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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Mar 06. 2024

마음의 촉을 틔우며

<글제 : 나무, 꽃>


벌써 목련이 지고 있었다. 핀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출근길에 아파트를 나서며 처음으로 화단에 눈길을 주었다. 개나리, 진달래가 피고 이름 모를 나무들도 이미 잎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산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그때 서야 꽃들을 보게 되었다니, 갑자기 난 뭘 하며 살았나 하는 생각이 난다. 사십 대의 끝자락, 이른 아침 외투도 제대로 못 걸치고 후다닥 뛰어 나가면, 늦은 저녁 집에 들어오는 날들이었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에 담장 옆으로 온갖 꽃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아침마다 전력 질주하는 아낙네의 꼴을 나무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 


3월의 어느 날 그 출근길에서 제대로 꽃을 발견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꽃잎 떨군 목련 나무와 이제 꽃이 피기 시작하는 진달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꽃진 자리에 잎 돋은 진달래 나무 옆에 푸른 잎이 빽빽한 나무줄기 사이로 언뜻 붉은 빛이 보였다. 혹시, 누가 버린 비닐 끈인가 하며 잎을 헤치고 보니,  줄기에 올망졸망 꽃들이 잔뜩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진홍빛 명자나무꽃이었다. 어느 저녁 퇴근길에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오는데 ‘헉’할 정도의 진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분명 라일락 향인데. 아파트 담장 끝자락에 볼품없이 비실비실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이리저리 뻗은 가지에 몸통도 가늘어 바람 불면 그대로 쓰러질 듯한 모양새였다. 향기를 따라 담장을 돌아서니 그 비실비실한 나무에 연보랏빛 꽃들이 활짝 피지 않았겠는가. 아주 볼품없던 나무의 모습에 비해 그 향기는 나를 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봄, 넓고 확 뚫린 길을 찾아 달려가던 나에게 굽이 돌아 가는 길이 보였다. 가끔은 멈춰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코를 킁킁거리며 꽃과 나무들을 마음에 담았다. 어린 시절에는 아무 의식 없이도 자연을 마음껏 즐겼다. 봄날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면 친구들과 호때기 만들어 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찔레 줄기 달큰해질 때 꺾어 먹으며 학교 가던 날들도 다시 떠올렸다. 지천으로 널려있던 나물들과 꽃반지 만들어 끼던 풀들은 말 없는 친구였는데. 


그날 이후였다. 내 손에는 책이 들려졌다. 꽃과 나무가 나를 깨웠을 때 책 친구들도 손잡고 찾아왔다. 까닭 모를 허무감으로 가라앉던 나는 자연과 책을 지지대로 다시 일어섰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 자신을 찾는 길을 떠나게 되었다. 어떤 밤에는 휘적이며 일기를 쓰고, 화이트데이에 사탕을 먹으며 달콤한 문장을 끄적거렸다. 회색빛의 잔가지 사이에 핀 노란 산수유꽃을 보며 "산수유는 나무가 꾸는 꿈"이라는 김훈의 글귀를 떠올리기도 했다. 벽을 짚고 두 다리에 힘을 올려 첫걸음을 떼는 아이처럼 환희심이 가득하였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주인공인 배우 윤정희가 시를 쓰기 위해 사과 한 알을 하루 종일 요리조리 돌리며 뚫어져라 바라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진짜로 자세히 보면 시를 쓸 수 있다.”는 문화센터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전전긍긍하던 그 모습이 그 시절의 나와 같았다.


그러나 움이 돋으려 들썩거리던 마음은 삶의 쳇바퀴에 짓눌리고 나는 또 일에 쫓기며 살았다. 여러 굽이를 돌고 돌아 이제 노년의 시기를 맞이한다. ‘시’의 영화 장면 데자뷔처럼 내 귀에 문예반 교수님의 말이 들려온다. “움이 돋고 촉이 트는 봄을 느껴 보라.”고. 오랫동안 잠자던 내 마음의 촉을 틔우라는 소리로 들린다. 그동안 겨우내 움츠렸던 내게 깨어나라고 외치는 것처럼. 


 오늘은 한참을 멈춰서서 공원의 플라타너스 나뭇가지 끝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얼룩덜룩 군데군데 껍질이 벗겨진 몸통을 쓰다듬는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경이롭다. 아니 반갑다. 중년의 굽이를 돌아 다시 이 자리에 선 나를, 마치 하늘 가득 가지 뻗은 플라타너스가 환영해 주듯이. 흐릿한 초봄 하늘의 구름 사이에 마치 실핏줄처럼 퍼져있는 가지들에는 물이 오르고 있을테지. 멀지 않아 나뭇잎의 촉을 틔우고 새순을 돋게 하리라. 내 마음에도 촉을 틔울 새봄은 오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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