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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 or review Sep 13. 2024

연결된 감각

2024년 9월 둘째 주

출처 :  unsplash
“아이고 마늘 다 썩겠네.” 봄에 비가 많이 내리면 혼자 중얼거리던 말입니다. 마늘은 제가 나고 자란 고향의 대표 작물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마늘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장마철이 되기 전 폭우가 쏟아지면 꼭 저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의 근심이 전이돼 당신들의 근심이 되었던 모양이지요. 마늘에 특별한 이해관계나 감정이 없던 저에게도 이상하게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예전에 저도 봄에 비가 많이 오면 ‘감각적으로’ 마늘밭을 걱정했다는 것을요. 그런데 그 감각이 점점 옅어져서, 시나브로 마늘밭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도요.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학습으로 배우고 머리로 외워서 얻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현재 어디에 위치해 있고, 다른 곳(혹은 다른 집단)과 얼마나 멀리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지에 따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튀어나오는 입버릇 같은 게 아닐까요? 어떠한 장면을 보거나 상황을 듣고 고개는 끄덕여지지만 가슴에는 파장이 없다면 사실은 그 대상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없는 거겠죠. 그런 경우에는 아무리 위장하고 연출하려 해도 어디선가 티가 나게 마련입니다.

물론 모두가 모두에게 연결된 감각을 지닐 순 없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단절되어 있는 스스로를 속이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느새 마늘밭에 무감각해진 제가 깨달았듯, ‘단절 감각’이라도 자각해야 그나마 공감의 출발선상에 정직하게 설 수 있을 테니까요.

20240520 시사IN 發 <“덜렁덜렁 전세 계약” 말실수 아니다 [편집국장의 편지]>


이번주 화요일(10일)은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이었습니다. "이번 주엔 이 주제로 쓰자!" 마음먹고 한동안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당위). 무슨 이야기가 필요할까(의미).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가능).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래전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저 편지를 길어 올렸습니다. 변진경 시사IN 편집국장이 "대한민국은 참 '모드 변경'이 빡빡한 사회"라고 제게 말했던 기억과 함께요.



All lives matter


출처 :  unsplash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기안84처럼 태어난 김에 살든, 죽지 못해 살든, 죽고 싶지만 일단 떡볶이부터 먹든, 어찌 됐든 살아가야 합니다. 이 단순한 전제는 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삶이 한없이 작아 보일 때조차도요. 우리는 때론 너무 왜소해 보이는 삶에 질문합니다. '나의 삶이 잘못된 건 아닌지', '도대체 무엇이 좋은 삶인지' 말이죠.

결석하지 않고 학교도 잘 다녔다. 법을 어긴 적도 없었다. 하루에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을 일터에서 성실히 보냈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냈다. 그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만큼이라도 산다고 만족해야 할까.

‘스물일곱 살 인생 평가 좀’ 같은 제목의 글에 사람들이 쏟아 놓는 댓글을 보면 가끔 뭘 잘못한 것 같기도 했다. 더 잘살고 싶었다면 공부를 더 잘했어야 한다고.

솥뚜껑삼겹살도 즉석떡볶이도 먹지 말고 맥주도 마시지 말고 섹스도 하지 말고 닥치고 공부해서 시험에 붙든 돈을 모으든 했어야 한다고. 남들 다 자리를 잡을 때 어리버리하고 게을렀던 우리가 ‘빡대가리’라고.

두 사람은 이런 질문에 도달했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
-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中
넌 이담에 뭐가 될래?

난 이담에 좋은 아빠가 될 거야.

노마의 대답이었다.

좋은 아빠?

응. 울트라 캡숑 아빠.

어떤 아빠가 울트라 캡숑인데?

노마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울트라 캡숑 남편이 울트라 캡숑 아빠지.
-
최진영 <구의 증명> 中

울트라 캡숑 오빠, 울트라 캡숑 후배, 울트라 캡숑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하지만 그 실패가 우리의 삶을 잠식하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됩니다. '사소해 보이는 삶'('사소한 삶' X)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의 저자 패트릭 브링리의 이야기를 한 번 보시죠. 자신의 결혼 예정일에 친형의 장례식을 치러야 했던 그는, 소위 말해 잘 나가는 직장('뉴요커')을 그만둡니다. 그리곤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미술관 경비원에 취직하죠.

오랫동안 나는 뉴욕의 훌륭한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봐왔다. 보이지 않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들이 아니라 구석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서 있는 경비원들 말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되면 어떨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빠져나가 온종일 오로지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속임수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 그렇게 2008년 가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일을 시작했다.

10년 전, 배치된 구역에 처음 섰을 때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 때때로 삶은 단순함과 정적만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도 있다. 빛을 발하는 예술품들 사이에서 방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살피는 경비원의 삶처럼 말이다. 그러나 삶은 군말 없이 살아가면서 고군분투하고, 성장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기도 하다.
-
세상은 이토록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고 충만하며,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

그의 말처럼, 삶은 '형형색색의 화려하고 충만한 세상'과 대비됩니다. 삶이 그저 단순하고 정적만으로 이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밋밋한 순간에도 각자의 색깔과 에너지는 여전히 뿜어져 나옵니다. 이번 주 배우 정해인 씨가 똑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20240910 씨네21發 <과시 없이 본질에 가닿는, <베테랑 2> 정해인>

Q. 정해인이 연기를 해낼 수 있는 재료는 어디에서 오나

A. 배우 각자 갖고 있는 색깔과 에너지가 있다. 원래 내가 갖고 있던 컬러가 캐릭터에 녹아들지 않았을까. 연기는 기술도 필요하지만, 결국 그 사람이 유년 시절부터 어떻게 살아왔는지, 경험과 학습과 인성과 태도가 종합적으로 뭉쳐서 나오게 된다. 때문에 어떤 배우를 보면 저 사람이 무척 잘 살아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두운 역할을 한다고 해서 현장에서 악의를 갖고 연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착하고 선한 사람일수록 악한 연기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의미 있습니다. 설사 그걸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요(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中).


어떤 특별한 사람은 행성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한텐 엄청 분명한 문제예요.



엄근진 주의


출처 : unplash

'그냥~ 으레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지~'하며 투덜거리시는 게 벌써부터 들립니다. '너가 뭘 알아?' 심지어는 씩씩대는 목소리와 삿대질도 느껴집니다.


공감의 역치를 쭉 낮춰 '극도로 연결된 감각'을 너무 많이 발휘하는 걸까요. 그래서 전 때때로 심각한 슬픔을 느낍니다. 제가 기자가 되고자 하는 이유 또한 바로 그 감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끔 '그래서  어떤 글을 쓰고 싶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이 문장들을 인용합니다.


20230624 SBS發 <‘거짓 정보와 싸우는 사람’ - 정은령 SNU 팩트체크센터장>

이 사람 글에는 남다른 치유의 힘이 있다. 아파본 사람이라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그들에게 깊이 공감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서 시작해서 '우리'로 이어지는 글을 쓸 수 있고, 남의 아픔을 달래면서 자신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들으려고 한다면 풀잎이 스치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침묵도 들을 수 있다'는 자세로 위안부 할머니, 세월호 엄마, 순직한 집배원 가족, 노동자 아들 잃은 어머니, 이주 노동자,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
예를 들자면 경북 성주의 할머니 같은 분들이 제 칼럼을 읽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근데 그 칼럼을 읽을 사람들이 이 문제를 같이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같이 불편했으면 좋겠어’ 그런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
지금 기자들은 당사자들과 직접 얘기하는 거, 부딪히는 것 이런 것들이 굉장히 적어지는 게 아닌가. 이렇게 육박전을 해보고, 거절당해 보고, 잘 모르겠고, 혼돈 속에 처해져 있고 그런 것들이 기자를 단련시켜 나가는 과정일 텐데 그런 부분들에서 취재력이 약화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기자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무기가 목격자가 되는 것인데, 어느 곳이든지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역할이 대단히 약화되고 있지 않나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직접 목격한 장면을 재현하여 일부러 또다른 불편을 발생시키는 일. 사람들을 연결된 감각으로 줄줄이 엮어내는 일. 이렇게 밑바닥을 찍고 길어 올린 제 '공감 역치'는 타인과 연결되는 비밀 통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밑바닥 터치가 어떤 의미에선 큰 자랑이 되기도 하죠(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中).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실제로' 연결된 감각


 

출처 : unplash

앞선 말들이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아 실사례들을 가져왔습니다. <사는 게 정답이 있으려나?: 슬럼프 극복 편>에 나오는 유희열 씨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예전에 군대 제대하고 첫 번째 방송이 라디오였는데 거기에서 좀 중책을 맡았거든요. 신동엽 씨가 진행하는 라디오였는데, 제가 했던 역할은 청취자가 전화 연결을 해서 노래를 부르면 피아노로 반주를 하는 거였어요. 매주 제 건반을 들고 가서 세팅하고 신청한 청취자들 예선도 보고 피아노 반주를 했어요. 그걸로 처음 사람들이 저를 좀 인식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에 어떻게 나갔느냐 하면, 제가 해군이었는데 신동엽 씨가 방송 때문에 해군 함정에 타신 거예요. 그분이 선배였으니까 그때 인사를 했더니 연락처를 주면서 나중에 제대하면 꼭 연락하래요.

그래서 전역 후 정말 연락을 드리고 그렇게 활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지금 신인 가수 친구들도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어디에서 실타래가 풀릴지 모르고, 본인은 그 기회가 오는 걸 그때는 알 수 없죠.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이게 바로 '연결된 감각의 실제적 발현' 아닐까요. 이렇게 우리가 하나둘씩 연결되기 시작하면 행복해집니다. 실제로 일평생 행복을 연구한 서은국 교수님의 과학적 결론입니다.


20240603 폴인發 <"인생의 마이너스 통장 없애면 행복해질까?" 서은국 교수의 조언>

행복을 느끼는 방법은 싱거울 정도로 단순해요. 행복의 본질인 '쾌감'을 늘리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행복감을 올리려면 즐거움(쾌·pleasure)을 느끼는 경험을 자주 반복하면 돼요. 아주 간단하죠.
인간에게 가장 재미난 자극은 뭘까요? 사람이에요. 다시 말해 타인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이에요. 사람을 만날 때 행복도가 크게 오르는 건, '귀한 자원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신호인 거죠.


그러니 귀한 자원인 여러분, 같이 연결된 채 살아갑시다. 힘들면 도와주고, 내가 힘들면 도움받고. 그렇게 연결된 채 상부상조합시다.


만약 인생의 결승선에서 삶을 인위적으로 종결지으시려거든, 다시 출발선으로 뚜벅뚜벅 되돌아가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출발선에서 당장의 것들부터 차근차근 시도해보시길(임경선 <자유로울 것> 中) 권합니다. 같이 행복하고, 생존합시다.

버거운 한숨만 나온다면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에서 어린 소년 파이가 호랑이와 단둘이 표류되어 생사의 기로에 놓였을 때 되새기던 구절을 함께 기억해 보기로 한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아, 물론 정반대로 '단절된 감각'의 실사례도 있습니다. 오늘의 글을 꼭 봐야 하는 한 명을 굳이 꼽아야 한다면, 바로 '그분'이 아닐까요.


20240909 주간경향發 <‘지지율 20%대’ 대통령이 만든 정치 실종 시대…결국은 ‘각자도생’>

한국사회가 대통령제에 관해 '참교육'을 당하고 있다.

여론, 지지율 변화에 무감한 대통령에게는 특별한 견제 장치가 없다는 것이 이번 교육의 핵심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지지율이 급락하면 국정운영을 쇄신하는 척이라도 했다.
..
윤 대통령은 달랐다.
..
1987년 이후 집권한 대통령은 어떤 상황에서도 빠짐없이 국회 개원 연설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상태에서도 국회를 찾았다.
..
유독 윤 대통령만 특별하다.

 


자살 관련 현실태 하나만 짧게 짚겠습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세계 1위라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2022년 기준, 1년에 12,906명. 하루 약 35명, 41분에 한 명꼴로 사망합니다.

다소 거칠게 얘기하자면, 축구 1경기할 때마다 2명이 우리 곁을 떠나는 겁니다.


정부는 극도로 높은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매 5년마다 자살 예방 기본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2023년~2027년에 해당하는 제5차 자살예방기본계획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현 26명 수준에서 2027년 18.2명으로 30%가량 낮추겠다"는 게 목표입니다.


그러자 한 기자가 조규홍 복지부장관에게 '4년 만에 자살사망자 수 30% 감소시키는 게 현실성이 있다고 보는지' 물었습니다. 속된 말로 '...겠냐?'라는 질문에 조 장관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자살률 감소 목표 달성이 쉽지만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자살률이 30% 감소한다 하더라도 OECD 국가 중 여전히 자살률이 높은 수준입니다. 그래서 자살률 감소를 위한 정책적 지원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제5차 자살예방기본계획 목표치(적색 실선)

제가 직접 통계청 자살률 그래프에 정부의 목표를 덧대봤습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장관의 계획대로라면 빨간색 선의 기울기만큼 자살률이 급격히 떨어져야 합니다.


2013년 28.5명에서 2017년 24.3명까지 기울기(평균 변화율)는 -1.05.

2022년 25.2명에서 2027년 18.2명까지 기울기는 -1.4.

즉, 자살률이 최근 15년 중 가장 가파르게 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보시다시피, 산술적으론 쉽지 않겠네요.


하지만 부디 기적이 일어나길. '연결된 감각'으로 '급추락'을 같이 응원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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