 없다>에 나온 말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소설 ‘허삼관 매혈기’에서 허삼관은 몇 번이나 자기 피를 팔아 돈을 마련한다. 피를 판 이유는 돈이 좋아서, 돈을 쌓아두기 위해서가 아니다.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대흉년이 들었을 때 가족을 먹여 살릴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첫째 아들이 큰 병에 걸렸는데 그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서, 둘째 아들이 군대에 끌려갔는데 군대 생활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피를 팔았다. 피냐 돈이냐가 아니다. 자기 피냐, 가족의 생명이냐의 문제다. 자기 피보다 돈을 더 좋아해서 피를 팔고, 그렇게 번 돈을 쌓아놓은 채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 

신체가 돈으로 거래될 수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외 다른 방법으로는 돈을 구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게 문제다.


구구절절 맞습니다. 문제는 시스템입니다. 한 개인이 아니라 구조가 문제입니다. 구조에서 본질과 책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선택권을 배제시킨 구조에 집중해야 합니다. '응급실을 거절당한 사실 그 자체'보다 '왜 거절당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더 중요한 겁니다.


박주영 부장판사의 말(하단 참고)*을 빌리자면, 세상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부조리하면서도 또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선의가 동시에 존재하는, 참으로 불가해한 곳'인데, 그러한 세상은 '한 개인의 욕망과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부조리한 시스템의 '선량한 피해자'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응급실에 실려가도 제 때에 적절한 처치를 받지 못했던 분들이죠. 응급실의 문 앞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지극히 평범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응급실 뺑뺑이를 도는 우리의 이웃이 '결코 무언가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나오는 마지막 대사처럼, 내 이웃들에게 '조금 더 다정해지자' 다짐해 봅니다.

혼란스럽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때일수록 서로에게 다정해야 해


* [박주영 부산지법 부장판사의 전세사기 법정 판결문]

<피해자 여러분께 드리는 당부의 말씀>

이 사건의 1심 절차가 모두 끝났습니다. 여러분은 탄원서에서 자신들의 아픔을 토로함과 동시에, 이 재판을 통해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아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한편으로 여러분은 법과 제도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고, 탄원서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회의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의 1심을 맡은 재판장으로서, 동시에 이 고단하고 험난한 세상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한 사람의 기성세대로서, 비통한 심정으로 여러분 각자의 사연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한 사람의 탐욕이, 수많은 사회 구성원의 삶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에 저는, 여러분의 희생이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또 여러분의 탄원대로 이 사건과 같은 피해를 막는 초석을 세운다는 심정으로, 영구보존되는 판결문 안에 여러분의 고통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읽고 기록한들, 국외자인 제가, 여러분이 겪는 슬픔과 아픔, 상실감을 어떻게 다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저는, 여러분을 걱정하는 마음이 크고, 또 인생의 여러 굴곡을 조금 먼저 겪었단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조심스럽게 당부드리고자 합니다.

절대로 여러분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제가 기록과 탄원서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여러분은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지극히 평범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입니다. 한 개인의 욕망과 그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과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이지, 결코 여러분이 무언가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 주십시오.

주제넘은 말일 수도 있지만, 제가 겪은 바로는 인생은 한 없이 짧으면서도 또 길고, 세상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부조리하면서도 또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선의가 동시에 존재하는, 참으로 불가해한 곳입니다. 한 사람의 전 인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기회와 시련의 횟수는 비교적 골고루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록 여러분은 너무 빨리 인생의 난관에 부딪혔지만, 이미 정해져 있어서 언젠가는 만날 수밖에 없는 시련 중 하나를 남들보다 좀 더 일찍 만난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나날이겠지만, 빛과 어둠이 교차하듯 이 암흑 같은 시절도 다 지나갈 것입니다. 이 사건이 남긴 상처가 아무리 크다 해도, 여러분의 마음가짐과 의지에 따라서는, 이 시련이 여러분의 인생을 더욱더 빛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부디, 마음과 몸을 잘 챙기고, 스스로 아끼고 또 아껴서, 하루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굳이 '대체로'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응급의료 붕괴는 허구"라는 대통령실의 주장과 그에 동의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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