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이상 Oct 30. 2022

PART 5. 중독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자아

내가 만든 자아, 사회적 자웅동체

사람들마다 외양이 다르듯 가치관이 다르다. 누군가는 영화 ‘나인 하프 위크’ 미키 루크처럼 옷장에 똑같은 옷을 채워놓고도 늘 섹시한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 365일 같은 옷을 입는다면, 강박증 환자처럼 보일 수 있다. 굳이 영화가 아니라도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옷차림이 몸에 배어있고, 사람들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옷차림이 차지하는 영역은 의외로 절대적이다.  


같은 디자인의 화이트 셔츠와 블랙 재킷만을 줄기차게 고수하는 사람은 탈 패션주의의 고집스러운 실용주의를, 매일 화이트 티셔츠를 입으면서도 변함없이 깔끔하고 반듯한 옷매무새를 유지하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엄격주의를 고수할 수 있다. 매일 다른 옷을 입어야만 하는 사람은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에서 조금이나마 숨통을 트이고 싶은 자유주의를 추구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들은 같은 한국인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다들 서로 다른 ‘패션 언어’를 구사하는 이민족이다.   


나는 어린 시절 공상에 빠져들 때 상황을 세세하게 구체화했다. 내가 주인공이 돼 좋아하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공간을 디자인하고 의상 디자이너가 돼 의상 설정을 했다. 중학교 때쯤 핑크색 터틀넥 스웨터에 같은 컬러의 오버사이즈 오버롤을 입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며 행복감에 빠져들곤 했다. 지금도 그 당시 공상이 가끔 생각나 피식 웃는다.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상에 깊이 빠져들지 못했다. 나에게는 구두쇠 아빠라는 생생한 현실이 있었다. 지금은 아빠가 당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알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더 크지만, 당시는 근검절약을 입에 달고 사는 아빠가 정말 싫었다. 이런 해소되지 않은 욕구 탓이었을까. 각박한 현실에서 교사가 되야한다는 임무를 부여받고 밀려들어간 생물학도였음에도 졸업 후 굳이 패션 쪽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운명이라는 무책임한 단어를 쓰고 싶지 않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 ‘운명’이 결국 무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공상마저도 허영일 수밖에 없었던 내 욕망을 차곡차곡 담아온 무의식, 그 무의식이 내 삶을 틀었다.  


내가 앞뒤 안 가리고 사들인 옷들, 허영의 산물로 여겨져 가족들에게 나와 함께 평가절하 된 옷들, 그 옷들로 인해 ‘나’라는 물리적, 심리적 형체를 갖추게 됐다. 칼 융은 사회적 자아에 대해 페르소나라는 이름을 붙이며 경고했지만, 그마저도 없는 삶은 긍정으로 가는 길조차 찾을 수 없는 것 아닐까. 나는 무책임했지만, 쇼핑중독은 내 삶에 꼭 필요했던 성장통이었다. 무의식이 인도한 중독의 여정에서 나는 수치심을 키우고, 수치심 안에서 무력감을 경험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조금씩 완성해갔다.  


뒤늦게 입문한 심리학에서 나는 ‘사회적 자웅동체’라는 나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했다. 친구들은 내 사회적 성별을 두고 별명 붙였다. 한동안 내 성씨에 ‘군’이 부여됐다가 어느 날 인가부터는 ‘양’이 등장했다. 그러다 ‘군’과 ‘양’이 혼용돼 사용되고 있다.  


같이 공부하는 동료도 하루는 나에게 “남자 같은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말하다 보니 정말 여자 같아요.”라며 재미있어했다. 나는 이런 나에 대한 성별에 근거한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었다. 내가 남자 같은 성격이라 좋았는데 여자가 같은 성격이라 실망했다는 건지, 아니면 남자 같은 성격인지, 여자 같은 성격인지  모르겠다는 건지. 그런데 심리검사 MMPI-2에서  주변 친구와 지인들의 이런 생각들이  사회적 자웅동체 성향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모두 높은 그야말로 성향적 자웅동체였다.


주변에서 이런 나의 성향을 일찍이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쇼핑중독으로 만들어진 스타일 때문이었다. 나는 무수히 많은 옷을 사들이고 또 사들이면서 내 얼굴과 몸의 적합도를 검증했다. 10대에서 20대 초반에 겪어야 하는 것을 20대 중반이 넘어서 30대가 돼서야 시작했다. 그렇게 현재 나만의 방식으로 재해석된 앤드로지너스 스타일을 완성했다.   


옷의 중독적 구매를 허영으로 단죄하는 것이 억울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남들보다 한참 더디게 사회적 자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겪었고 그 과정에 중독이라는 파고를 겪은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인정하는 스타일이 어느 정도 갖춰지면서 중독은 외연 상이나마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