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넷째 주
제가 20살이 되고 나서 든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음! 이제 성인이구만!" 돈도 빽도 없이 그저 '성인됨'에 만족했죠.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20살 0시 0분 7초, 8초, 9초...
"난 성인이데.. 1분 전과 뭐가 바뀐 거지..?"
시계는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죠.
20살 0시 0분 45초, 46초, 47초...
남들은 클럽에 입장해서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을 때, 전 집에서 이렇게 혼자 자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죠.
"젠장! 이럴 거면 차라리 클럽에라도 가는 게 나았겠어.."
이번주 월요일은 <성년의 날>이었습니다. (이 글을 보는 20살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장미꽃 받으셨나요? 혹은 장미꽃을 주신 분이 계신가요?
물론 이번주 월요일은 성년의 날보다 더 시끄러운 이슈들로 뉴스가 넘쳐나던 시기였습니다.
김호중 씨 음주운전 자백 소식이나, 이란 라이시 대통령의 헬기 사망 사고 등이 한창 부각되던 날이었죠. (이런 얘기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지만, 기회가 되면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전 성년의 날에 주목했습니다. 아마 당신이 20살이 아니라면, 주목하지 않을 만한 이슈죠.
성년의 날의 핵심 키워드는 [책임]입니다. <성년의 날> 뜻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회인으로서의 책무를 일깨워주며, 성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부여하기 위하여 지정된 기념일.
성년의 날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론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고, 둘째론 '자부심'을 얻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도대체 무슨 책임을 지라는 거죠? 무슨 자부심을 가지라는 걸까요?
그 이유는 <어른의 날>도, <성인의 날>도 아닌 <성년의 날>이라고 이름 붙인 의미에서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성인'의 뜻입니다.
자라서 어른이 된 사람. 보통 만 19세 이상의 남녀
그럼 도대체 어른은 무슨 뜻일까요?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합니다. 그 [어른]을 [성인]이라고도 하며, 보통은 '19세 이상의 남녀'를 뜻한다는 거죠.
그런데 [성년]은 뜻이 좀 다릅니다.
사람이 독립하여 법률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는 연령
차이점을 단박에 느끼셨겠지만, [성년]은 의미가 굉장히 '제한적'입니다. 순전히 나이라는 의미만을 함축하고 있죠. 즉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와 무관합니다. 순전히 나이가 들면 성년이 되는 겁니다. 그저 사람이 독립하여 (자의적) 법률행위를 할 수 있다고,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나이가 되면 [성년]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엔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성년의 날엔 주로 성년례(관례와 계례)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성년례는 주로 상투를 틀고 갓을 쓰거나, 땋았던 머리를 풀고 쪽을 찌는 의식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리곤.. 술을 마시며 '절제'를 익혔다고도 합니다. (그러니 오늘날 20살이 클럽에서 12시 땡! 치자마자 술을 마시는 건.. 전통적인.. 읍읍..)
어쨌든 전통적으로 이 의식을 거쳐야지만 '책임을 질 수 있는 어른이다!'라고 인정해 줬던 겁니다. 그러니 아직은 '성인의 날' 혹은 '어른의 날'이라고 이름 짓긴 껄끄러웠던 것이겠죠.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아이와 어른의 차이점이 '책임'이라는 겁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가 꽤 있습니다. 단순히 '지각'하거나 '업무 기한을 지키지 않'기도 하고, '업무를 회피'하기도 하죠. 그럴 때마다 속으론 '책임지지 않는 참 나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요. 이제는 '어른답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바꿔먹었습니다. 그런데 어째.. 이게 더 기분 나쁜 말인 것 같기도 하네요.
역설적으로 구몬학습 로고송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는 가사는 어쩌면 아이에게 '어른이 돼라'는 말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제가 눈을 의심했던 건 정치권의 입이었습니다. 기사의 제목만 보고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읽고 나서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20240520 (뉴시스發 <황우여, 성년의 날 맞아 "교육·연금·노동 3대 개혁 완수 최선">)
'성년의 날'과 '3대 개혁'이 어떻게 연관되는 거지? 한참을 생각해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길래, 원문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국민의힘> 당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황우여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발언 전문을 찾아 읽었습니다. (편의를 위해 각 문단 앞에 번호를 매겼습니다.)
<황우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1) 아름다운 5월 계절의 여왕이라고 전 세계가 찬탄하는 5월의 중순을 넘어가고 있는 셋째 월요일이 바로 푸르고 푸른 우리 성년의 날, 청년들이 성년이 되는 것을 국가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이제는 청소년에서 사회에 떳떳한 구성원이요, 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 당당히 모든 권리와 의무를 담당하는 성년이 되신 모든 청년들에게 마음 깊이 축하와 또 큰 기대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전한다.
2) 지금 우리가 성년이 몇 살이냐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19세를 성년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청년들을 위하여 기성세대가 무엇을 준비해야 될까, 우리 윤석열 정부 그리고 우리 여당에서는 3대 개혁을 내세우고 있다.
3) 교육개혁 말할 것도 없는 우리 청소년들이 성년에 이르고 또 성년 이후에도 취업과 인생을 펼쳐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교육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그야말로 근간을 이루는 이 교육 제도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개혁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하다.
4) 연금개혁 말할 것도 없이 2055년이면 고갈될 위험에 처해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 기성세대가 보다 많이 부담하고 젊은 세대는 어깨를 가볍게 해 드리는 연금개혁을 우리가 마쳐야 하겠다.
5) 노동개혁 또한 이 취업 전선에서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 청소년이 성년이 되었을 때 갖는 관심의 핵심이기 때문에 노동개혁까지도 말끔히 마쳐서 이 3대 개혁을 우리가 성년이 되는 우리 젊은 분들에게 선사하고 싶다. 모든 국민들과 함께 우리 당은 정부의 3대 개혁이 완수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2 문단에 들어서 갑자기 '우리 사회 성년의 기준'을 19세라고 정의하기 시작하더니, 청년들을 위한 기성세대의 대응을 고민합니다. 그리곤 정부 여당의 3대 개혁 과제를 억지로 끼워 맞추죠. 3, 4, 5 문단에서는 <성년의 날>의 핵심인 '성년 스스로의 책임', '성년이라는 자부심'과 연관 짓기 어려운 말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냅니다.
혼잣말을 되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맞아?"
성년의 날을 핑계로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건 지양했으면 좋겠습니다.
대안 없는 비판은 비난으로 보이므로, 제가 생각한 '정치권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찾아봤습니다.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이창동 장관의 연설문 중 일부입니다.
성년이 되신 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몇 차례의 기념비적인 순간들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돌이랄까 결혼식이랄까 회갑이랄까 하는 것이 그런 것인데, 성년의 날은 아마도 그런 날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흔히들, 이게 무슨 시험에 합격한 것이 아니어서 그냥 생각 없이 지나쳐가기 일쑤입니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권리를 대외적으로 인정받는 첫자리에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스무 살의 나이에 대한 부러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하나의 생명체가 이를 수 있는 절정의 자리에 도달해 있지만 그것의 영광을 다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사춘기에 어떤 일을 겪는지 모르면서 사춘기에 이르고, 어른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른이 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지상의 삶이 매 순간 전인미답의 길을 간다는 사실처럼 우리를 긴장시키는 것은 더 없습니다. 마치 바다가 파도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인생의 순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멈출 수 없는 과정들로 이어져 있으니, 우리가 한강의 물빛이 푸르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어제의 물은 어제 다 흘러버리고 오늘은 오늘의 물이 흐르듯이, 매일 같이 만나는 낮 12시도, 또 지금 민속박물관 앞마당에서 쏟아지고 있는 눈부신 햇살도 어제의 것은 어제 다 쏟아져버리고 오늘은 오늘의 것이 찾아와서 쏟아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이 아름다웠다고 해서, 또 기쁘거나 행복했다고 해서 그곳에 머물러 있거나 떠난 후에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감히 삶의 위대함이 그곳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부드리건대, 죽은 고래는 아무리 커도 물살이 흐르는 대로 따라 흐를 수밖에 없지만, 살아있는 송사리는 아무리 작아도 세찬 물길을 거슬러 오를 줄 압니다.
부디 지난 월드컵 때 보여준 '살아 있는 송사리'들의 패기와 열정과 꿈을 살려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동량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소한 이 정도의 말씀을 해주셔야 했던 건 아닌지요.
그러니 오늘도 쓸쓸함을 지울 수 없는 한탄만 늘어놓게 됩니다.
김석재 SBS 앵커가 한 클로징 멘트를 인용해 오늘의 한탄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창동 감독(전 장관이라는 수식어가 제 입에 붙지 않네요)의 연설과 사전적 <성년의 날>의 의미를 함축해 놓은 단 3 문장이었습니다.
이 3 문장을 듣고 혼자 되뇌었습니다.
"이게 맞지"
(어제는 성년의 날이었습니다.)
2005년에 태어난 청소년들이 말 그대로 어른이 됐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회의 규제로부터 자유로워지지만 스스로 책임과 의무를 져야 합니다.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빛나는 19살을 맞아 이 사회의 당당하고 멋진 어른이 되길 바랍니다.
(나이트라인 마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