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고
김애란 <안녕이라 그랬어>
김연수 <수면 위로>
윤성희 <자장가>
은희경 <웨더링>
편혜영 <초록 스웨터>
인터뷰
상실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수록된 다섯 편의 소설이 모두 상실에서 뻗어져 나온 이야기로 다가왔다. 소중한 이를 잃은 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
나는 줄곧 이별을 무서워했고, 그래서 깊은 관계를 피하곤 했다.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지 않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온 마음을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진 후에 내가 너무 아플까 봐. 그 어떤 고통보다도 상실의 고통이 가장 크리라 여기니까.
그래서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힘껏 사랑하고 전부를 내어주며 사랑하는 이들을 보면 신기했다. 저들은 헤어짐과 끝이 걱정되지 않나, 하고. 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닐 텐데 다들 어떻게 깊은 관계를 만들어가는지, 어떻게 자신의 깊은 내면을 터놓는지, 그리고 어떻게 영원을 약속하는지 궁금했다. 모든 관계에는 끝이 있는 법인데. 자의든 타의든.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사랑했다. 영원을 약속하고 사랑을 말하며 서로를 생각했다.
차라리 모든 관계가 나의 의지로 끊어지면 조금은 덜 무서울 텐데.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렇게 쉽지 않고 죽음이라는,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변수까지 존재한다. 상대방에 의해, 혹은 죽음이라는 운명의 장난에 의해 누군가를 잃은 후에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야만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결국 살아가는 이유는, 버틸 수 있는 있는 이유는, 다행히 기억이 쉽게 희미해지지 않기 때문이리라 짐작해 본다. 그들에게는 확실히 정의할 수 없지만 헌수에게 배운 무언가가(안녕이라 그랬어),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신맛이(수면 위로), 짝짝이 양말의 날과 스크류바가(자장가), 홀스트의 '목성'이(웨더링), 그리고 마지막으로 잡은 손의 온기가(초록 스웨터) 남아있다.
"이제 나는 헌수도 없고, 엄마도 없고, '다음 단계'를 꿈꾸던 젊은 나도 없는 이 방에서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란 가사의 노래를 듣는다. 보다 정확히는 네가 아닌 너의 부재로부터 무언가를 배웠다고. 그런데 여전히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지금은 그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쪽에서 먼저 원곡 위에 '안녕'이란 한국어를 덧씌워 부른다고. 우리 삶에는 그렇게 틀린 방식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고 아마 나는 그걸 네게서 배운 것 같다고." - <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시간여행자처럼 몇 번이고 다시 살았던 하루를 또 시작하는 듯한 느낌. 누가 무슨 말을 할지,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다 알 것같이 느껴지면서 사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내가 같은 하루를 몇 번이고 다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찾기 위해서죠. 지금 이 순간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지금 여기에서 그걸 찾아야 해요. 그게 내가 기시감, 신맛, 자살 충동을 느끼는 이유에 대한 나의 가설입니다." - <수면 위로>, 김연수
"인생이 자꾸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아." 꽈배기를 싫어하면서 스크류바를 좋아하는 건 뭔가 모순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내 말에 이모가 고개를 저었다. "스크류바는 녹잖아. 녹으니 꼬인 게 사라지는 거지." 그 말을 들은 후로 이모의 음식을 먹을 때면 내 안에 있던 모난 것들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 <자장가>, 윤성희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야 평화를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혼연한 쾌락 다음에는 곧바로 늙음이 찾아들며 초자연적인 상상력을 통해서만 비로소 납득이 되는 존재의 소멸. 그것이 구스타브가 생각하는 인생의 궤적이었다." - <웨더링>, 은희경
"그러고 보면 엄마가 내게 슬픔만 남겨두고 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엄마의 손을 마주 잡았을 때의 느낌을 기억했다. 삶에 냉담해질 이유가 많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그 기억 때문이었다." - <초록 스웨터>, 편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