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결된 봄 Aug 12. 2020

해결된 봄:남편의 임신_ 고역을, 오롯이.

그리고 또 망각 <임신 16주차>

 [남편의 임신]이라는 제목으로 임신 일기를 기록한 지 어언 석 달이 다 되어 간다. 아내의 임신에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임신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쓰는 글들이 내 마음에 녹고, 어쩌다 이 글들을 스쳐가게 될 어떤 이들의 마음에 한 절이라도 남기를 원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가보는 임신이라는 이 길이 그저 싫거나 낯설지만은 않았으면 했다.

 이 글을 써오며 드는 생각은 오히려 임신의 시간이 공감을 토대로만 한다면 서로를 더욱더 아끼고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 되며, 견디기 버거운 추운 겨울의 날이 아니라 해결된 봄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곧 꽃을 틔우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내에게 임신이란 그저 기쁨과 감사로 여기기엔 '고역스러운' 시간이 너무 많다. 그렇기에 기쁨과 감사의 시간에만 참여하는 남편이 아니라 괴로운 시간에도 참여하는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의 임신에 '고역'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과장도 아니고 엄살도 아니다. 이제 임신 중기에 들어섰지만 이 표현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말 그대로 고역스럽다. '고역'이라는 뜻은 소름 돋을 정도로 임신에 부합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고역(苦役)스럽다'라는 형용사는 '몹시 힘들고 고되어 견디기 어려운 데가 있다'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고역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음이의어이지만 같은 말로 쓰이는 '고역(雇役)'이라는 명사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고용하여 부림', '부역을 가지 아니하려고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대신 보내는 일'이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부부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고생은 아내가 도맡아 한다. 아이를 잉태하고 그로 인한 몸과 정신의 변화를 감당해야 하고, 출산의 고통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아내의 몫이다. 다만 남편의 의도나 의지도 아니요, 선택지가 있는 문제도가 아닐 뿐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신체구조의 한계이며 자연의 법칙이라는 불편한 사실 속에 놓여 있다. 하지만 형국만 보면 마치 남편이 출산을 위해 아내를 부리거나, 부역, 곧 임신과 출산의 길을 가지 아니하려고 아내를 대신 보내는 상황이나 다름없는 게 임신이라는 것이다.


 또 기가 막힌 게 위에 '오롯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 '오롯이'라는 단어에도 두 가지 사전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모자람 없이 온전하게'이고 또 하나는 '고요하고 쓸쓸하게'이다. 아내는 임신과 출산의 과정, 더 나아가 육아의 과정에서까지 오롯이, 즉 고요하고 쓸쓸하게 (부정적인 의미에서의)모자람 없이 온전하게 고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기쁨은 분명히 똑같이 나눌 수 있는데 고통은 분명히 절대로 똑같이 나눠지지 않기 때문에 남편도 임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입덧을 경험하지 않거나, 임신 초기 불안한 상황을 만나지 않은 이들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여하튼 이렇게 고역스러운 임신을, 그리고 앞으로 점점 더 고역스러울 임신을 경험하고도 어떻게 둘째, 셋 째를 계획하는 되는 것인가? 분명 경험자들은 아이가 주는 기쁨을 말할 것이다. 이해한다. 아직 실제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지도 못한 아내 뱃속에 있는 예쁨이가 주는 기쁨과 놀라움이 벌써부터 이렇게 큰데 직접 눈을 마주치는 내 자녀가 주는 기쁨과 사랑스러움을 내가 어찌 측량할 수 있을까. 이렇게 아이를 낳게 되는 첫 번째 이유가 아이가 주는 기쁨이라면 두 번째 이유는 아마도 이것 때문일 것 같다. 바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이다.

 다른 임산부가 입덧을 얼마나 하는지는 잘 몰라서 정확한 상대평가를 할 수는 없지만 내 아내도 꽤 입덧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입덧이 끝난 것 같다. '끝났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끝난 것 같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간헐적으로 약한 입덧 증상이 있기 때문이고 다행히 식생활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이다. 지금이야 이렇지만 입덧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는 후각과 미각이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 뛰어난 동시에, 비위는 우주에서 가장 약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굉장히 힘들어하며 둘째는 못 갖겠다고 호소했던 아내가 어제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입덧을 한건가? …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지나보고 나니 견딜만했다고 생각이 드나 보다. 그 순간은, 아니 순간이 아니라 몇 주를 그렇게 고생했는데 "내가 입덧을 한 건가?"라는 질문이 나오다니. 물론 이 말을 꺼낸 아내의 긍정 마인드는 아주 나이스 하다. 박수!!!!!! 힘들었던 기억을 할 만했던 기억으로 남기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며 그로 인해 다시 고역과 마주하여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아주 훌륭한 도전 정신을 가졌다는 것이다. 남자도 "훈련소 있을 때 재밌었지"라고 하는 도리들이 많다.




 임신은 감사와 기쁨만큼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그 고통은 똑같이 나눌 수 없는 한계 안에서 아내들은 희생하고 헌신한다. 남편이 힘들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남편이 꽁으로 먹는다는 게 아니다. 남편도 나름대로의 고충과 긴장으로 이 시기를 보낸다. 분명 남편도 힘들다. 하지만 그 크기가 절대로 아내에 비길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남편도 함께 임신하는 마음으로 아내를 완전히 공감하고 이해하자. 나만 편하지 말자. 얼마큼이나 그래야 할까요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언제 돌아봐도 후회가 없을 만큼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내가 휘몰아치는 파도에도 순항할 수 있도록 함께 키를 잡고 가자. 이것은 누구를 향한 가르침이 아니라 스스로의 다짐이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아내의 마음이 내게 닿는 듯하다. 오늘 집에 가면 따뜻한 손으로 불러오는 배를 조심스레 만지며 너무 아름답다 이야기하고 세상 모든 주제로 수다를 떨어야겠다. 분명 나를 귀찮아하겠지만.

 임신의 시간이 어떤 부부에게는 빗물에 파여 도로에 쏟아지는 비탈길 흙더미 같겠지만 어떤 부부에게는 마른땅에 생기를 넣어주고 새싹을 틔우는 단비 같은 시간일 것이다. 우린 후자를 택할 것이다. 꼭 필요할 때 알맞게 내리는 단비도 감사한데, 그 감사의 시간 이후엔 무지개도 볼 수 있으리라.


 마침 장마다. 장마철에 스파게티를 먹으면?     

 

 습하게띠





좋은 말만 해주세요 제발


 임신 16주, 4개월이 넘어 5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시간이란 게 노력과는 별개로 틀림없이 흐르기 때문일까. 빨간 두 줄을 보며 감격했던 풍경이 엊그제 같은데 그 지난날들을 세어보니 그 하루하루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과거라는 게 새삼 소름이다. 이제 임신 가정으로 넉 달을 살았는데 그 넉 달 안에 몇 년이 담겨있는 듯하다. 때론 기뻤고, 때론 아찔했던 그림들을 생각하니 안구에 습기가 찬다. 좋은 잉크로 뽑아낸 잘 인화된 사진처럼 아내와 나의 아름다운 컷들이 시간이 흘러도 선명하여 언제 꺼내어보아도 생생하길 기도한다.   




 16주가 되면 2차 기형아 검사를 한다. 이 시기에 '기형아'라는 단어는 사실 입밖에도 내기 싫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다른 표현이 없는 걸까? 나만 그런 걸까? '기형아검사'라는 단어보다 '태아 건강검사'정도의 좋은 표현이 있었으면 하지만 별 수 없이 늘 긍정의 마음으로 이 단어를 말한다. 12주 때 했던 1차 기형아 검사와 16주에 하는 2차 기형아 검사의 결과는 2차 검사를 마치고 일주일 후 문자로 고지한다고 한다. 이제 진료시간이 임신 초기 때만큼 긴장되거나 불안하지 않다. 초음파 영상을 통해 예쁨이가 주수에 맞게 잘 성장하고 있는 것을 틈틈이 봐오기 때문이다. 16주라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약함을 서서히 벗어내고, 처음 맞는 엄마 뱃속 세상에서의 부적응을 모조리 이겨낸 예쁨이다. 생명의 강인함은 성인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세차게 뛰는 예쁨이의 심장이 분명히 말해준다. 불안할 때 찾아보았던 글 중에 '태아를 믿으라'라는 말이 있었다.


 토요일이 되었다. 병원에 가는 날이다. 병원 가는 날은 늘 기다려진다. 그리고 그 어떤 날보다 눈이 잘 떠진다. 함께 병원에 가기 위해 토요일로 예약을 잡았었다. 비록 토요일에 대기가 엄청 길~~~~지라도 병원은 함께 가야 한다. 16주 3일이 된 오늘은 2차 기형아 검사날이다.

 어떤 이들은 태아에 대한 여러 가지 산전 검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갖기도 했다. 검사해서 문제가 있으면 안 낳을 것도 아닌데 왜 돈을 들여 병원의 상술에 넘어가는 것이냐고.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임신 중에 할 거 다 했다. 건강히 출산하고 보니 하룻강아지 쫄보적 생각 못하게 된 것일까. 적어도 내 생각은 산전의 검사로 인해 우리는 많은 것을 예방하고, 또 대처할 수 있다. 그리고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엄마에겐 최고의 태교일 것이다. 아내를 위해, 그리고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만큼은.


 오늘도 역시 병원은 인산인해다. 배 아직 안 부른 초기 임산부와 배부른 중 후기 임산부들 속에 배부른 아저씨들의 모습도 보인다. 나를 포함하여.


 접수를 하고 진료실 앞에서 대기를 한다. 예약한 시간을 조금 넘겨서 아내의 이름이 불려져 믿음직한 의사 선생님 앞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리고 초음파실에 들어갔다. 이내 딱 봐도 차가울 초음파 젤이 뜨거운 아내 배 위에 떨어진다. 내 배도 아닌데 시리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은 능숙하게 초음파로 배 위를 훑는다. 우리의 눈은 모니터에 집중하고 귀는 좋은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드랍 더 좋은 말. 빠르게 움직이는 초음파 화면에서 예쁨이의 모습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초음파는 아이의 모습을 부모에게 보여주기 위한 뷰 서비스처럼 느껴졌다면 오늘의 초음파는 아이의 상태를 빠르게 확인하기 위한 의사선생님 위주의 철저한 검사 목적처럼 보였다. 다음 환자들이 줄 대기를 하고 있는 상황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선생님에겐 대충은 없다.


 어느 정도 상태를 파악하신 후 조금씩 초음파의 속도를 늦춰가며 입을 떼신다. 염려가 많았던 양수의 양은 계속 적당한 수준으로 매우 좋다고 하신다. 물 먹기의 승리다. 이어 머리의 길이를 재며 뼈 모양을 확인시켜 주시고, 다리의 뼈와 길이도 체크하시면서 예쁨이가 주수에 맞게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키와 몸무게도 알려주시며 다 좋다고 말씀하신다. 아내와 내 삶에서 가장 기쁨이 되고 안도가 되는 반가운 소리이다. 이제 예쁨이는 모든 장기들이 생겨나 발달하고 있고 갈비와 팔다리 등에 뼈도 잘 생겨났다. 초음파를 보면 마치 엑스레이처럼 뼈가 하얗게 보인다. 이 작은 아이의 몸에 모든 게 있다.  



 허벅지는 아빠를 닮아 벌써 튼튼해 보이고 하체가 발 끝까지 아름답게 쭉쭉 뻗은 것은 엄마를 닮았다. 점과 같은 모습으로 심장만 반짝이던 예쁨이가 어느새 이렇게 진짜 사람의 모습으로 컸다니.. 예쁨이가 진짜 사람이 맞지만 진짜 사람처럼 성장하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보통 16주는 성별을 확인하는 주수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때를 특별히 더 기대한다. 하지만 효자 예쁨이는 14주에 훌륭한 '남아'라며 스스로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그러니 성별 반전 같은 건 없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반전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초음파 끝 무렵에 의사 선생님께서 잠깐 손놀림을 멈추시며 유심히 보신다. 이 순간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의사 선생님은 마우스 포인터로 초음파 화면의 검정 부분을 가리키며 약간의 피고임이 보인다고 한다. 이제 16주면 안정기라 어느 정도 활동이나 운동, 또는 여행을 생각할 수도 있는 시기이지만 3주 정도 더 안정을 취하며 피고임 상황을 지켜보자고 하신다. 이 피고임의 이유를 특정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피고임은 잘 흡수되어 없어진다고. 그러니 너무 염려 말라는 표정으로 우릴 안심시킨다.

 하지만 아내는 상심이 크다. 16주가 지나고 17주 차가 되면 어느 정도 안정기라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그간 예쁨이를 가장 안전하기 지키기 위해 무리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던 아내였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사소한 일상의 일들조차 못하고, 가고 싶은 곳 못 가고, 해야 할 일들을 미뤄가며 이 날만을 기다린 아내는 3주 더 안정을 취해 보고 내원하라는 말에 몹시 속상했을 것이다. 혹시나 이로 인해 문제가 생길까 싶은 두려움도 클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피고임은 당장 태아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도 좋은 선례로 이어진다는 대부분 중 한 가정이 되어 피고임이 잘 흡수되어 염려들을 떨쳐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진료를 마치고 3주 뒤 다음 예약 일정을 잡았다. 토요일은 대기시간이 길다는 직원의 말에도 불구하고 또 토요일로 잡았다. 같이 오면 기다림의 시간도 잠시일 것이다. 이후 1차 기형아 검사 때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금액을 결제하고 검사를 위한 채혈을 했다. 그리고 쨍쨍한 햇살 아래로 빠져나오며 병원을 뒤로했다. 아내의 얼굴 어딘가에서 시무룩함이 묻어 나온다. 


잘 흡수될 거야. 그간 예쁨이 돌보느라 너무 수고했어.
3주 후에 분명 괜찮아졌다는 말 들을거야!


 라며 되지 않는 위로를 전한다. 




 집에 돌아와 아내의 배를 만진다.(예쁨이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정말 정말 조심스럽게 만져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단단해지고 서서히 배가 나오기 시작한다. 전까진 배가 두꺼워지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정말 조금씩 볼록해지는 것을 느낀다. 튼살크림을 더 열심히 발라야겠다. 임신 과정에 있어서 교과서와 같이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아내는 작은 태동을 느끼기도 하고 팔다리가 저리기도 하다. 오늘은 배 한쪽만 살포시 튀어나와 예쁨이가 있는 위치를 추측할 수도 있었다. 다른 증상으로 발이 붓기도 하고 아랫배가 당기듯 통증이 있기도 하다. 잦은 두통으로 힘들어도 하고, 배꼽 위아래로 아주 희미하게 생기는 임신선에 놀란다. 하얗던 피부에는 약간의 주근깨들이 찾아왔다. 요즘은 일부러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주근깨 성형을 한다고 한다. 그 이유를 알겠다. 약간의 주근깨가 생긴 아내의 얼굴은 여전히 예쁘다. 아내는 16주차에 겪을 수 있는 임신의 반응들을 모두 잘 겪고 있다. 다만 곧 빈혈이 시작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고른 영양섭취와 철분제 섭취를 통해 빈혈 없는 임신 중기를 보내기를 바란다.


 아내의 배에 손을 대고 초음파 영상을 돌려본다. 진짜 예쁨이가 눈 앞에 있고 내 손에 있는데 핸드폰으로 예쁨이의 모습을 만나고 있으니 뭔가 이상하다. 초음파 영상을 자세히 보니 예쁨이가 다리를 접었다가 펴기도 하고 손을 죔죔 하며 오므렸다가 펴기도 한다. 예쁨이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우리는 흥분한다. 예쁨이가 우리 가정에 찾아와 준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예쁨이의 존재는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하고 감사하게 할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서로 감사한 것 세 가지씩 말하기를 통해 빛으로 그늘을 거둬내고 더 좋을 내일로 향했다.


(일주일 뒤, 1,2차 기형아 검사 '저위험군'이라는 문자가 왔다. 태아에 대한 검사 결과가 모두 정상이라는 이야기다!)




역사가 될 글


 아내는 내 글을 보는 게 좋다고 했다. 마치 편지를 받는 기분이라고. 이 말은 내게 월급과 같았다. 월급은 한 달 내내 일한 것을 물질로 보상받는 것이다. 거꾸로 보면 월급을 받기 위해 한 달 내내 일한다. 이처럼 나도 열심히 글을 썼더니 아내의 기쁨이라는 월급 같은 보상이 주어졌고 이제는 가끔 아내의 기쁨을 위해 이 글을 쓰기도 한다. 글을 이어 나갈 가장 큰 원동력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남편의 임신 일기는 임신한 아내를 향한 편지다. 이 편지의 끝엔 늘 수신자의 오타 수정 요청 단계가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임신에 대해 무뎌져 있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이것이 글을 쓰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임신의 주차가 거듭될수록 아내의 임신에 대해 익숙해질 위험이 있다. 아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하는 마음과 몸으로 인해 전혀 익숙할 수 없는데 남편만 익숙해지니 위험이라는 단어를 쓴다. 아내의 임신에 대해 글을 쓰면 '관심'하게 되고, 그로 인해 절대 익숙할 수 없는 아내의 마음을 조금 더 읽을 수 있다. 관심은 공감을 낳고 공감은 위로를 낳더라. 




글은 호흡이다.

 아내를 향한 마음은 내쉬고 배우자로서의 양심은 들이쉬는 이 호흡은 나를 조금 더 좋은 배우자로 만드는 선순환으로 인도한다. 멋진 남편인 것처럼 보이도록 뱉어 놓은 글들은, 내가 글처럼 살지 못할 때 스스로 역겨운 사람이라고 여기게 만든다. 역겨움을 누가 즐기겠는가. 그래서 역겨운 인간상에 대한 탈피를 위해 몸부림치게 되는데 이것은 꽤 괜찮은 방법이다.

 찬양 곡 중에 '소원'이라는 곡이 있는데 이런 가사가 있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길, 또 그렇게 죽기 원하네

 

크리스쳔이라면 누구나 알고 좋아할 법한 이 가사처럼 나도 살아내길 원한다. 신앙도 임신도. 




글은 역사다.

 처음엔 임신에 대한 글을 내 PC 메모장이나 한글 파일에 저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이 글이 가능하면 가장 안전하게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존에 썼던 글을 옮기고, 새 글들은 이곳에 바로 작성한다.

 임신 사실을 안 후부터 지금까지 쭉 글을 남겼다. 가끔 4주차나 5주차를 비롯한 임신 초기의 글을 손쉽게 꺼내어 보면 얼마 되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느껴진다.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지금 쓰는 글들이 미래의 우리에게 어떤 기쁨을 줄지 대략 짐작되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은 더 가치 있다. 그리고 이 글들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 가정과 평생 함께 할 글이다. 우리가 살면서 평생 지니고 가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있다면 인화한 사진, 또는 뱃살과 같은 이미 한 몸이 된 것들 정도 일 것이다. 결국 뭐든 낡으면 바꾸고, 필요치 않으면 버리게 되는 반복을 하며 살 것인데 임신 일기는 그렇지 않다.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서로 주고받은 편지도 잘 꺼내보지 않는 게 현실이지만 임신 일기는 자주 꺼내어보는 얼마 안 된 역사가 될 것이다. 고로 이 글들은 곧 역사가 될 글들이다. 예쁨이도 언젠가 이 글을 보게 되겠지? 




좋은 남편?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다.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 중인 사람이다. 좋은 남편은 실제로 참 많다. 나는 많은 임신 가정의 남편들을 보곤 하는데, 지인들의 모습도 보고 직접 검색해서도 본다. 그리고 내 글의 유입 경로를 통해서도 좋은 남편이 되려는 이들의 움직임을 본다. 


 나는 이 글로 좋은 남편이 되겠다며 표현할 뿐이지 대게 많은 남편들이 드러내지 않은 채 이미 좋은 남편의 길을 가고 있다. 나도 그들을 통해 배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가끔 보이는 "좋은 남편이세요", "멋진 남편이십니다"라는 글들이 기분 좋을 때도 있지만, 사기꾼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불편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이 글들이 칭찬을 받기보다는, 이 글들을 통해서 나를 포함한 남편들이 더 지혜로운 임신 기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 




산모수첩

 마지막으로 산모수첩에 대해 말하자면, 임신을 확정받고 나면 산모수첩을 받게 된다. 임신 축하드립니다 하며 주는 선물 같았다. 다른 산모수첩 표지 디자인들은 90년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은 친근한 비주얼이었는데 우리가 다니는 병원은 그나마 무난하다. 그리고 이름은 산모수첩이라 부르는데 쓰여있기는 '엄마일기'라고 쓰여있다. 


  이 산모수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산모 수첩은. 산모 수첩은. 아 그러니까 산모 수첩은 말이죠… 잘 모릅니다. 생각해보니 아내 전용으로 주어진 것만 같은 이 산모 수첩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분명 받은 첫날 여기저기 들춰봤는데 기억이 도통 나질 않는다. 병원에 갈 때마다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영수증을 끼우고 받은 초음파 사진을 잠시 보관하는 용도로 밖에 보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아내의 수첩으로 생각하고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반성한다.

 산모수첩(엄마일기)에 대해 대충 알기로는 임신 후 받아야 할 검사나, 주수에 따른 태아 상태가 설명되어 있고 그 밖의 진료 기록들을 기재할 수 있도록 된 수첩이다. 이것만 봐도 산모 수첩은 부부가 공유해야 할 수첩인데 마치 아내에게만 주어진 수첩처럼 느껴진다. 이름부터가 엄마 일기... 반 변명이지만 그러니 나도 관심이 더 가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남편들도 비슷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산모수첩이 아니라 엄마 일기가 아니라 '부부수첩'이라든지 '부모수첩'과 같은 이름을 사용하면 더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아빠 수첩이나 남편 수첩, 아빠 일기라도 팔아달라.


작가의 이전글 해결된 봄:남편의 임신_ 내가 물박사가 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