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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 or review Oct 18. 2024

검게 그을린 달력 앞에서

2024년 10월 셋째 주

저는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할지 통 감이 오지 않을 때는 '가상의 독자'를 불러보곤 합니다. 기자 일을 하면서 터득한 요령입니다. "너 그거 봤어? A팀이랑 B팀이랑 붙었는데 7회에서 이런 일이 생겼지 뭐야" 제 기사를 볼 독자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고 싶은 일을 앞세워 보니 기사 쓰기가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일간지, 방송 기사보다 한 걸음 더 들어간 깊이 있는 뉴스를 원하는, 그런 뉴스에는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독자를 상상하며 이번 호를 만들었습니다.

(20241014 주간 경향發 홍진수 편집장 <가상의 독자에게 말을  붙여보니> 中)


제 글은 깁니다. 알고 있습니다. 대다수 독자는 제 글의 길이만큼 넓은 아량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길이를 줄일까 고민해 봤지만 곧 단념했습니다. 홍진수 편집장 말마따나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시는 소중한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어떤 글을 써야 할까 통 감이 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충혈된 눈을 붙들고 오늘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살아간다'는 깊은 진실


출처:unsplash

지난주, 한강 작가의 <매일경제> 인터뷰(20241010 매일경제發 <[한강 단독 인터뷰] 심장 속, 불꽃이 타는 곳 그게 내 소설이다>)는 주목해 볼 만합니다(관련 내용은 큰 파도가 지나간 뒤 잠잠해지면 얘기해 보겠습니다).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기자회견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치열하고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느냐'는 이야기만 전해졌는데요(20241011 한국일보發 <기자회견 결국 안 하는 한강..."전쟁서 날마다 사람 죽는데 무슨 잔치에 회견이냐">). 하지만 노벨상 수상 직전 때마침 진행 중이던 <매일경제> 인터뷰가 단독으로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그 내용 중 일부입니다.


Q. 소설을 쓰고 읽는 행위의 힘, 다시 말해 세상에서 소설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거칠고 딱딱하기만 한 세상에서 소설은 어떤 힘을 가질까요.

A. 우리는 일상 속에서 정말 깊은 진실을 보거나 보여주기 쉽지 않잖아요. 친구와 밥을 먹다가 ‘나는 요즘 산다는 게 뭔지 생각하고 있어’라고 고백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꺼내기 쉽지 않지만 표면 아래에서 우리를 흔드는 중요한 감정들, 깊은 의문들, 감각들을 문학이 다루면, 그걸 읽는 사람들은 문득 자신 안에 있던 그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소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를 연결하는 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강 작가 표현에 따르면, '산다는 게 뭔지 생각'하는 건 '정말 깊은 진실'입니다.

산다(live)는 게 뭘까요.


(자, 생각할 시간입니다. 5, 4, 3, 2, 1. 땡!)


전 오래전부터 때때로 이 생각을 했습니다. 성탄절인 12월 25일(수)까지 '붉게 타오르는 쉬는 날' 없이 '검게 그을린 달력'을 보면서 '나의 삶'을 생각했습니다.


 조졌다.



압도적으로 단순한 삶


출처:unsplash

벌써부터 2024년과 이별할 결심을 합니다. 한 살 더 먹을 각오입니다. '무슨 유난이냐' 싶으시겠지만요.


존 윌리엄스의 책 <스토너>엔 그렇게나 '깊은 진실'에 대응하는 해답이 나옵니다.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대처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단순함. 살아가는 건, 그래서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간다는 건, 누군가에겐 비정할 만큼 단순합니다. 그러다가 쉽게 늙어가죠.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에 나오는 이야기처럼요.

서른을 사실 기꺼이 맞았다.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20대가 너무 힘들어서 서른은 좋았다. 마흔은, 마흔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삶이 지나치게 고정되었다는 느낌,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게 조작된 주사위를 매일 던지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게 있다. (중략) 젊은 사람들은 착각을 해요. 노인들이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 별 거 없어요. 나는 그냥 쉽게 늙었어요. 그냥...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혹시 지금도 의미 없이 주사위를 굴리고 있나요. 어떻게든, 한껏, 멀리, 돌을 던지고 있나요. 앞으로 성탄절까지 던져야 할 주사위와 돌들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의미 없는 빠른 삶


출처:unsplash

하지만 삶의 의미 없음이 '느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의미 없는 빠름'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을 뿐입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흉흉하게 돌던 2016년에 출간된 조한혜정과 엄기호의 책 <노오력의 배신>에 의미심장한 말들이 수두룩한데요. 그중 일부입니다.


OECD 가입국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길고 수면 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답이 없는 나라, 자살률이 가장 높고 출산율은 가장 낮은 나라에서, 나라를 떠나거나 아니면 남아서 벌레가 되는 선택만 있다고 느끼는 청년들이 이제 말하기 시작했다.

줄줄이 늘어선 초록색 빈 병으로 어지럽혀진 대학가의 술집 취객에게, 외로움을 둘 공간조차 없이 비좁은 고시원의 세입자에게, 자정의 어둠을 몇 달째 지켜온 무표정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이 나라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라.

그들은 서슴없이 멸망을 입에 담을 것이다. 감히 멸망을 말하지만 악의조차 감지되지 않는 평온한 목소리에 당신들은 경악해야 한다. 청년들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으며, 불공평한 생존보다는 공평한 파멸을 바라기 시작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역시나 대한민국 현실(20240119 중앙일보發 <[안태환의 의학 오디세이] 아다지오의 미학>)은 그대로입니다. 


한국 사회를 이끄는 힘은 오로지 속도라는 인식의 오류였다. ‘빠름’은 절대적 미덕이며 삶의 모든 면에서 ‘빨리빨리’ 움직이는 것이 능력과 동일시됨은 당연했다. 돌아보면 빨라서 잘된 일보다 실수한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좀 더 느리게 일해도 뒤처진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속도가 다르다고 비난받지 않는 사회가 돼야 한다. 속도전을 동반하면, 불행한 결과를 수반한다. 느리더라도 제대로 하면 된다고 말해 주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유기적 결합은 요원하다. 헐떡이는 숨을 잠시 고르고 주변을 돌아보며 삶의 속도를 늦춰야 다른 가치들이 보인다. 그럴 때 느리지만 제대로 된 기본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느림은 빠름의 반대편에 있거나 빠름에 적응할 수 없는 무능력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악한 삶'을 느리게 희석합니다


출처:unsplash

이동진 평론가는 이런 문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바쁜 건 악에 가깝다


학생들을 상대로 이상한 실험을 하나 했어요. A라는 건물에서 출발해서 B라는 건물에서 발표를 시키는 거예요. 심리학 실험들이 항상 그렇듯이 발표가 목적이 아니죠.

두 개의 건물 사이에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이 하나 있는데, 연기자를 섭외해서 그 길을 가는 도중에 발작이 일어나는 연기를 시켜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그 길을 지나는 학생이 어떤 행동을 할까 궁금했던 거죠. 어떤 학생은 신고하고, 911에 전화하고. 어떤 학생은 발을 동동 구르고, 어떤 학생은 본 척 만 척 지나가기도 하고요.

그래서 처음엔 이게 아마 신앙심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봤는데, 실은 그게 하나도 안 중요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발표가 2시예요. 근데 어떤 사람은 20분 전에 출발시키고, 어떤 사람은 1분 전에 출발시켜요. 1분 전에 출발한 사람들은 본 척 만척하고 지나간다는 거예요. 우리 모두 다 조금씩 선하고 조금씩 악하잖아요. 그렇다면 언제 사람이 좀 강퍅해지고 약해질까?

저는 그게 바쁠 때 같거든요. 그래서 바쁜 것은 악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렇다면 '바쁘다 바빠 한국 사회'는 악에 가깝지 않나요. 대한민국만큼 우악스러운 삶을 전 세계 또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요.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김송희 편집장(20241001 빅이슈發  <나는 앞으로 몇 번의...>)처럼, 전혜원 기자(20241012 시사IN發 <전혜원 기자의 편지>)처럼 생각해 보는 일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현재에 발붙이고 있으니까 주변을 돌아보면 '더는 못 본다, 못 한다' 상상하면 아쉬운 것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볼 수 있을 때 보름달을 맘껏 눈에 담고, 가을 냄새와 으슬한 바람을 맞이하고,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꽉 잡아주는 일.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인지도 모르겠네요(김송희).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지만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들, ‘여론’을 형성하기 어렵고 오직 ‘사건’으로만 드러나는 존재들,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에 아직은 가닿지 못한 누군가를 위해 떠들어야 할 사명을 느낍니다. 우리가 서로의 안부를 더 잘 물을 수 있도록, 더 부지런해지겠습니다(전혜원).


오늘 하루를 온전히 소화시키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쉬는 날 없이 달려야 하는 달력을 바라보며 모든 것들을 천천히 바라봅니다. 되직한 삶을 희석시켜 농도를 낮춰봅니다. 허지원 교수님의 글(20240202 중앙일보發 <[허지원의 마음상담소] 그 일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을 읽고 오늘 밤을 서랍 속에 집어넣습니다. 

개인적으로 즐겨 드는 비유는 ‘망해버린 된장찌개’입니다. 공들여 만들던 된장찌개가 그만 끔찍하게 망해버리는 날도 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서서, ‘왜 망했지?’, ‘아, 왜 망했지?’, ‘왜 망한 거지?’를 오십 년을 고민해도 된장찌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된장찌개는 개수대에 버리고, 이제부터는 얼른 김치찌개를 끓이면 됩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된장찌개가 아니어도 됩니다. 내 인생에서 아주 그렇게 중요한 찌개가 아닙니다. 그게 나의 인생을 책임지는 지혜로운 방법이고 내가 지향하는 가치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사실, 어떤 일은 아무 의미 없이 일어납니다. 우연한 상황으로, 혹은 상대방의 사정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백번 양보해 내 탓이 있었대도, 그 일로 제일 괴로운 건 지금 나 자신입니다. 내게 슬픔과 분노가 오고 있으니 나를 먼저 위로해 주세요.

나의 감정들이 알려주는 지혜를 찾아내세요.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아꼈구나. 내가 그 시간을 사랑했구나. 앞으로의 내 삶의 방향이 비로소 또렷해집니다. 나를 멈추게 하고 나를 찌르는 서사를 매 순간 그렇게 적어 내려가지 말아요. 없는 의미를 만들려 하지 말아요. 아주 뭐 그렇게 대단히 행복해지려 말고, 그냥 반추하던 에너지의 반만 들여서 김치찌개나 끓여 먹고, 집도 좀 치우고, 다시 맛있는 커피도 한 잔 했으면 좋겠습니다.

잘 들여다보면 실은 지금의 생도 이미 상당히 웃기고 더없이 쓸 만합니다.

그러니까, 그 일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내일 출근길을 힘차게 준비해야겠습니다.



이번 주에 길어 올린 사족은 영화 <최악의 하루>에서 은희(한예리)가 느지막이 내뱉는 독백입니다. 이 장면을 오랫동안 곱씹었습니다.


긴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어요?
 
당신이 제게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당신이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사실, 전 다 솔직했는걸요.
 
커피 좋아해요?
전 커피 좋아해요.
진하게,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아, 이 영화의 끝맺음을 걱정하지는 마세요. 이런 대사로 끝나니까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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