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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경숙 Feb 21. 2024

막걸리와 화전놀이

<글제 : 봄>


막걸리 서너 잔에 기분이 좋아진다. 남편은 약속이 있다며 외출하였다. 혼자 간단히 저녁을 먹을까 하며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는데 문에 있는 막걸리가 눈에 띄었다. 남편도 없는데 혼밥에 막걸리를 꺼내 놓았다. 부엌 식탁에 앉아 밥은 저리 밀어놓고 막걸리를 한 잔 따라 마신다. 맛있다. 한 잔 더 따른다. 살면서 화나는 일이 있거나 뚫고 나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술 한 잔이 주는 힘이 있다. 독주가 아닌 막걸리 한 잔이면 건강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가슴이 뚫리는 효과를 본다. 내친김에 스마트폰에 음악을 켜고 혼자 홀짝홀짝 술을 마시니 감상적으로 이런저런 추억들이 떠오른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도 나면서...


봄꽃이 피기 시작하고 아직 농사일에 손이 바쁘지 않을 때 엄마들은 꽃놀이를 갔다. 여자들만의 나들이다. 아껴두었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엄마들은 뒷골 산 아래로 모여들었다. 사거리 주막집에서 가져온 배가 불룩한 막걸리 통이 앞장을 선다. 꼬마들부터 짐 하나씩 할당받고 올라온 큰아이들이 뒤따른다. 아이들은 은밀한 나들이에 낀 것이 신나서 망둥이처럼 엄마들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주막집 총각이 나무 밑 그늘에 막걸리 통을 내려놓고 가면, 부침개 할 밀가루 반죽이 담긴 큰 다라이가 그 옆에 놓였다. 큰 돌 세 개를 삼각으로 각도를 맞춰 놓은 다음 그 위에 까맣고 반질반질한 솥뚜껑을 뒤집어 척 걸쳐놓으면 준비 완료다. 엄마들은 여기저기 무더기로 모여 앉아 남정네 없이 떠드는 수다에 박장대소를 하고 웃는다.


나뭇가지에 불이 붙을 때까지는 매운 연기에 눈이 시큰하지만 불이 제대로 붙은 다음에는 일사천리다. 됫병에 들어있던 기름을 대접에 따르고 젓가락이 가운데 꽂힌 커다란 무우 토막을 기름에 담궜다가 달구어진 솥뚜껑을 휘휘 둘러 골고루 기름을 바른다. 반지르르한 솥뚜껑 위에 밀가루 반죽이 부어지자 찌지직 소리를 내며 하얀 김이 고소한 기름 냄새를 피워올린다. 깨끗이 씻은 봄동과 실파를 이리저리 듬뿍 얹으면 뽀얀 밀가루 위에 초록빛이 미각을 자극해 어느새 침이 꿀꺽 넘어간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부침개를 큰 쟁반에 척 올려놓으면 엄마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젓가락을 하나씩 집어 든다. 쭉쭉 찢은 부침개를 한 잎 가득 집어넣고 뜨거운 기운을 피해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려 가며 맛나게 먹는다.


배불뚝이 막걸리 초롱을 기울여 꿀럭꿀럭 대접에 따르면 기다렸다는 듯이 한잔씩 돌려받는다. 흔한 건배사 한마디 없지만 시원하게 마시며 감탄사를 뱉으면, 붉은 꽃에 둘러싸인 산들마저 취하는 듯했다. 막걸리가 한 바퀴 돌고 부침개와 준비해 온 음식들을 배 불리 먹고 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긴 나무막대 두드리며 노랫가락이 나오기 시작한다.

“황성옛터에 밤이 오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끊이지 않고 노래가 이어진다. 기타 반주도 없고 장구에 북도 없지만 막걸리 통에 박자 맞춰 두들기는 나뭇가지의 퉁퉁거리는 울림은 어느 비싼 악기에 견줄 바가 아니다. 노래가 서너 곡 이어질라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하나둘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한 손을 어깨너머로 휙휙 번갈아 올리며 한 다리씩 사뿐사뿐 들어 밟는 그 춤사위는 꽃무늬 한복과 어우러져 봄기운에 취한 산을 마구 들썩이게 한다. 노래 가사는 비 오는 날 막걸릿집처럼 처량하나 엄마들의 춤은 왜 그리 화사한지.


지치지도 않고 계속되던 가무(歌舞)는 저고리 뒤쪽으로 땀이 쭉 베어 나온 다음에야 멈춘다. 마른 나뭇잎을 방석 삼아 앉은 엄마들은 소화가 다 된 배를 채우기 위해 다시 불을 지핀다. 남은 밀가루를 붓고 참꽃 잎을 따서 드문드문 올린다. 둥근 밀가루 받침에 연분홍 꽃잎이 그림처럼 예쁘다. 최연장자 종갓집 할매의 걸쭉한 농담에 엄마들은 손뼉을 치면서 웃는다. 덕망 있는 할매가 그런 농을 하시다니. 이에 질세라 집마다 숨겨 두었던 아빠들의 흉을 보고 알아듣지 못할 농담도 하시며 모두 배를 잡고 뒹굴며 눈물까지 찔끔거린다.


햇빛이 온기를 차츰 잃어갈 즈음이면 꽃자리 놀이는 끝을 알린다. 여기저기 널려진 그릇들을 챙겨서 큰 다라이에 담고 막걸리 통은 손잡이를 모아 줄로 동여맨다. 엄마들은 보자기에 싼 빈 그릇을 머리에 이고, 아이들은 줄에 매달린 막걸리 통을 막대기로 통통 치면서 산에서 내려온다. 바로 전까지 터져 나온 꽃잎처럼 흐드러지던 봄의 흥취는 신기루같이 사라진다.


“잘 놀고 오는가?” 아버지들의 물음에 엄마들은 시치미 뚝 떼고 말없이 부엌으로 들어간다. 어둑해지는 하늘로 집집이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한 해를 견디는 힘을 비축한 엄마들의 은밀한 웃음을 싣고 가는 듯. 막걸리 통 두드리던 엄마들의 화전놀이가 팍팍한 시집살이와 힘든 농사일에 지친 심신을 달랬듯이, 문우가 선물한 막걸리 한 통이 이 저녁에 중년의 우울감을 날려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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