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첫째 주
이번주는 역력한 슬픔에 사로잡혔습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 대사처럼, 어느새 슬픔에 물들어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습니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추워지는 날씨 속에 '이 땅에 발붙인 채, 슬픔에 잠긴 또 다른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오늘도 여전히 아픈 사람들 말입니다. 아무리 아파도, 어느 누구도 아프다는 말을 들어주지 않는 바로 그 사람들 말입니다.
오래전, 김승섭 교수님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몸에 아로새겨진 고통을 읽어내는 법'을 책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 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
사회적 폭력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 상처를 이해하는 일은 아프면서 동시에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지도 못하는, 그 상처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몸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혐오의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비를 멈추게 할 길이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기득권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면서 또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작게라도 배운 게 있다면,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피하지 않고 함께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그 슬픔을 현실에 적용하여 상처들을 찬찬히 읽어내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움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함께 비 맞는 심정으로 이번주 이태원 참사 판결을 읽어내고 있습니다.
20240715 경향신문發 <박희영 용산구청장 징역 7년 구형···검찰 “이태원 참사에 가장 큰 책임”>
20240930 경향신문發 <법원, ‘이태원 참사 책임’ 용산경찰서장 금고 3년, 용산구청장 무죄 1심 선고>
분명 가장 큰 책임을 물었지만, 원점이 된 현실이 너무 공허해져서 슬펐습니다.
법이 구제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이렇게 무참하게 드러나고, 더 무참하게 잊히고 있다는 사실이 슬펐습니다.
그래서 7년이 지난 손석희 앵커의 한탄(20161110 JTBC發 <[앵커브리핑] "온통 환자투성이" 시인이 남긴 말은 지금…>)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자신의 작품을 모아 시집을 내려했던 청년 윤동주는 친필로 써온 원고들을 꼼꼼히 제본한 뒤 연필로 표지에 두 글자를 써 넣었습니다.
병원.
"지금의 세상은 온통 환자 투성이.. 병원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에 혹시 이 시집이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상상을 뛰어넘고, 상식을 무력화시키는 의혹들이 넘쳐나 교양과 인내의 영역을 이미 벗어나 버린 지금…마음을 다친 사람들은 아마도 이 시구에 공감할 것 같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길 바라던 그 시인이 지금 우리 곁에 있었다면, 아마도 마냥 부끄러웠을 것만 같은 자괴감의 시대.
그렇습니다. 그가 당초 '병원'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던 시집은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인의 절절함에 비해 발행된 시집의 제목은 오히려 낭만적이어서 당혹스러운 오늘. 원 표지에 그가 썼다가 지운 '병원'이라는 글씨는 역력해서 또한 오히려 공감이 가는 오늘.
마냥 부끄럽습니다. 정혜윤 작가가 <아무튼, 메모>에서 말하는 '온기'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멸망의 아침처럼 어두워 보입니다.
우리 안의 어두움이 다 나온다면 세상은 인류 멸망의 아침처럼 어두워질 것이다. 이 씁쓸함은 여행으로도 쇼핑으로도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둠 속에서 함께할 것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쓰다듬을 머리카락 같은 것, 파고들 품 같은 것, 나눌 체온 같은 것, 이를테면 온기 같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 윤동주가 가졌던 원래 마음처럼 "오늘의 한-탄이 '온기가 되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쓴 룰루 밀러는 "이름을 가진 우리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일단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걸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 개념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 주는 존재이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 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제야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을 찾아냈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리고 아라이 유키의 책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에 나오는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도 중요해서 '요약해선 안 됩'니다.
누구의 인생도 요약되게 하지 않을 거야. 당신의 인생도, 나의 인생도.
159명의 인생을 '참사 희생자'라는 한마디로 요약하지 않기 위해 떠나간 이름과, 그 이름에 파묻힌 인생들을 하나씩 되새깁니다.
20231026 KBS發<다큐인사이트 [이태원 참사 1주기] 159명의 희생자와 생존자들의 ‘그날의 기억’ >
故
김세리, 김단이, 강가희, 이해린, 김유나, 오지민, 오지연, 박지애, 김지현, 김현수, 안다혜, 이민아, 김수진, 이지현, 조명화, 최재혁, 게네고 리마무, 마캐우 나티차, 도미카와 메이, 스티네 에벤슨, 스티븐 블레시, 이지한, 최유진, 조한나, 김송, 박지혜, 박현진, 김슬기, 채현인, 박초희, 서수빈, 양희준, 김연희, 정아량, 김용건, 한규창, 박가영, 이수연, 서형주, 이승연, 최민석, 조경철, 박소영, 노류영, 이승헌, 박현도, 차현욱, 임종원, 최혜리, 신애진, 이현서, 최보람, 이정환, 심규용, 이은재, 이동민, 김미정, 김도은, 최다빈, 박시연, 서예솔, 진세은, 안지호, 정주희, 김원준, 이경훈, 김정훈, 오근영, 유채화, 장승민, 이진우, 김산하, 이한솔, 김인홍, 송영주, 추인영, 송은지, 장한나, 김보미, 김주한, 김의현, 홍의성, 최보성, 이재현, 이남훈, 조예진
(상기 다큐멘터리 中)
함께 비를 맞고, 온기를 나누고, 요약되지 않도록, 오랫동안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번 주 가장 중요한 기사는 '10.29 이태원참사 1심 판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