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넷째 주
펜이라는 말은 깃털을 뜻하는 라틴어 펜나 penna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 펜은 누군가의 몸이었습니다. 펜이란 말이 깃털에서 왔다면, 우리의 펜은 날개에서 온 것입니다. 날개의 일부, 바람과 맞닿은 살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글을 쓰는 동안엔 날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하늘을 날 듯 문장을 쓸 수 있을까요.
너, 왜 철학을 하려고 하느냐고 나에게 물은 적 있지. 내 생각을 정말 듣고 싶니?
고대 희랍인들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 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까 바로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한 무리의 군인들을 피해 나는 달아났다. 숨이 턱에 받쳐 뜀박질이 느려졌다. 그들 중 하나가 내 등을 밀어 넘어뜨렸다. 몸을 돌려 올려다보는 순간 군인이 총검으로 내 가슴을, 정확히 명치 가운데를 찔렀다. 새벽 두 시였다. 벌떡 일어나 앉아 손으로 명치를 짚었다. 오분 가까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덜덜 턱이 떨렸다. 울고 있었던 줄도 몰랐는데, 얼굴을 문지르자 손바닥이 흠뻑 젖었다. 며칠 뒤에는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1980년부터 지금까지 삼십삼 년 동안 지하 밀실에 가둬둔 5.18 연행자들 수십 명이 있다고 했다. 이제 비밀리에, 내일 오후 세시에 모두 처형할 거라고 했다. 꿈속의 시간은 저녁 여덟 시였다. 내일 오후 세시까지 고작 열아홉 시간이 남았다. 어떻게 그걸 막을까. 말해준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휴대폰을 쥐고 어쩔 줄 모르며 길 가운데 서 있었다. 어디에 전화를 걸어 알려야 할까. 누구에게 알리면 그걸 막을 수 있을까. 이걸 왜 하필 나에게, 아무런 힘도 없는 나에게 알려줬을까. 빨리 택시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자고 해야 할까. 어디로 가서 어떻게... 입속이 타들어가던 한 순간 눈을 떴다. 꿈이었어.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펴면서, 어둠 속에서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꿈이었어, 꿈이었어.
"... 우선 독자들에게 사과해야겠습니다. 사과문 쓰겠습니다. 예정대로 신문 발행 못했으니까."
"그거를 굳이 올릴 필요가 있나? 그거를 외부인한테 뭘 얘기해? 굳이 왜? 낼 필요가 없는 건데. 우리 사정을 일일이.."
"아니요. 사과문 쓰겠습니다."
"... 그러면은 이게 예기치 못한 사유로.. "
"아 멘트도 정해주시네요? '예기치 못한'으로 하라고..."
"A 기자님, 제가 정말 잘못한건가요? 학교쪽 얘기도 들어보셨으니까, 객관적으로 제가 잘못한 걸 말씀해주세요."
"학교가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에 저도 정말 분노했어요. 잘못한 거 없어요. 그냥. 뭐랄까.. 굉장히 'extra ordinary'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저기 앉아."
"자리가 정해져 있나요?"
"원래 다들 거기 앉았어."
"...학교에서 높으신 분들 다 오셨네요."
"...녹음 할게요."
"싫습니다."
"원래 녹음 동의한다는 싸인 다 해"
"싫다고요."
"그럼 진술 거부하는 걸로 알겠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학에서 이런 조사 할 땐 다 동의 받아. 우기지 마. 나중에 소송가면 이런 게 다 공식 증거로 쓰이는 거야."
"우기는 게 아니라, 제 의견을 말씀드린 겁니다."
"xx대 대표 변호사 xxx니다. 저 알죠? 통비법상 당사자 녹음은 불법 아닙니다. 녹음 할게요."
"..."
(중략)
"먼저 사과하고, 고개 숙이고 그러면 해결되잖아."
"제가 먼저 사과하라고요?"
"교수님도, 총장님도 다 힘드셨을 거 아니야. 이렇게 공문 작성하는 우리도 힘들고."
"법대 학장님. 지금 그게 2차 가해입니다."
그들과의 만남은 대체로 즐거웠고, 심각한 이야기는 거의 오가지 않았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꼭 한 번, 대학 시절의 은사를 찾아뵈었을 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종교가 필요할 때가 없으세요?
글쎄, 종교적인 것과 종교는 다른 것이지. 그런데 왜, 요즘 관심이 있어?
그냥…… 인간적인 한계를 느껴서요.
지나가듯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싸워서 이겨야지, 그래야 그림이 되지.
그날 지하철역까지 선생님이 나를 배웅 나온 것이 본래 다정한 성품 때문이었는지, 부끄럽게도 나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저 좀 조용히 살고 싶어요... 직원들이나 교수님들이 쳐다보는 눈. 너무 무서워요."
"너가 뭘 잘못했는데? 잘못한 거 없잖아! 좀 떳떳해져!"
"안 돼요. 그게.. 정문, 중문으로 못 다니겠어요. 일부러 더키친 앞으로 돌아가요. 아무한테도 안 보이게.
악이 만연해요. 그 분이 말했듯이. 전 대학이 꿈을 이뤄주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적어도 도와주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학은 꿈을 철저히 짓밟는 곳이에요. 아.. 과장(옆에 있던)님.. 울지마요."
누구나 미래를 빌릴 수는 없지만, 과거를 갚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애정 어린 관심과 호기심, 그걸 담아낼 곧고 너른 말이다. 살아온 대로 말하기 때문에 품격 있는 말이 존중받는다. 반대로, 말하는 대로 살아지기 마련이니 증오의 언어를 지워나가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 굽이진 말을 뾰족하게 받아치면 악순환이 이어질 뿐이다. 힘들고 괴롭고 피곤할지라도 모두 감싸 안을 수 있는 '곧고 너른 말'을 입에 담으려 애써야 한다. 우리에겐 사랑의 말이 더 필요하다. 아무리 부당하게 공격당하고 미움받아도 "서로 사랑하는 것만은 도저히 그만둘 수 없(<플라네테스> 중에서)"으니까.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펴 봐! 그리고 움직이는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손가락은 신기하게도 움직여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