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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이상 Oct 30. 2022

PROLOGUE ; 쇼핑중독, 애잔한 나의 30대

패션 정글에서 살아남기

나는 중독자, 쇼핑중독자다. 옷이며 화장품이며 계획 없이 사들였고, 포장지도, 가격표도 때지 않은 옷들을 옷장에 쌓아 놓고 또 사들였다. 모든 중독자가 그렇듯 중독에 종결이란 없다. 나는 명확하게 말해 쇼핑중독 ‘일시 멈춤’ 상태다.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도박 중독, 인터넷 중독, 스마트폰 중독, 무수히 많은 중독 가운데서 쇼핑중독은 명칭이 주는 강렬한 각인 효과와 달리 중독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좀 애매하다. 약물, 도박은 비윤리적인 명백한 위법 행위이고, 알코올, 인터넷, 스마트폰 중독은 그 자체로 병리적이지 않을 수 있어도 고립을 유도함으로써 결국 사회에서 개인을 완전히 도태하게 한다. 그러나 쇼핑중독에는 이처럼 단호한 입장을 취하기 어려운 모호함이 있다. 쇼핑중독이 병리적 중독으로 분류되지만, 동시에 사회 수용적인 뉘앙스가 배어있다.


여타 중독들이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병리적 결말을 향해 빠르게 진행되는 반면 쇼핑중독은 사회적 파멸로 가는 과정에 꽤 그럴듯한 자기합리화 과정이 자리 잡고 있다. 사회화라는 명분이 쇼핑중독 심각성의 인지를 늦춘다.


난 꽤 긴 시간을 쇼핑중독자로 살고 있다. 쇼핑중독의 길로 들어선 나의 30대는 치열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무릎 골절이 생기도록 이불킥을 해도 부족하다. 너무 구차했고 지질했고, 비루했던 30대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눈물 나도록 애잔하다. 어찌어찌 27살에 패션 전문지 기자로 입사해 감 하나로 버티고 버티다 마의 29세를 지나 30대에 발을 내딛자마자 백화점을 취재를 위한 일터가 아닌 ‘자존감 놀이터’로 바꿔버렸다. 일을 마치고 집 현관에서 신발을 벗을 때 내 손에는 늘 최소한 쇼핑백 2, 3개는 들려 있었다.


내 신발 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온 엄마는 내 손에 들려있는 쇼핑백을 받아서 들고 물건을 꺼내 일단 본인 몫이 있는지 확인하고 일일이 다 헤집어보며 그날 나의 포획물을 공유했다. 사실 기자라는 이유로 하루가 멀다고 뭔가를 늘 선물을 받아서 처음에는 그 사이에 섞여 있는 내 쇼핑 꾸러미의 존재가 미약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엄마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데 넌 ‘개처럼 벌어서 개처럼 쓰냐.’”라며 독설을 날렸지만, 타인의 충고를 향한 나의 이성적 눈과 귀는 이미 닫혀버렸다. 사회적 생존, 약육강식의 거친 세상에 던져졌고 그 안에서 오로지 나의 능력으로 살아남아야 했기에 엄마의 말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외모도 학력도 보잘것없는 내가, 화려함으로 치장한 가혹한 약육강식의 패션 정글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오로지 ‘그들처럼’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정의 내린 사회화, ‘패션 사회화’였다. 그래서 난 중독자가 아니었다. 단지 패션 사회화 과정에 있을 뿐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당당했다.


그렇게 이성이 마비된 상태로 2, 3년이 지나 지갑을 꾸역꾸역 채우고 있는 신용카드들이 내 월급통장의 한도를 완벽하게 이탈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상황에서 회사까지 박차고 나와 카드 대금 해결이 불가능한 채로 가장 열심히 일해야 할 33살에 야반도주하듯 서울을 등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결국 끝까지 전문지 기자 한길만 걷다 어찌어찌 살아남아 뒤늦게 심리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내 치열한 중독자의 삶을 되짚을 기회를 갖게 됐다. 망설이지 않고 쇼핑중독을 논문 주제로 선택한 이후 나는 내 삶에서 치욕이자 축복이었던 쇼핑중독자로 산, 아니 살고 있는 내 삶을 되돌아본다. 나처럼 치열하게 순간적 쾌락 한순간 한순간을 보내고 있을 쇼핑중독자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그들이 하루빨리 자신의 현재를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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